두 딸의 성공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내주고  자신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고리오 영감과 사교계 진출로써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는 청년 라스티냐크를 둘러싼 19세기 파리의 이야기. 고리오 영감의 일방적인 부성애를 중심으로 보케르 하숙집의 다양한 인물들과 라스티나크가 사교계에 진출해서 만나는 다양한 계층의 모습들을 그려냈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한줄한줄 아껴서 읽어내려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 소재 중 하나인 ’19C 프랑스’를  여지없이 진솔하게 보여주는 소설로 ‘사실주의’의 위상을 높여주는 명실상부한 작품이었다. 문학사 내 발자크의 다양한 업적들과 자리매김을 제하고라도 분명 그의 소설은 세대를 아우르는 고전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인간희극>>을 대표하는 <고리오 영감> 1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발자크가 그의 소설에 그야말로 우리 삶의 축소판을 담아놓았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첫장에는 보케르 하숙집의 정경과 상황들이 다소 지루할 정도로 세세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곧이어 이 하숙집을 안팎으로 사회vs우리의 관계속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하지만 평행선을 달리듯이 펼쳐진다. 으레 그렇듯이, 우리는 이 사회의 구성요소로 살아가지만 그 속은 치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 이면서도 우리는 어느새 다시 동화되어 있는 것이다.

순수한 청년 라스티냐크를 중심으로 포진되어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그에게 각각 크고작은 영향력들을 행사하지만 그 중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들은 고리오 영감과 보트랭이다. 라스티냐크는 사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복종]은 귀찮고 [반항]은 불가능하며 [투쟁]은 불확실 하다”

가정에 복종한 고리오 영감과 세상에 투쟁한 보트랭 사이에서 고리오 영감으로 하여금 일말의 도덕점 양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고 보트랭으로 하여금 달콤하지만 사악한, 악마적 계약을 통해 사회 위선의 모습을 여실히 배운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순수했던 청년 라스티냐크는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 사교계와 하숙집 사이를 오가며 끝내 ‘파리와의 대결’을 택한다. 그가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반항]을 선택함으로서 이 소설은 결말에서도 그 매력을 또 한번 발산한다. 발자크의 세계관을 엿볼 수 이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이 소설에 또 점수를 주는 부분은 바로 발자크의 객관성이다. 그는 어느 한가지 이념에 치우치지도 않고 그저 객관적인 사회 현상을 묘사해낸 것이다. 가난한 파리의 소시민들과 그와 대조되는 사교계. 또, 사랑과 명예 및 출세, 그리고 돈을 떠받드는 상류사회의 몰락들을 그려내면서 발자크는 한 사회를 끌어안은 것이다. 이하의 문장과 같이!

“보통 이러한 집단은 모든 사회적 요소들을 작은 규모로 나타내게 마련이고 또 실제로 그랬다”

이번엔 이 이야기를 고리오의 부성애로 촛점을 맞춰보자. 고전이 대대로 읽힐 수 있음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읽어도 그 교훈이 무리없이 대입 될 수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보통 자식을 자기 목숨보다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의 대가는 한없이 잔인하고 커야만 했다. 아버지 고리오의 소원대로 두 딸은 나날이 자라며 풍요로워 지지만 아버지 고리오는 나날이 늙고, 죽어가고, 잃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마지막 고리오의 외로운 죽음을 통해 발자크는 고리오가 끝내는 딸들을 저주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두 딸들은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도 자신들의 하녀를 보낼 뿐이며 이런 상황이 되고나서야 비로소 고리오는 자신이 딸들을 너무 사랑해서 딸들로 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자신이 더 이상 가진게 없기 때문에 딸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로 하여금 발자크가 보여주자 했음은 무엇이었을까? 난 인간의 속물 근성은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음을 보았다. 지상 위의 역사를 시작케 한 바로 그 ‘사랑’일지라도 인간의 속물 근성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런한 속물 근성이 다름아닌 내 옆사람에게 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이며, 가정을 파탄내는 한이 있더라도 사회에 만큼은 잘난체 하려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누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했는가? 그 사회란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어떠한 도움이 되는가? 사실 사회는 인간의 이기성을 가장 극대화 시키는 장치가 아닐까?

따라서 어쩌면, 세상에 견주기 위해서는  라스티냐크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차라리 불가능한 [투쟁]이 가장 의미있는 처사가 아닐까 싶다.
이는 과시와 명예 그리고 황금을 따라사는 작중 다양한 귀족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가능성을 둘 수 있다.  ‘가진 채’로 삶을 시작하는  전통 부르주아들도, 대혁명의 여파로 만들어진 부르주아들도 다양한 형상으로 가정을 파탄내고 몰락한다. 아마 그들에게도 [투쟁]정신이 있었더라면 그리 우습게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몰락과 불행을 직접 보고나서야 비로소 [투쟁]정신이 발현되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다. 이건 마치 이웃의 불행으로 하여금 나의 행복을 새삼 깨닫는 나의  모습과 같다.  따라서 나는 내가 지금 가진것을 다시금 의심하고 내가 지금 무의식으로 흘려보내는 익숙한 상황들을 다시금 재고해보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 하였다. 내가 대적해야할 적수는 사회가 아니라 나로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