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47년, 문정희 시인의 대표 시선
15종의 시집에서 엄선한 177편 시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시의 꽃다발
■ 처연히 아름다운 시의 꽃다발
두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기적이다
날마다 기적을 만들려고 했던 그녀는
마녀처럼 치마를 펼치어 식식거리는 불씨를 덮었다
곁에서 우는 아이들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여기서 살기로 했다
이 무모하고 황홀한 진흙탕을 두고
어디로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여시인」에서
문정희의 시력(詩歷)은 한국 여성시의 역사이자 한국시의 역사이다. 여성주의와 생명의식, 실존적 자아의식과 독창적 표현력으로 한국 시사의 주요한 위치를 점해 온 문제적 시인 문정희의 대표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가 새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선집은 2009년 나왔던 같은 제목의 책에 최근 시집(『다산의 처녀』, 『카르마의 바다』, 『응』)의 작품을 추가하고 기존의 시를 수정하여 낸 개정 증보판이다.
50년 가까운 시간을 두고 한 권의 책에 함께 속하게 된 시편들은 각자의 빛을 발하면서도 하나로 묶여 더욱 아름답다. 지난 2009년 시인에게 “오직 나의 슬픔, 나의 보석”이었던 시들은 그간 더 깊은 시간의 응축과 풍화로 인해 시인의 몸 자체, 암흑 자체 그리고 새로운 땅이 되었다. 시인의 몸, 누구도 모를 암흑의 가운데서 시를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운다. 늘 새로운 것을 쓰고, 시를 통해 자기를 갱신하는 시인의 몸은 그래서 새로운 시의 땅이 될 수 있다. 『지금 장미를 따라』는 새 땅에 처연히 돋아난 장미들이고, 시집의 제목처럼 독자는 날카로운 시의 언어에 손에 베일까 두려우면서도 그것의 아름다움에 본능적으로 손이 간다. 지금, 장미를 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여성의 생명에 대한 실존적 자각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에서
문정희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이 말은 어폐가 분명하다. 이렇게 말해야 옳을 것이다. 문정희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시인은 전쟁의 참혹이 채 몸을 거두기 전 이 땅에 여성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시를 써 왔다. 시인이 여성의 삶과 여성의 실존에 천착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정희의 시를 두고 여성이라는 속박을 씌우고 여성으로 새 기준을 만들어 평가하는 것은 문정희 시에 대한 철저한 배반이자, 아이러니한 모순일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여성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비춰 준다. 그 시대 많은 ‘여’학생들이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도 가사와 육아 등의 사회의 뒤편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던 것처럼 문정희의 시 또한 ‘여’시인이라는 굴레를 씌워 평가되고는 했다. 시인의 대표작을 모아 놓은 이번 시선집은 시인에 대한 좁은 해석과 느슨한 평가를 단박에 해체하기에 충분하다. 시인은 곡진한 슬픔을 대신 울어 주는 ‘곡비(哭婢)’의 역할에 충실하며, 전쟁 뒤의 가난, 1980년대의 광주, 우리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 타지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하나의 존재로서 드러낸다. 시인의 여러 체험은 생명 의식과 실존적 자아의식을 강화시켜 주었으며 그것이 두드러진 것이 여성의 생명 의식이다.
왜 하필 여성인가 묻는다면, 이 시대에 아직까지도 대신 울어 주어야 할 일이 많은 대상이 여성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시아비는 내 손을 잘라 가고/ 시어미는 내 눈을 도려 가고”라고 말했던 1970년대와 그 많던 여학생이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차림 저녁밥상을 퇴근한 남편이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 치우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1990년대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폭력과 위험에 노출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정희의 시는 여전히 현재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으며, 시인의 곡비 소리는 끝나지 않는다. 『지금 장미를 따라』에는 이렇게 대신 울어 주는 시인이 있다.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그 울음의 결을 따라 어떤 위로를 얻는다.
■ 해설에서
문정희는 머물러 있는 시인이 아니다. (……) 50년 동안 그의 사유와 언어가 활달하고 당당하였으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지금까지 누가 그에게 길을 일러 준 바 없으니 앞으로도 “자유로이 홀로” 자신의 길을 열어 갈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이숭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