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5

광해군에서 인조까지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6년 2월 25일 | ISBN 978-89-374-1705-4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0x210 · 301쪽 | 가격 15,800원

책소개

광해군부터 병자호란까지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순간들

 

출간과 동시에 역사 분야 1위에 올랐던 『역사저널 그날』의 다섯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역사저널 그날』은 매주 주말 저녁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교양 역사 토크쇼 「역사저널 그날」의 재미를 온전히 책으로 담았다.

5권에서는 광해군과 인조 대 격변의 정치사와 두 차례의 호란, 삼전도의 치욕을 다룬다.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은 즉위와 동시에 내우외환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채 수습하기도 전에 신흥강국으로 성장한 후금이 조선의 북방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동의보감』 편찬을 지원하고, 허균을 비롯한 개혁 세력을 등용하여 내치를 다지고자 했으나 폐모살제와 중립 외교 등을 이유로 왕좌에서 내쳐졌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와 반정 세력은 왕권 수호의 방법으로 기찰 정치를 택했다가 이괄의 난이라는 역풍을 맞았고, 변화된 국제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해 두 차례의 호란을 불러왔다. 병자호란의 패배가 가져온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으로 기록됐다.

이 책은 지난한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재미와 깊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토크와 드라마, 사료와 도표로 이어지는 이 책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이 시대를 조망하는 너른 안목과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전하는 재미와 감동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리뷰

▶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그날’의 에피소드들

 

광해군, 왕이 되지 못한 남자

“후금이 쳐들어오면 혀로 막고 붓으로 쳐부술 겁니까?” 광해군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함께 전장을 누볐던 노성한 대신들은 모두 사라지고 조정엔 백면서생들만 남아 대명의리를 외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제들을 죽이고 새어머니를 궁에 가두며 왕권을 다졌건만 조정 대신들은 누구 하나 광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신하들이 왕을 무시하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국정마비 상태가 지속됐다.

 

인간 승리의 대명사 허준, 금수저 물고 태어나 낙하산 벼슬까지?

1999년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허준」. 드라마는 그 인기만큼이나 대중의 머릿속에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 양반집 서자로 태어나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내의원에 입성하는 허준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역사 속 진짜 허준의 모습은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다는데……. 명문가 자제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허준은 정철, 성혼 등 당대 실세들과 교류했을 뿐 아니라 과거도 거치지 않고 내의원 고위직을 차지했다고 한다. 무엇이 진짜 허준의 모습일까?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자 개혁가였던 허균, 능지처참을 당하다!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조선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동생으로 알려진 허균. 그가 반역을 꾀해 사지가 찢겨 죽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허균에게 이토록 처참한 죽음을 내린 이는 그가 충절을 바쳤던 왕 광해였다. 천민, 서얼, 기생 등과 어울리며 매양 책을 읽고 시를 읊었던 자유인 허균, 권력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였던 그가 정말 반역을 꿈꾸었을까? 『역사저널 그날 5』에서 혁명가 허균의 모습을 확인해 보자.

 

벼랑 끝에 내몰린 무인 이괄, 살기 위해 칼을 뽑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반란이었다고 평가되는 이괄의 난. 반란군이 수도를 점령한 일 또한 이때가 유일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역사서 『연려실기술』에서는 이괄의 난을 ‘반란’이 아닌 ‘변란’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괄의 난이 계획된 쿠데타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에 가까웠다는 것. 반정공신이자 왕이 가장 신뢰하는 장수로 부러울 것 없는 권력을 누렸던 이괄. 무엇이 그를 반란으로 내몰았을까?

 

광해군의 눈과 귀를 막은 여인, 김개시

인조반정 당일, 광해군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미 수차례 반정을 예고하는 고변이 올라왔지만 광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200회 이상 친국을 했던 그가 태도를 바꾼 것은 그의 곁에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대소사부터 왕의 잠자리 시중을 들 궁녀까지, 광해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좌우했던 여인 김개시. 보통 이하의 용모를 가졌다는 그녀가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청나라 황제를 모욕한 조선 사신들

1636년 4월 11일, 화려하게 치장된 심양 고궁에서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의 즉위식이 열렸다. 단상에 놓인 황금 의자에 올라앉은 홍타이지는 단 아래 좌우로 줄지어 선 각국의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의 베이러와 명나라 사신까지 모두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온 두 사신, 이확과 나덕헌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예를 표하지 않았다. 참지 못할 모욕을 당한 홍타이지, 조선의 앞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강화도 함락, 남한산성을 무너뜨리다!

혹독한 추위가 찾아오는 남한산성의 겨울, 고립 38일째의 인조 일행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예상치 못한 청군의 진격에 배를 채울 식량도 추위를 피할 옷가지도 챙기지 못한 채 피란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왕인 인조조차 이불이 없어 옷을 껴입은 채 잠을 청했고 수라상에 닭 한 마리 올리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이 안전한 강화도에 피란해 있으니 조선 왕조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때 바깥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산성이 함락됐다는 것이다. 수군도 없는 청이 어떻게 강화도를 함락시킨 걸까? 인조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삼전도의 굴욕

“결박은 면하게 해 주겠다. 관은 끌고 나오지 않아도 좋다. 단, 죄인은 정문으로 나올 수 없다.”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하기 위해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는 항전 47일 만에 남한산성을 나섰다. 하급 관리의 의복인 남색 옷을 입고 서문을 나선 인조. 인조는 청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으로 기록된 삼배구고두례였다.

목차

서문 ‘역사를 바꾼 그날’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 5

 

1 광해, 왕이 되지 못한 남자 11

 

요즘 학생들은 광해군을 어떻게 생각할까? | 소셜 빅 데이터로 분석한 광해군의 이미지 | 광해군과 대신들의 파병 논쟁 | 광해군은 왜 파병에 반대했을까? | 17세기 국제 정세 분석 | 조선의 파병, 전투 결과는? | 임진왜란 때와 반대로 조총 부대가 패배한 이유는? | 싸얼후 전투 패배가 조선에 미친 영향 | 싸얼후 전투 패배 후 신하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 광해군과 강홍립이 서신을 주고받은 이유 | 조선을 뒤흔든 세제 개혁 대동법 | 대동법이 확대 실시되지 못한 이유? | 광해군의 남자들, 대동법을 주장하다 | 광해군과 폐모살제 |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2 허준, 『동의보감』을 완성하다 43

 

의서 한류를 일으킨 『동의보감』 | 대중매체에서 그려진 허준 |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해부했다? | 허준의 여인 예진아씨는 실존인물일까? | 실세들과 어울렸던 금수저 허준 | 허준, 내의원에 특혜 채용되다? | 신이 일으키는 무서운 질병, 두창 | 『동의보감』 편찬은 광해군이 아닌 선조의 업적이다? | 애민 정신의 결정체 『동의보감』 | 『동의보감』으로 본 사회상 | 선조, 『동의보감』으로 마음의 병을 다스리다 | 선조의 죽음과 허준에 대한 탄핵 요구 | 『동의보감』의 완성, 허준은 어떤 상을 받았을까? | 『동의보감』 그것이 궁금하다 | 『동의보감』과 양생(養生) | 한의학자가 생각하는 『동의보감』의 가치 | 세종 대 의서들과 비교해 보면? | 『동의보감』에 붙이는 ‘작가의 말’

 

3 허균, 능지처참 당한 날 81

 

허균을 능지처참으로 이끈 죄는? | 조선의 이단아 허균 | 어머니 상중에 기생을 끼고 놀다 | 서자들과 특히 친했던 적자 허균 | 심리 유형으로 분석한 인간 허균 | 애정 결핍으로 고통받던 천재 작가 | 허균, 서자들의 후견인을 자처하다 | 강변칠우가 꿈꾼 세상 |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 | 칠서의 난은 어떻게 정치적 문제로 커졌나 | 계축옥사 이후 허균은 어떻게 대응했나 | 허균,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다 | 허균이 정말 남대문 흉방을 썼을까? | 의혹에 싸인 허균의 죽음 | 허균은 정말 역성혁명을 도모했을까? | 허균이 끝맺지 못한 한마디

 

4 인조, 반정을 일으킨 그날 115

 

세검정, 역사를 씻던 곳에서 칼을 씻다 | 우리에게 인조반정이란? | 왜 하필 능양군이었나 | 인조반정의 명분, 왜 일으켰나 | 명분 뒤에 숨겨진 진짜 이유 | 광해군의 여인 김개시, 용모는 어땠을까? | 상궁 개똥이, 조선의 모든 권력을 쥐다 | 김개시가 광해군을 배신했다? | 집권 말기, 광해군이 역모에 둔감해진 이유 | 반정군은 어떻게 궁을 장악했을까? | 조선 중기 궁궐의 호위 체계 | 왕의 무사, 무예청 병사들은 어떻게 선발하나 | 반정이 끝나고 숙청이 시작되다 | 광해군을 죽이지 않은 이유 |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5 이괄, 반란의 칼을 들다 151

 

이괄의 생활 기록부 | 반정 그 후, 조선에 불어닥친 피바람 | 인조 정권의 기찰 정치 | 반정 직후 인조가 이괄을 평안도로 보낸 이유 | 이괄이 난을 일으키게 된 결정적 사건은? | 이괄군의 핵심 전력, 항왜 | 이괄의 난은 어떻게 전개됐나 | 최태성의 붕당사 3분 정리 | 이괄에 난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 콩죽으로 벼슬 얻고 떡 해 바쳐 역사에 이름을 남기다 | 반란군을 환영한 한양 사람들 | 반란의 승패를 결정지은 안현 전투 | 이괄의 난, 그 후

 

6 정묘호란?━ 후금, 압록강을 건너다 185

 

후금군의 조선 침공 어떻게 시작됐나 |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후금군, 조선 관군의 대응은? | 속수무책의 조선 관군, 대응할 실력이 없었나 | 의병, 후금이 이기지 못한 유일한 부대 | 파죽지세의 후금군, 조정의 대책은? | 270여 년간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 | 현대 중국에 남은 만주족의 자취 | 동아시아는 그때! | 희대의 사기꾼 모문룡 | 조선은 왜 모문룡을 내치지 못했나 | 전쟁 발발 이틀 만에 화친을 요구한 후금 | 진퇴양난에 빠진 인조 | 후금이 거듭 화친을 제의한 까닭은? | 조선, 가짜 인질을 보내 후금을 속이다 | 후금의 아우가 된 조선 | 피로 맹세한 후금군, 철수하지 않았는데 | 정묘호란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7 병자호란 1 ━ 남한산성에 고립되다 219

 

병자호란 발발과 닷새 만의 도성 점령 | 인조는 왜 남한산성으로 갔을까? | 범 모르는 하룻강아지 조선 | 임시 빈소 뒤에는 왜 군사들이 있었나 | 고개를 들고 홍타이지를 능멸한 조선 사신들 | 인조는 왜 원종 추숭에 집착했나 | 인조는 정말 민생에 관심이 없었나 | 남한산성 이모저모 | 남한산성을 지킨 조선의 승려들 | 또다시 반복된 조선의 외교 실책 | “화친해도 좋고, 싸워도 좋은 날입니다.” |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나날들 | 충격적인 패배, 쌍령 전투 |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나 | 운명의 그날, 청의 최후통첩 | 청이 끝까지 인조의 출성을 요구했던 이유는?

 

8 병자호란 2 ━ 치욕의 삼전도 257

 

삼배구고두례와 고대 항복 의식의 절차 | 피 흘리는 인조와 의식 중에 소변을 보러 간 홍타이지 | 역사가 기록한 치욕의 그날 | 삼전도비에 새겨진 내용은? | 수군도 없는 청이 강화도를 함락시킨 비법은? | 조선 수군의 안일한 방어 전략 | 강화도 함락, 남한산성을 무너뜨리다 | 청이 내건 열한 가지 항복 조건 |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도 어떻게 인조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나요?” | 척화파가 주도했던 조선, 정축화약은 잘 지켜졌을까? | 인간 시장에 나온 조선의 백성들 | 조선 시대 문학 작품에 드러난 병자호란의 참상 | 환향녀,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

 

 

주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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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우리에게는 수많은 기록과 기억이 있다. 그것들을 꿰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와 너, 우리가 탄생한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며, 때로 무기가 되고 거울이 된다. 역사의 무궁한 힘을 믿기에 그것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 읽고 쓰고 뛴다.

수십 명의 PD와 작가, 스태프와 패널들이 모여 2013년 가을 첫 방송을 시작한 「역사저널 그날」은 토크쇼 형식을 빌려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는 신선한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딱딱하고 일방적인 지식 역사가 아니라, 웃고 떠들고 눈물짓는 이야기 역사, 사람의 살 냄새 짙은 사랑방 한담 같은 맛으로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갈채를 받고 있다.

역사(History)란 무엇보다 이야기(Story)임을 보여 주고자, 끊임없이 만나고 엮고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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