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국내 최초 프루스트 전공자의 완역본 프랑스 갈리마르 판 번역, 풍부한 각주, 한국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정본으로 남을 작품
부제: 게르망트 쪽
원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워서 부제: Le Côté de Guermantes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5년 12월 18일
ISBN: 978-89-374-8566-4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32x217 · 544쪽
가격: 17,000원
분야 외국문학 단행본
발행일 2015년 12월 23일 | 최종 업데이트 2015년 12월 23일 | ISBN 978-89-374-8597-8 | 가격 11,200원
《타임스》, 《르 몽드》 선정 20세기 최고의 책
프루스트 이후 모든 소설의 출발점
3편, 「게르망트 쪽」 출간
“20세기 소설의 혁명”,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이라고 일컬어지는 걸작.
기존 소설의 틀을 벗어던지고, 의식의 흐름을 좇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통해
집요할 정도로 정밀하게 인간 내면과 시대상을 담아낸 기념비적인 작품.
현대 문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20세기 최고, 최대의 소설.
5권
1부
6권
2부
작품 해설
■ 국내 최고의 프루스트 번역서, 후속편 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 세 번째 이야기, 「게르망트 쪽」
청년기에서 성년기로, 감성에서 지성으로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에 이어 3편 「게르망트 쪽」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6권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편에서는 유년기를 보낸 콩브레, 첫사랑과 문학적 스승을 만난 발베크를 떠나, 오랫동안 몽상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게르망트 저택의 별채로 이사한 마르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침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르망트 부인을 동경하게 된 마르셀은 그녀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녀의 조카이자 자신의 친구인 생루를 찾아 군사 도시 동시에르로 가고, 빌파리지 부인을 비롯하여 그토록 열망하던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만찬에 참석해 포부르생제르맹 귀족 사회와 맞닥뜨린다.
포부르생제르맹 귀족 사회를 대표하는 ‘이름’이자 마르셀의 유년기 머리맡을 장식하던 환등기 속에서, 그리고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의 가면무도회에 이르기까지 화자의 긴 여정을 동반하는 마술적인 ‘이름’인 ‘게르망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와도 같다. 프루스트는 「게르망트 쪽」에 대해 “청년기에서 성년기로, 감성에서 지성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라고 밝힌바, 배움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환상과 환멸, 꿈과 깨어남을 다룬다는 점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기말 사회의 재현이자 현란한 ‘벨 에포크’ 시대의 구현, 게르망트 가(家)의 살롱
게르망트 저택이 위치하는 포부르생제르맹은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귀족 사회의 마지막 흔적이다. 1870년 제3공화국의 사회당 정부 수립과 더불어 공식적인 지위를 잃은 귀족들은 그럼에도 1차 세계 대전까지 여전히 존재했으며, 그들의 살롱 또한 온갖 지성과 예술의 구심점으로 기능했다. 한나 아렌트는 「게르망트 쪽」이 이러한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그동안 억압되고 배제되어 온 세기말의 가장 어두운 부분인 ‘유대인’과 ‘동성애’라는 “악의 발견”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그들의 입장, 그에 따른 유대인에 대한 관념, 그리고 화자를 그토록 설레게 했던 음악, 미술, 연극 같은 예술 작품을 대하는 이들 귀족들의 태도는 화자에게 환멸을 불러일으킨다. 이번 편에서 화자 마르셀이 겪는 이 환멸은, 바로 이러한 세기말 사회와 게르망트 가가 구현하는 ‘벨 에포크’ 시대의 허상, 그 허망함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편에서 화자가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그를 매혹했던 ‘게르망트’라는 이름은, 화자가 게르망트 가문의 실제 인간을 접하는 순간 산산조각 나고 만다. 프루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름에 대한 몽상 속에서 ‘적도’ 너머 다른 세계에 위치한다고 믿었던 포부르생제르맹이라는 요정이 형편없이 낡아 빠진 ‘신박 닦는 깔개’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나와 포부르생제르맹을 가르는 경계선은 순전히 관념적인 것이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보였다. 나는 적도 저편에 펼쳐진 게르망트 댁의 신발 닦는 깔개, 어느 날 그 집 문이 열렸을 때 나처럼 깔개를 본 어머니가 형편없이 낡았다고 감히 말했던 그 깔개가 이미 포부르생제르맹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다. —작품 속에서
그곳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대단한 스노비즘(속물주의)” 취급을 하며, 게르망트 공작을 비롯한 귀족 대부분의 취향은 모순적이게도 지극히 관습적이고 부르주아적이다. 이러한 그들의 취향은, 그들 스스로를 그들이 경멸하는 부르주아와 같은 위치에 놓는다. 포부르생제르맹을 신화적인 존재로 여기고 그에 편입되기를 열망하던 부르주아들, 즉 르그랑댕이나 스완, 블로크, 어쩌면 화자까지도 모두 ‘스노브(속물)’에 놓아 버리는 프루스트의 시선은 “실체가 없는 계급에 대한 욕망이란 필연적으로 환멸과 허무의 인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허무 의식은 이 작품 속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령처럼 감도는 죽음의 이미지, 또 하나의 환멸과 삶을 향한 발걸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게르망트 쪽」이 차지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위치는, 어린 시절 마르셀의 곁을 지키며 따뜻한 애정을 보이던 할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1905년 요독증으로 목숨을 잃은 프루스트의 어머니처럼, 마르셀의 할머니 또한 요독증으로 죽음에 이른다. 프루스트라는 ‘개인’이 체험한 ‘죽음’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 어디에서도 「게르망트 쪽」만큼 구체적이고 처절하게 묘사되지 않는다고 평가된다. 프루스트는 임종의 고통을 “짐승과도 같은 본능적인 것”으로 환원하면서 그 어떤 저항이나 부인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동그랗게 몸을 반쯤 구부린, 할머니가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짐승과도 같은 존재가 머리털로 뒤덮인 채 침대 시트 속에 드러누워 헐떡거리고 신음하면서 경련으로 담요를 뒤흔들고 있었다. 눈꺼풀은 감겼고, 아니, 열렸다기보다는 꼭 닫히지 않은 흐릿한 눈곱 낀 눈동자 한 구석이, 단지 시각 기관에 지나지 않는 눈의 어둠과 내적 고통을 투영하듯 살짝 보였다. 이 모든 동요는 할머니가 보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기서 몸부림치는 것이 짐승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할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작품 속에서
마르셀에게 있어,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다. 더욱이 인간도 아니며, 그저 “짐승과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파괴되어 가는 육체는 프루스트(마르셀)에게 있어 죽음을 어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요소가 아니라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현실”로 인식하게 한다. 하지만 강렬한 고통의 순간을 넘어, 할머니는 결국 최후의 순간, 예전 콩브레에서처럼 “한 줌 바람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했던 존재로 남는다.
롤랑 바르트는 프루스트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하며,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서 물리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을 증언해 주고 영속시키고 망각 밖에 위치하게 함으로써만 그 일은 가능해”지며(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이 작품에서 ‘할머니의 죽음’이야말로 절대적인 고통의 순수함을 극화한 감동적인 순간으로 진실의 순간을, 작품의 생명력을 담보해 준다고 평가한다.
▷ 프루스트, 한 위대한 작가의 실존적 글쓰기
화자의 오랜 몽상의 대상이었던 게르망트, 그러나 이제는 환멸의 대상이 된 게르망트는 현대를 향한 문턱에서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갈등과 분열을 겪으면서 좌초하는 존재의 불안과 고뇌를 담고 있다. 세기말의 어두운 사회를 사로잡았던 ‘유대성’과 ‘동성애’라는 악덕을 소설적 글쓰기로 승화한 프루스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 아니 어떤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보다도 더 ‘벨 에포크’ 시대의 현실을 가장 잘 구현한 작가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복사할 수 있는 표면적인 외적 현실”의 나열이나 기록을 넘어서서, 화자의 의식이나 감각과 기억에 와 닿는 내적 현실까지도 포착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세기 문학의 통상적인 리얼리즘과는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프루스트가 관찰하는 포부르생제르맹과 드레퓌스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닌, 작가 자신의 실존적 양상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프루스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다. 그리고 아들인 프루스트는 동성애자이다. 이런 “고백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비밀” 혹은 “어머니 앞에서 고백할 수 없는 비밀”이 주는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그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만이 그를 “침묵의 광기”로부터 구원해 준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제 “또 다른 불가능의 지평”인 “어머니 앞에서 고백할 수 없는 비밀”을 4편, 「소돔과 고모라」에서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 프루스트를 읽을 마지막 기회
―프루스트 전공자의 완역본, 갈리마르 플레이아드 판 번역, 풍부한 주석 작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두 7편에 이르는 연작 소설로서, 그 분량을 합하면 몇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이다. 2013년, 「스완네 집 쪽으로」 출간 백 주년을 맞아 민음사에서는 프루스트의 전 권 완역 출간을 준비 중이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프루스트 전공자’인 김희영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가 “프루스트 전공자로서 사명감과 용기를 가”지고 번역에 모든 정열과 노력을 쏟은 작품이다.
1985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판본(1954년 판)과는 달리, 1987년 프랑스 플레이아드 전집 판으로 새롭게 출간된 판본을 번역본으로 삼았으며,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프루스트 연구자들의 주석 작업, 그리고 중국과 일본 등 여러 국가 판본들을 비교, 참고해서 진행하는, 그야말로 프루스트의 ‘정본’이라고 할 만한 번역본이다.
역자 김희영 교수는 이번 번역 작업을 통해 “길고 난해한” 프루스트의 문장을 “최대한 존중”하여 “텍스트의 미세한 떨림”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밝혔으며, “독자의 이해와 작품의 올바른 수용을 위해 최대한 많은 주석 작업을 통해 문화적, 예술적 차이를 극복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 20세기 최고, 최대의 소설
― 프루스트를 읽지 않고 소설을 읽었다 말할 수 없다
프루스트 이전 소설들의 종착지이자, 프루스트 이후 소설들의 출발점이 될 만큼 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타임스》, 《르 몽드》 등 세계 유력 일간지에서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꼽히며, 엘리엇, 모루아, 발레리, 베케트, 보부아르 같은 거장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리비에르, 벤야민 등의 비평가,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소설이다.
17∼18세기 소설들이 인간 내면보다는 인간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습과 거대한 자연의 힘을 담아내려고 했다면, 프루스트는 오로지 ‘인간’ 그리고 그 인간 ‘의식의 흐름’ 그 자체에 생각과 펜을 맡긴 채 유례없이 장대하고 유려한 대작을 완성해 냈다.
코르크로 문틈을 막고 천식과 싸우며 14년에 걸쳐 써낸 이 작품은 모두 7편, 몇천 쪽에 달하는 이 “20세기 최대의 문학적 사건”은 ‘나’라는 화자의 성장과 시선에 따라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온갖 사유를 담아낸다. 그 속에 유년기의 기억, 사랑과 정념, 질투와 욕망, 상실과 죽음, 예술, 사회, 문화, 정치, 역사 등 그야말로 ‘인간 삶’의 총체적인 모습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독자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가장 큰 체험”(버지니아 울프)을 하게 해 준다.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라는 프루스트의 말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우리가 ‘소설’을 통해 얻고 바라고 체험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그 누구도 프루스트를 읽지 않고는 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유년, 사랑, 정념, 예술, 그리고 죽음까지
― 19세기를 관통해 20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르는 인간 삶의 총체적 서술
프루스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대가들의 작품을 모작하거나 번역하며 이전 세대 모든 문학과 예술을 책이라는 공간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런 그의 시도는 현대 소설의 선구자라는 명칭뿐만 아니라 현대 사유의 중심에 그를 자리하게 했다. 독일 문예 비평가 벤야민에 따르면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삶에서의 실제 ‘체험’이 아니라 그런 체험의 “기억을 짜는 일”이며 프루스트는 낮 동안 짰던 실을 밤이면 풀어헤치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이해한 작가다. 텍스트의 어원인 ‘직물’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프루스트는 “끝없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텍스트를 짜고 풀고 덧붙이며 한 권의 책 속에 우리 모든 삶을 담으려 했던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담론이다. 어린 ‘나’는 스완의 딸 질베르트를 짝사랑하고, 스완은 화류계 출신 여성 오데트를 욕망한다. 어린 소년의 풋사랑, 환상이라는 옷을 입고 아름답게 채색된 첫사랑, 엄마에 대한 소년의 집착, 질투로 얼룩진 욕망, 그리고 금기와 죄의식에 사로잡힌 동성애 등, 이 작품은 온갖 사랑의 형태에 따른 아름다운, 혹은 비극적인 서술로 가득하다.
프루스트는 사랑을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완전한 소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타자를 완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법칙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은 주체를 광기와 혼미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며 그리하여 사랑의 대상은 쾌락의 대상이 아닌 탐색과 고통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주체를 사로잡는 이 강렬한 질투의 감정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감정은 진실에 대한 열정을 되찾게 해 주며 비록 그 열정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부분적인 왜곡된 것이라 할지라도 마비된 우리 영혼을 일깨워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삶의 진실에 보다 근접하게 해 준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이처럼 사랑 또는 정념에 내재하는 고통에 의해 주체가 그 불가능의 지평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스완에게 고뇌를 알게 한 것은 바로 사랑으로, 사랑이 고뇌를 숙명적으로 만들고, 독점하고, 특별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내 경우처럼, 사랑이 아직 우리 삶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고뇌가 먼저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고뇌는 사랑을 기다리는 동안 막연하고 자유롭게, 정해진 목적 없이, 오늘은 이 감정에서 다음 날은 저 감정으로, 어떤 때는 자식으로서의 애정에, 또 어떤 때는 친구에 대한 우정으로 표류한다. —작품 속에서
외과 의사의 말대로 그의 사랑은 더 이상 수술할 수 없는 병이었다. —작품 속에서
누구나 사랑을 하면 더 이상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작품 속에서
또한 화자는 예술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 스완은 오데트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 보티첼리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콩브레 시골 부엌 하녀는 지오토의 「우의상」에 나오는 처녀 ‘자비’와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모네와 마네, 터너, 그리고 베네치아 유파의 카르파초 등도 작품 속에 자리한다.
음악 역시 셸링과 쇼펜하우어 등 독일 낭만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뱅퇴유의 등장을 통해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하지만 프루스트의 유려한 문체로 말해지는) 세계를 탐색한다.
이처럼 생시몽, 라신, 발자크, 플로베르, 보들레르로 이어지는 문학가들, 지오토, 카르파초, 베르메르, 렘브란트, 휘슬러, 모네, 르누아르 등의 화가들, 그리고 바그너, 드뷔시, 생상스, 프랑크 같은 음악가들, 뿐만 아니라 성당과 채색 유리, 종탑, 장식 융단과 보석 세공, 의복, 화장, 사진, 요리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예술 전반에 걸친 성찰과 섬세한 묘사는 “총체적 예술로서의 문학 이미지”를 구현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소년의 유년기를 거쳐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술을 향유하며 한 시대를 살아 나가는, 그럼으로써 인간 내면과 삶의 총체적 모습을 담고 있는 기념비적인 대하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더불어 20세기 2대 걸작 중 한 편이다. 이들을 읽지 않고 문학을 논할 수 없다.” —T. S. 엘리엇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앙드레 모루아
“생명력이 가득 넘쳐흐른다.” —폴 발레리
“한없이 다시 읽고 또 읽고 싶은 작품.” —시몬 드 보부아르
“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다. 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 —버지니아 울프
“한 인간 삶의 가장 완벽한 재현.” —알랭 드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