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 자두나무에서 만난 지적인 감각
일요일의 공허를 채우는 시적인 사유
1975년 문단에 나와 시인, 작가, 출판인이자 이 시대의 지식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장석주의 신간 시집 『일요일과 나쁜 날씨』가 독자 여러분을 찾는다. 시집은 치열한 사유로 벼려 낸 지성의 산물이자, 단단하고도 유연한 감각의 발화가 되어 우리 생의 크나큰 “찰나”를 발생시키고 있다.
■ 시작과 끝에 서 있는 자두나무
어디서 왔느냐, 자두나무야,
자두나무는 큰 눈을 인 채
붉은 자두 떨어진 방향으로 몸을 기울인다.
우리는 자두나무의 고향에 대해
알지 못한다.붉은 것은 자두나무의 옛날,
자두나무가 서럽게 울 때
저 자두나무는 자두나무의 이후,
자두나무의 장엄이다.
-「눈 속의 자두나무」에서
『일요일과 나쁜 날씨』는 과거-현재-미래를 지금의 우리 앞으로 일순간에 소환한다. 소환의 자리에는 한 그루 자두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자두나무’라는 지배적 상관물을 통해 우리의 장엄한 시간이 결국 찰나와 찰나의 모음이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자두나무의 삶은 380만 년을 이어온 인간의 역사와 자연스레 역치된다. 그것에는 실체와 미지, 낮과 밤은 옹색한 구분일 뿐이다. 지금이 이후가 되고, 여기가 저기가 되며 당신이 곧 내가 될 때, 자두나무는 모든 사물과 생활의 탄생지가 될 수 있다. 시인은 이 모든 게 합해지고 섞여드는 공간을 나무 한 그루로 위치시킴으로써, 그 자리에 붙박여 타자를 바라봐야 하는 시선을 독자에게 강제한다. 독자는 모호성의 세계로 초대되어, 자두나무에서부터 시작되는 시적 미로에 빠진다. 그 출구에는 무엇이 있을까.
■ 야만을 넘어서, 야만을 위하여
죽음이 왼쪽 눈으로 나의 부재를 본다.
후박나무 잎이 떨어질 때 오후 5시는
집개가 조용히 숨을 거두는 마당에 도착하고
당신은 본다, 우연을 확장하는 이 부재의 시각을.
죽음은 과거들의 미래,
내일의 모든 약속을 철회하는 나,
화요일의 밤은 화요일의 밤으로 깊은데,
어제 저녁을 먹고 잠든 내가 없다니!
미래는 이미 발밑에 엎질러져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일요일과 나쁜 날씨』를 읽는 독자는 자두나무 곁에 선 유일자가 되어, 허기와 허영을 통해 또 다른 유일자와 만나는 노정에 서게 된다. 문명화된 우리가 기다리는 유일자는 야만인이다. 그는 뚜렷한 형체를 하고 있지 않기에, 쉽사리 알아보기 힘들다. 야만은 증상이나 징후가 아닌 특성과 속성으로 존재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우리의 삶 자체다. 우리의 삶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우며 연약하고 모호하다. 그것을 우리는 문명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재단하며 분류하려 했다. 야만에서 비롯된 문명은 야만을 억압하고, 야만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호함을 숨긴다. 이쯤에서 우리는 갑판 위에서 홀로 웃고 있는 시인을 ‘광인’인자, ‘착한 이웃’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의심하게 된다. 과연 그를 따라가면 나쁜 날씨 속 미로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 지적 감각과 시적 사유
장석주 시인은 ‘자두나무’, ‘일요일’, ‘야만인’ 등의 시어를 시집의 지배적 단어로 배치하면서 그것에 오래 숙련된 감각을 부여한다. 그것은 슬픔과 평온의 혼재된 채로 난간에 기대어 있다. “슬픔의 저지대”에서 “먼 곳의 빈 방”까지, 장석주의 지적인 감각과 시적인 사유는 난간 아래의 슬픔을 건져 올려 독자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신파적 회피나 난감한 요설이 아닌, 정제되고 단련된 장르, 시인이 40년을 써 온 단 하나의 예술, 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요일의 나쁜 날씨”는 우리를 난감하게 하지만, 난감함을 관통하여 우리가 도달한 난간 아래에 슬픔에 빠진 타인이 보인다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견딜 수 있으리라 장석주는 말하고 있다.
■ 추천사
충주구치소 방향으로 가 본 적 없다는 독백이 사실이라도 당신은 구치소를 알고 있다.“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았지만 당신은 구치소의 감정을 알고 있다. “과거는 미래”인 것처럼 전생과 후생의 일부를 당신은 구치소에서‘탕진’해 왔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내륙의 습관에 따르면 당신을 망친 저녁은 매일 방문한다. 그때 당신의 발자국은 ‘적조’의 흔적이다. 시인의 삶이 헝클어진 시간의 매듭을 찾고 뒤섞여 버린 공간을 헤매는 일이란 걸 당신은 고백하고 있다.
“검정은 다만 검정이 아니”라는 건 쉬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잠깐 목구멍과 가까운 그 말의 정거장에 멈춘다. 어쩔 수 없이 당신은 비애를 쓰다듬는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풍경이 있다. 풍경 또한 ‘찰나’이긴 하지만 당신을 걱정한다. 아니 당신에게도 풍경을 위무하는 문어체가 있다. 당신은 그 시선을 “경첩을 달아 주는”일이라고 애써 반추한다. 풍경이 주어가 될 때 “이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에 속”하면서 당신이 먹는 한 끼의 국수처럼 “단순하되 극적”이다. 시집을 덮었지만“오늘은 당신과 나에게도/ 큰 찰나!”라는 행간은 며칠 동안 내내 독자를 간섭하리라. -송재학(시인)
1부
좋은 시절 13
한밤중 부엌 15
난간 아래 사람 16
활과 화살 18
겨울의 빛 19
당신이라는 야만인 21
돌 22
문턱들 24
큰고니가 우는 밤 26
충주구치소 방향 28
측행(庂行) 30
종말을 얇게 펼친 저녁들 31
광인들의 배 33
2부
가을 만사(萬事) 중의 하나 39
저 여름 자두나무 40
눈길 41
북 43
가을의 부뚜막들 44
박쥐와 나무옹이 46
미생(未生) 48
일요일이 지나간다 50
숲 51
긴 뱀에게 52
일요일의 시차 54
북국 청빈 56
비의 벗들 58
3부
노래가 스미지 못하는 속눈썹 61
서리 위 족제비 발자국을 보는 일 62
백 년 인생 64
극빈 66
자두나무를 벤 뒤 67
눈 속의 자두나무 68
하얀 부처 69
지평선 70
겨울 정원의 자두나무 71
추락하는 저녁 73
웃어라, 자두나무! 74
지나간다 75
자두나무 삼매(三昧) 76
자두나무 시계 수리공 78
측편(側偏) 80
4부
우산 83
오전 7시 85
무심코 86
문득 내가 짐승일 때 87
자두나무 주유소 88
옷과 집 90
야만인들의 여행법 1 92
야만인들의 여행법 2 94
함부로 96
야만인들의 사랑법 1 97
야만인들의 사랑법 2 98
야만인들의 사랑법 3 100
야만인들의 인사법 101
야만인이 쓴 책 열한 페이지 102
야만인을 기다리며 103
오후만 있던 일요일 105
5부
야만인의 퀭한 눈 109
야만인이 야만인에게 110
발목들 111
피의 중요함을 노래함 112
국수 113
늙은 자작나무의 피로한 무릎 114
적막 116
슬픈 가축 118
나무들의 귀 119
묵음(默吟) 120
낙빈(樂貧) 121
저녁의 침대 122
토마토 124
연둣빛으로 몰락 126
초록 거미에게 인사를 128
일요일의 저녁 날씨 130
일요일의 모호함에 대하여 132
여름비 134
모란과 작약의 일들 135
작품 해설┃조재룡
야만의 힘, 타자의 가능성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