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함기석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5년 7월 17일 | ISBN 978-89-374-0831-1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60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상식적 믿음과 다른 지평에서 쓰인

언어적 사건으로서의 시

 

저항과 유희, 우연과 필연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초현실적인 긴장감으로 충만한 함기석 시집

편집자 리뷰

■탈옥한 언어로 그린 초현실의 세계

 

시와 기하학을 접목한 ‘시각 시’로 독자적 시 세계를 추구해 온 시인 함기석 신작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가 출간되었다. 전작 『오렌지 기하학』 이후 3년 만에 나온 이번 시집은 4부로 구성, 15편씩 모두 60편의 시로 이루어졌다. 파격적인 해체와 실험이 등장했던 『오렌지 기하학』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번 시집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받을 것이다. 충격과 난해함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익숙하지만 ‘죽음’이라는 풍경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며 자아내는 정서적인 느낌은 생소함을 주기 때문이다.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사물을 지칭하지 않는 탈언어적 언어라는 전위의 바탕 위에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가장 명징한 질서, 죽음의 풍경을 그린다. 낯선 언어와 익숙한 풍경 사이에서 독자들은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초현실을 감각할 수 있다. 시집 해설은 고봉준 평론가가 맡았다. 그의 안내에 따라 함기석 시인이 지향하는 언어 예술로서의 시를 살펴보자.

 

함기석에게 시는 현실에 반(反)하는 초현실의 전쟁이자 질서에서 탈주하는 언어적 탈옥이다. 그의 시를 구성하는 언어들은 탈옥수와 같다. “탈옥한 글자들이 총을 쏘며 빌딩 숲을 달린다”.(「탈옥수들」, 『오렌지 기하학』) 언어의 탈구축, 수학적 기호와 수식, 기하학적․자연과학적 상상력, 시각적 이미지 등은 그가 이 전쟁에 동원한 무기들의 목록이다. 하지만 이 초현실 전쟁의 핵심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에 있다. 따라서 함기석 문학의 본질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문학의 재생산이 아니라 미지의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이다. 초현실의 전쟁은 현실의 질서와 다른 어떤 것을 생산함으로써만 시작되며, 이 발명이 시에서 이루어진다.

 

현실의 질서와 뚜렷이 변별되는 시적 상황을 제시하곤 했던 이전과 달리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한층 모호한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의 내부에 구멍, 즉 공백이라는 사건을 기입하는 장면들을 보여 주곤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일상/현실과 다른 층위의 초현실을 구성하지 않고 현실과 초현실의 불투명한 경계를 최대한으로 밀고 나가는 전략의 결과처럼 보인다. 재생산의 문학이 재현하는 현실과 질서의 공리계에 대항/저항하면서도 그 세계의 바깥을 선험적으로 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에는 전작 『오렌지 기하학』에서 보여 주었던 파격적인 해체나 실험이 사실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기석의 시는 초현실적인 긴장감으로 충만하여, 저항과 유희, 우연과 필연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이전의 시편들이 자연적 삶과 ‘시=언어’를 선명하게 단절시키는 방향을 유지했다면, 이번 시집은 그것들이 불연속적이거나 결코 무관한 관계가 아님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를 위해 시인은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들을 언어화하는 동시에 그 안에 ‘일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세계를 슬쩍 끼워 넣는다.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처럼 초현실로 나아가는 첨점은 일상적 풍경에 사소한 변형/변이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획득할 수 있다. 가령 ‘살모사 방정식’이나 ‘함박눈 함수’ 같은 제목들은 평범한 사물/대상에 수학적 관념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초현실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윤곽을 지우는 언어 운용, 수학적 관념을 통해 창조해 낸 초현실적 세계는 삶에 익숙해진 독자들의 일상에 크고 작은 균열을 내줄 것이다.

 

■발췌

 

묵은 접시 위에서 갈색 잠을 자고 있다

묵은 아내가 잃은 자유를 닮았다

묵은 물컹거리는 아내의 속울음이 담긴 육면체 바다

내가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자

묵 속의 침묵이 둔중하게 손을 타고 파도가 되어

내 심장을 울린다

 

햇살이 가늘고 긴 수십 개의 바이올린 줄이 되어

묵의 지붕에 내리고 있다

내가 젓가락으로 톡, 가장 가늘고 가난한 햇살 하나를 튕기자

아내의 가만 눈망울 닮은 음들이 일렁일렁

찬 물결처럼 퍼져 오고

 

접시꽃 빈 꽃방에서

저녁이 줄 없는 바이올린을 켜며 오래도록 나를 쳐다본다

쇳덩이 같은 고요가 흐르고

아내의 아픈 속살이 내 입술에 닿는 첫 느낌으로

밤이 온다

 

-「아내가 내온 육면체 큐브」에서

 

 

 

첫 장을 열면

광활한 설원이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검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하늘엔 무늬 잃은 기린의 눈빛으로

나를 보는 낮달

지상엔 무더운 눈보라

 

끝 장을 덮으면

끝없는 우주가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유성이 되어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어떤 시집」 전문

목차

1부

오르간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부음(訃音)

양배추는 날 뭐라 생각할까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 π

레몬은 시다

유령 슈뢰딩거

화가 난다

밤의 실내악

종이비행기

죽은 새를 위한 첼로 조곡

괴델 플라워

일출

훌라후프 돌리는 여자

미스 모닝과의 아침 식사

 

2부

백령도

첫 데이트

호른 속에 사는 사람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단 한 사람

아내가 내온 육먼체 큐브

코흐 해안

간병

약속

조약돌

튜브

찡찡공부가 잠든 봄밤

이타사(利他寺) 입구

제로와 푸리에

모래가 쏟아지는 하늘

 

3부

여름밤의 푸가

할머니의 안부

리치빌라 404호

장기 놀이

이륙

광주에서

살모사 방정식

낯선 실내악

함박눈 함수

도미노

뱀장어

검은 구두

백발의 고독이 마루에 혼자 앉아 있다

작은 새-故김남주 시인을 추모하며

앵두

 

4부

어떤 시집

얼굴

하나병원 장례식장 뒤편 소각장

그녀의 뒤뜰

허공의 장례

백 년 후에 없는 것들

장지(葬地)에서

수직선=수평선

흑조가(黑鳥歌)

폭풍 속으로 달리는 열차

잃어버린 편지

오래오래 레스토랑

마지막 해변

흑조

 

작품 해설/ 고봉준

이상한 나라의 탈옥수들 -함기석 시 세계의 문학적 공리들

작가 소개

함기석

1966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했으며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 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동시집 『숫자벌레』 『아무래도 수상해』, 동화 『상상력학교』 『코도둑 비밀탐정대』 『야호 수학이 좋아졌다』 『황금비 수학동화』 『크로노스 수학탐험대』 , 시론집 『고독한 대화』, 비평집 『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 등을 출간했다. 박인환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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