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식 희곡집
한국 연극의 독보적 위상, 극작가 배삼식
데뷔 이후 16년 만에 출간하는 첫 희곡집
창작극과 번안극, 뮤지컬과 마당놀이,
동서양 고전에서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극을 개성적 형식과 깊이 있는 사유,
공감도 높은 대사로 전달하는 한국 희곡의 자존심
한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배삼식 희곡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1999년 데뷔 이후 16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집으로, 그간 개별적으로 대본집을 구해 읽어야 했던 연극계 안팎의 전문가 및 희곡 독자들은 비로소 배삼식의 선별된 작품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잔잔한 구성 아래 뭉클하고 유머러스하며 때로는 풍자적인 대사로 전달하는 배삼식 희곡은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호평이 일치하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동아연극상을 비롯해 대산문학상, 김상열연극상까지 3관왕을 싹쓸이하며 당해 최고의 작품으로 기록된 「열하일기 만보」를 비롯해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전석, 전회 매진을 기록하는 ‘봄날의 고전’ 「3월의 눈」, 2.18 대구 지하철 참사로 인한 유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부조리한 사회를 날카롭게 찌름으로써 지난해 연극계의 화제가 되었던 「먼 데서 오는 여자」 등 배삼식 작품은 매번 대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도 의미 있는 질문을 전달하는 데 성공해 왔다.
창작극뿐만 아니라 번안극 작업도 활발하게 선보인다. 1인 32역의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 당시 실화를 한국적 상황으로 각색, 매년 전국적으로 공연되고 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허삼관 매혈기」역시 원작을 더욱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각색의 힘을 보여 준 작품이다.
■ 전통적 구조와 결별한 개성적 형식
배삼식 희곡은 중심 갈등이 사건을 이끌고 가는 전통적인 극 구조와 차별화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중심 갈등이 없거나 드러나지 않는가 하면 ‘갈등’ 자체가 주제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배삼식 희곡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개성으로, 작품 상당수에서 갈등은 불길처럼 한곳에서 점화되지 않고 온돌처럼 넓게, 서서히 주변을 덥히는 식이다.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한다.
확고한 의지를 지닌 인간, 그 의지를 통한 선택, 그 중첩된 선택의 과정이 필연을 형성해 나가는 세계.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선언하면서 가능한 다른 나머지의 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견고한 세계. 저는 이런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미지는 오히려 파편적이며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것, 필연보다는 우연이 지배하는 어떤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연록(586쪽)
때로는 갈등을 배제하고, 때로는 국면이 바뀔 때마다 다른 이야기로 미끄러지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갈등 자체의 상대성을 드러내는 데 주력함으로써 갈등을 무화시키는 것. 배삼식 희곡은 중심 목소리나 주된 갈등을 인정하는 대신 배제되거나 주변화된 목소리를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수많은 우연들이 겹쳐서 발생하는 돌발적 상황과 우발적 관계는 배삼식 문학이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시적 지시문과 감동적인 대사
실험적인 플롯과 달리 그것을 채우고 있는 대사들은 지극히 감동적이고 현실적이며 지시문들은 다분히 시적이다. 이는 연극으로 완성되는 희곡이 책으로 재탄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3월의 눈」과 「먼 데서 오는 여자」는 각각 노부부와 중년의 부부가 주고받는 대사만으로 이루어졌는데, 인물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각이 리얼하게 재현된 대사가 한 시의 지루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강원도 정선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하얀 앵두」에서는 활자로 표현된 강원도 사투리를 볼 수 있어 색다른 재미를 준다. 완벽에 가까운 묘사에 읽기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배삼식 희곡집』은 연극, 혹은 희곡을 낯설어하는 독자들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이다. 드라마를 즐겨본 적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특정 연령대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어 서로 다른 세대와의 거리감을 좁혀 주기도 한다. 연극을 통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 인간의 시선으로 연극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배삼식 희곡집』은, 무엇보다 인간을 좀 더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을 선사한다.
■ 줄거리 소개
3월의 눈
재개발 열풍에 곧 사라질 한옥을 배경으로, 삶의 터전이 없어지는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소일하는 노부부의 일상을 통해 죽음과 상실의 체험을 표현한다. 연극계 ‘3월의 전설’로 불리며 매년 전회, 전석 매진되는 공연으로도 유명하다. 2011년 국립극단 초연.
거트루드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거트루드’를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다. 원작과 달리 독배를 거부함으로써 오랜 위선과 통념의 벽을 깨고자 하는 새로운 거트루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폭력적인 모습을 우화적으로 들여다본다. 2008년 극단 코끼리 만보 초연.
먼 데서 오는 여자
2.18 대구 지하철 참사 때 딸을 잃은 후, 참척의 슬픔을 잊기 위해 망각으로 도피한 여자와 그런 아내 곁을 묵묵히 지키는 남편의 이야기. 기억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사회적 참사를 쉽게 망각하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재현한다. 2014년 초연.
벌
사라졌던 벌 떼들이 말기 암환자 온가희의 몸에 내려앉는다. 죽어 가는 그녀의 몸에서 힘을 얻고 혼인비행해 생명을 얻은 여왕벌은 벌 떼를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하나의 종(種)이 우리 곁을 떠나는 현실이 인간과 별개가 아닌 연결된 것임을 보여 주는 작품. 2011년 국립극단 초연.
벽 속의 요정
스페인 내전 당시 30년 동안 벽 속에 몸을 숨기고 산 남자의 실화를 토대로 한 호쿠다 요시유키 원작을 우리 상황에 맞게 각색한 작품. 1950년대 말, 벽 속에 요정이 있다고 믿게 된 소녀가 요정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아버지와 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대화가 인상적인 작품. 1인 32역의 모노드라마. 2005년 극단 미추 초연.
열하일기 만보
정체불명의 짐승 ‘연암’의 등장으로 오랜 세월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온 어느 마을에 일대 혼란과 변화가 일어난다. 익숙한 것에 안주하려는 욕망과 기이한 것에 끌리는 본능이 혼종되는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 국내 최대 연극상인 동아연극상을 비롯해 대산문학상, 김상열연극상까지 3관왕을 기록한 작품으로 2007년 국립극단 초연.
최승희
한국 무용의 신화 최승희의 삶을 표현한 작품. 남편인 동시에 기획자로서 최승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안막과의 만남과 몰락, 딸과의 갈등 등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예술가 최승희의 모습을 그렸다. 2003년 극단 미추 초연.
하얀 앵두
강원 영월의 한 전원주택 정원을 배경으로 사라지는 모든 존재가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있음을 보여 주는 작품. 지질학, 고생물학, 원예학의 언어가 영원한 시간과 대비되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한다. 육체의 소멸에는 저항할 수 없지만 기억의 소멸만은 막아 보려는 인간 군상에 대한 애틋한 시선이 담긴 작품. 2009년 두산아트센터 초연.
■본문 발췌
언젠가 내가 반공 포스터를 그려서 상을 탄 적이 있었습니다. 머리에 뿔이 나고 얼굴이 빨간 도깨비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그림이었죠. 내가 우쭐해 있는데, 어느 아이가 내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러는 거예요.
-이게 니네 아빠야. 니네 아빠는 빨갱이잖아.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림과 상장을 북북 찢어 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참았던 울음이 터졌습니다. 물론 아빠한테 죄가 없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야속할 때가 있었습니다.
-죄도 없는데 왜 그러구 있어야 돼? 나오면 안 돼? 사람들도 스테카치를 보면 빨갱이가 아니란 걸 알 거야. (사이) 스테카치? 스테카치? 가 버린 거야? 스테카치!
스테카치는 한참 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구나, 얘야.
스테카치는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야, 스테카치.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가지 마……. 울지 마…….
나는 스테카치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어라도 해 주고 싶었지요. 스테카치한테 무얼 제일 갖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스테카치는 잠시 생각하더니 햇빛이라고 말했습니다.
-햇빛? 하지만 햇빛은 가져다줄 수가 없잖아. 손에 잡을 수가 없으니까.
-왜 잡을 수가 없어? 나뭇잎이나 꽃잎을 만지면 그 위에 고인 햇빛을 느낄 수가 있지.
그 뒤로 한 동안, 나는 스테카치에게 줄 햇빛을 따러 다녔습니다. 하루 중 햇빛이 가장 좋을 시간에, 가장 햇빛이 잘 물든 나뭇잎과 꽃잎들을 따다가 스테카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는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초봄의 연둣빛 새순과 분홍빛 꽃잎들, 여름의 짙푸른 잎사귀들과 가을이면 울긋불긋하게 물든 단풍잎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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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유를 얻을 뒤 조금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베 짜는 소리가 뚝 끊긴다.)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계속해서 베를 짜셨지요. 임종을 맞이하셨을 때, 어머니는 부랴부랴 교회 목사님을 모셔 왔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세례라도 받게 하시려구요. 하지만 아버진 종교를 믿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그렇게 고집을 피우실 줄은 몰랐죠.
-형제님, 하나님을 받아들이세요. 하나님을 믿으시죠?
-나는 인간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뿐입니다. 인간의 사랑에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거예요.
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엄마하고 목사님이 모슨 말을 해도 묵묵부답이신 거예요.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엄마는 울면서 아버지한테 따지셨죠.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마지막까지 꼬였어. 배배 꼬였어.
-나는 하느님한테 용서를 구하지 않아. 사람들……. 당신한테 용서를 구할 뿐이지…… 용서해 줘…….
그리고 아버지는 당신 방 한 켠에 놓여 있던 상자를 가져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오래전 내가 따다 드린 나뭇잎과 꽃잎들이, 내가 따다 드렸던 햇빛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상자를 어루만지며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무덤 속도 환할 게야.
-「벽 속의 요정」에서
저한테는 무거운 것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잊힐 수 있다는 것이, 차라리 위안이 되네요. (사이) 하지만 이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그 사람이…… 전동차에 불 질렀던 그 사람…… 그 사람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사이) 이런 부탁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드렸던 말씀은 부디 다 잊으시고요, 여기 단풍나무 그늘도 좋고, 벤치도 있고, 잔디밭이 좋잖아요. 어디 가면 무덤 자리 아닌 데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찝찝해하지 마시구요, 다 잊으시구요, 가끔 이렇게 여기 놀러 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먼 데서 오는 여자」에서
그래도 이 집이 나보단 낫군. 흩어질 땐 흩어지더라두, 뭐가 되든 된다네……. 책상두 되고, 밥상두 되고……. 허허……. 섭섭할 것두 없구, 억울헐 것도 없어……. 빈손으로 혼자 내려와서 자네두 만나구, 손주, 증손주까지 보았으니, 이만하면 괜찮지. 괜찮구 말구……. 이젠 집을 비워 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그러니, 자네두 이젠 다 비우고 가게. 여기 있지 말구. 여긴 이제 아무것두 없어, 아무것두…….
-「3월의 눈」에서
■작가의 말
‘드라마’와는 달리 ‘극(劇)’이라는 글자는 제가 생각하고 있던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을 함축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호랑이와 돼지와 칼. 칼은 곧 칼을 든 인간이겠지요. 이 세 존재가 어딘가에서 만나 마주서서 서로를 노려봅니다. 이 만남은 아슬아슬하고 버겁습니다. 언제든지 흩어져 버릴 수 있는 만남, 마주침입니다. 이 상태는 필연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시적이며 순간적, 상대적인 것입니다. ‘극’이라는 글자는 이렇게 우연한 마주침의 순간을 포착합니다. 이 순간에 각각의 존재는 자신들의 온 존재를 다해 ‘갈등’하며 서로를 드러냅니다. 저는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처음에 말씀드렸듯 본디 ‘극(劇)’은 우리 삶에 있어 가능한 한 회피해야 할 부정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조화롭고 원만한 어떤 상태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삶과 세계의 어떤 국면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시험대’.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저는 ‘드라마’를 싫어하면서 ‘드라마’를 쓰고 있습니다.
3월의 눈
거트루드
먼 데서 오는 여자
벌
벽 속의 요정
열하일기 만보
최승희
하얀 앵두
강연록_배삼식
다성적(多聲的) 세계로서의 희곡
독자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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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친 문장
스테카치는 울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