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행동하는 양심’ 귄터 그라스가 독일 문단의 금기를 깨고 밝히는 1945년 피란선 침몰 사건
게걸음으로
원제 Im Krebsgang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5년 5월 8일 | ISBN 978-89-374-6334-1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300쪽 | 가격 12,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334 | 분야 세계문학전집 334
수상/추천: 노벨문학상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행동하는 양심’ 귄터 그라스가
독일 문단의 금기를 깨고 밝히는 1945년 피란선 침몰 사건
독일 문단에서 금기시되었던 피란선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을 다루어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던 문제작, 『게걸음으로』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출간된다. 1945년 1월, 독일 피란민 9000여 명을 태우고 항해 중이던 구스틀로프호는 러시아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세 발을 맞고 침몰한다. 선장 넷을 비롯해 1000명 남짓만이 살아남은 이 사고의 희생자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었다.
독일 문단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는 귄터 그라스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양한 서술 방식으로 다루어 온 작가다. ‘구스틀로프 호의 침몰’은 신나치주의 확산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는 사건이었다. 귄터 그라스는 정치적 함의나 해석에서 살짝 비켜서서 ‘게걸음’과 같은 방식으로, 옆으로 걸으면서 느릿느릿하게, 머뭇거리는 듯하지만 이 사건의 모든 면을 살펴보며 나아간다. 이념과 수치(數値) 속에 감춰진 죽음의 표정들, 단 한 측면만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는 역사 왜곡 위험 등에 대해 경고하면서, 역사의 거시적 차원과 그 알맹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그것이야말로 ‘게걸음’의 의미이며 우리가 ‘게걸음으로’ 지난날과 오늘날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 독일 사회의 침묵 속에 잊혔던 참사, 구스틀로프호 피란선 침몰 사건
“각자 알아서 자신을 구하라.”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1월 발트해, 독일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피란민 및 병사 9000여 명을 태우고 어뢰정 뢰베호 단 한 척의 보호만 받으며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러시아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세 발을 맞고 침몰한다. 아비규환 속에 ‘여자와 아이 먼저’라는 암묵적 규칙은 무너지고 각자의 생존만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선장 넷을 비롯해 1000명 남짓만이 살아남은 이 사고의 희생자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었다. 역사상 최악의 해상 사고지만, 이 비극적 참상의 전모는 거의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무덤 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독일 민족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
“독일 민족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라는 히틀러의 교시에 따라 구스틀로프호는 ‘계급 없는’ ‘저렴하지만 행복한’ 여행을 위해 설계되었다. 스위스에서 한 유대인 청년에게 암살된 나치 간부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에서 배 이름을 따오고 거대한 명명식도 열었다. 신분과 상관없이 모두 동일한 객실에서 잠을 자고,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 우선으로 운항된 이 배는 그야말로 “꿈의 배”였으며 나치 시대 대(大)독일제국이라는 야망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 선박은 전쟁과 더불어 병원선으로, 병영용 폐함으로, 마지막으로 독일 패전 선언 직전에는 피란민 수송선으로 탈바꿈했다.
“그 배의 침몰은 총체적인 몰락의 징조이기도 했다.”
고텐항은 배를 타기 위해 몰려든 피란민으로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1월21일 소련군의 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치는 바다를 통한 사상 최대의 철수 작전인 한니발 작전을 개시했다. 군수물자와 교육 중인 사관생도, 그리고 피란민을 안전한 곳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구스틀로프호도 수송에 참가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사관생도와 함께 여성과 아이 들을 우선적으로 태웠다. 당시 승선자 명단을 작성한 하인츠 쇤의 증언에 따르면 7956명을 기록하고 나서는 장부가 바닥났고, 그 후 기록 없이 태운 사람도 2000명 이상이나 됐다고 한다. 1월 30일 정오 피란민을 가득 태운 구스틀로프호는 어뢰정 뢰베호의 보호를 받으며 출항했다. 그리고 소련 잠수함 S13호는 이미 두세 시간에 걸친 공격 준비 끝에 공격 목표인 구스틀로프호를 향해 어뢰 세 발을 발사한 것이다.
1945년 1월 30일, 즉 순교자가 태어난 지 정확하게 오십 년이 되는 날에,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그날은 히틀러가 대권을 장악한 지 십이 년째 되는 날로, 그 배의 침몰은 총체적인 몰락의 징조이기도 했다. -작품 속에서
■ 독일의 침묵, 그리고 귄터 그라스의 선택, ‘게걸음’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구스틀로프호의 침몰은 비극적인 사건이 분명하다. 하지만 독일은 이 사건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해 왔다. 독일은 다름 아니라 전쟁의 가해자, 구스틀로프호보다 훨씬 많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생명을 앗아간 전범(戰犯)이었으며 이 사건 또한, 반인류적 범죄를 저지른 국가로서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귄터 그라스 또한 항상 그러한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어 온 작가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독일인이자 작가 그라스의 윤리 의식이었다.
지난 역사,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와 관계되는 역사는 꽉 막힌 변소와도 같다. 우리는 씻고 또 씻지만, 똥은 점점 더 높이 차오른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태만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역사 인식 없이 이러한 사건들을 바라볼 때, 혹은 뚜렷한 정치적, 이념적 목적을 가지고 이러한 사건들을 언급할 때, 우리는 객관성을 잃거나 사건 속에 숨은 진실을 놓치기도 한다.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민간인들의 죽음, 여성과 아이 들의 희생 등 그 엄청난 수치(數値)를 내세워, 이 사건은 독일 사회 내에서 신나치주의를 확산시키고 정치적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었다. 귄터 그라스가 이 작품을 쓸 무렵 유럽 일각에서는 “역사에 대한 때 이른 망각과 더불어” 스킨헤드족, 혹은 네오나치즘이 꾸준히 준동하고 있었다. “평생을 바쳐 독일 시민 사회의 정신적 위기 상황을 진단해 온 작가” 귄터 그라스는, 그러한 흐름이 독일의 우경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우려했다. 죽음은 “단순히 자료로만 활용”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 이용될 바에 제대로 알고 역사의 한 장에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라스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게걸음으로』를 쓸 결심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죄가 너무도 크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참회를 고백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한 문제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처럼 많은 고통에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되며, 또한 그 기피 주제를 우파 인사들에게 내맡겨서도 안 된다. 이러한 태만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 속에서
“게걸음으로”
이 작품에서 귄터 그라스는 ‘그 노인’, ‘고용주’, ‘그’ 등으로 지칭되며 ‘나’라는 화자에게 구스틀로프호 침몰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요구한다. ‘나’의 어머니는 만삭인 채 구스틀로프호에 승선했다가 간신히 구조된다. 그리고 참사를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바라보며 ‘나’를 낳는다.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지만 한 걸음 떨어져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려는 인물이다. 또한 ‘나’의 아들 ‘콘라트’는 전후 세대를 대변한다. 할머니의 영향으로 구스틀로프호 사건에 집착하고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자극적인 사진과 수치(數値)를 통해 주변을 선동하는 콘라트는 독일 네오나치즘의 한 면을 보여 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라스는 중립적인 인물 ‘나’, 그리고 ‘나’와 ‘콘라트’의 대립을 통해 사건의 정치적 함의나 해석에서 비켜서서, 사건 자체만을 바라보고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라스는 이 작품 속에서 꾸준히 ‘게걸음으로’ 나아간다. “우왕좌왕 옆으로 걸으면서 느릿느릿하게, 머뭇거리는 듯하지만 모든 측면을 살펴보고 결과적으로는 신속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그라스의 ‘게걸음’이다. 수치 속에 감춰진 죽음의 표정들, 단 한 측면만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는 역사 왜곡 위험 등에 대해 경고하면서, 역사의 거시적 차원과 그 알맹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그것이야말로 ‘게걸음’의 의미이며 우리가 ‘게걸음으로’ 지난날과 오늘날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과거는 속죄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과거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한 정신적 노력을 다함을 뜻한다. -귄터 그라스, 작품 해설에서
■ 거장 귄터 그라스를 기리며
“우리 삶에 거대하고 결정적인 힘을 행사하는 정치에 대해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문학은 변화를 가져올 힘이 있다.”
2002년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뤼베크의 구시가지 중심부에 자리 잡은 부덴브로크하우스에서 귄터 그라스의 주재 아래 『게걸음으로』 번역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의 장희창 교수를 비롯하여 세계 20여개 국 번역자들이 참석하였으며 귄터 그라스와 슈타이들 출판사 편집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미나에 필요한 준비 작업은 이미 치밀하게 진행되어 있었다. 외국인에게 낯설 것이 분명한 용어는 미리 정리해 해설을 붙여 놓았고,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자료도 상당 분량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세미나 시작 전날에는 번역자들을 태워 슈베린 시로 데려가서 작품 무대가 되었던 장소들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세미나는 귄터 그라스가 직접 번역자들에게 ‘한 단락 한 단락’ 짚어 가며 의문이 없는지 묻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세미나가 끝난 후 그라스는 뤼베크 콜로세움 극장에서 청중 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게걸음으로』를 낭독했다. 그때의 감동을 장희창 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때로는 목청을 돋우고 때로는 그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듯이 손으로 허공을 갈랐으며, 배가 침몰하는 장면을 읽는 동안에는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직접 보고 있기라도 하듯, 마치 독일 사회가 침몰하고 있기라도 하듯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텍스트를 온몸으로 전달했다. 낭송을 마친 그라스는 청중들이 기립 박수를 그치지 않자, 그만하라는 몸짓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는 그만한 박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지 않으냐는 듯이 머리와 상체를 연방 흔들어 대며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청중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참으로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이었다. -장희창, 작품 해설에서
“우리 삶에 거대하고 결정적인 힘을 행사하는 정치에 대해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문학은 변화를 가져올 힘이 있다.”라고 말하며 항상 양심에 따라 말하고 쓰고 행동했던 한 시대의 거인, “우리 시대의 비판적인 휴머니즘과 실천적 글쓰기를 대표하는 특출한 지성”(《르 몽드》)이자 “분노의 바위와 같은 작가”(《스웨덴 한림원》) 귄터 그라스. 그의 뒤를 이어 전후 시대를 걸어가는 우리, “젊은 세대에겐 귄터 그라스의 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는 현실 이상의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뉴욕 타임스》)
■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
▷ 귄터 그라스는 독일 피란민 참사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국가적 금기를 깼다. —BBC
▷ 독일 좌파의 양심 그라스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희생되었던 독일인의 고통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가디언》
▷ 금기시된 역사를 빛나면서도 감동적으로 서술한, 위대할 정도로 정교하게 구성된 작품. —《슈피겔》
▷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라스의 작품 중 가장 슬픈, 그러나 최고의 작품이다.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
게걸음으로
작품 해설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