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에릭 홉스봄 자서전
원제 INTERESTING TIMES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7년 1월 5일
ISBN: 89-374-2568-4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45x216 · 692쪽
가격: 25,000원
분야 논픽션
이 시대 대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들려주는“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20세기” 『미완의 시대』는 세계적인 석학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이다. 홉스봄은 19세기를 다룬 3부작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베스트셀러 역사학자다. 『미완의 시대』에서는 자신이 직접 온몸으로 체험한 “가장 별스러운 시대” 혹은 “흥미로운 20세기”에 대하여 자서전이라는 형태를 빌려 기존의 저서에서 꺼내지 못한 생각과 특별한 경험들을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미완의 시대』 역시 균형 있게 시대의 흐름을 잡아내는 역사가 홉스봄의 감각이 돋보이는 저서로서 20세기를 논하고 있는 『극단의 시대』의 이면사라고도 할 수 있다.
머리말: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
1. 프롤로그 2. 빈과 유대인 소년 3. 힘들었던 시절 4. 베를린: 바이마르의 종식 5. 베를린: 갈색과 빨간색 6. 섬나라에서 7. 케임브리지 8. 반파시즘과 반전 투쟁 9. 공산주의자가 되다 10. 전쟁 11. 냉전 12. 스탈린과 그후 13. 40대에 맞는 전환기 14. 웨일스의 크니흐트 기슭 15. 1960년대 16. 정치 관람자 17. 역사가들 속에서 18. 지구촌에서 19. 마르세예즈 20. 프랑코에서 베를루스코니까지 21. 제3세계 22. 루스벨트에서 부시까지 23.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20세기는 흡스봄의 한 세기였다
★ 왕따 유대인 + 별종 학자 & 코스모폴리탄 히스토리언 『미완의 시대』는 20세기를 이해하는 데 구십 평생을 바쳐온 홉스봄의 특별한 기록이다. 베를린 학창 시절에 히틀러의 태동을 지켜본 지식인이요 귀족 자녀들이 우글거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일한 촌놈이었던 홉스봄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 확산 반대 시위를 벌였고,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고, 부다페스트에서 소련의 스파이와 크리스마스 저녁을 함께 보냈고, 런던에서는 가짜 이름으로 재즈 비평가 노릇을 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영국 국적을 가진 코스모폴리탄이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잉글랜드인이요 영국에서는 유럽 이민자요, 어디에서나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게다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지만 그의 저서는 소련에서 판금되었고 유럽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홉스봄은 “개인으로서는 이것 때문에 살아가기가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23장 「에필로그」) 라고 고백한다. “홉스봄 자신을 향한 솔직한 질문들을 담은 독특한 정치 비망록”―《가디언》 ★ 우리 시대 대표 역사학자가 들려주는 가장 흥미로운 20세기 이 책은 모두 스물세 장이다. 프롤로그에서 16장까지는 홉스봄 개인사가 정치와 맞물려 전개되고, 17장과 18장에서는 역사가로서의 홉스봄을 만날 수 있다. 19장부터 22장까지는 홉스봄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나라와 도시들 이야기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스페인, 이탈리아, 쿠바 등 여러 나라의 정치와 문화 얘기를 들려주는데, 특히 프랑스에 대한 홉스봄의 애착은 남다르다. 사춘기 시절 루브르에서 마네의 「올랭피아」의 대담한 시선에 압도당하여 옴짝달싹 못하던 기억부터 시작하여 1936년 프랑스 역사상 최초 사회주의 정권이었던 인민전선의 총선 승리가 불러온 거리의 환희, 브로델과 아날학파 역사가들에 대한 추억, 그리고 결론은 “이재에 밝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언어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교양 있는 볼테르의 언어가 패배한 데서 프랑스인이 느끼는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나는 공감한다.”라는 안타까운 결론으로 맺는다. “역사가들의 삶은 대체로 지루하지만 홉스봄은 완벽한 예외다.”―닐 퍼거슨(『제국』의 저자) ★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시대 or 미완의 시대 이 책의 원제는 “Interesting Times”다. 이것의 기원은 중국인데 실은 저주의 뜻이 담긴 문장에서 비롯된 아이러니컬한 표현으로, 영어책 제목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한국말로는 그 뉘앙스를 충분히 전달하기가 힘들다. 양차 세계대전과 물질만능주의는 20세기를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시대”로 만들었고, 홉스봄은 자신이 몸담고 살아온 이 시대를 그저 호기심과 흥미의 대상으로 관찰만 한 것이 아니라 더 좋게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실천의 대상으로 여기고 현실 속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외쳤다. “홉스봄에게 역사와 시대는 인간이 참여하여 만들어 나가야 할 미완의 것이었다.”(「옮긴이의 말」) 『미완의 시대』에서는 이런 홉스봄의 열망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저자는 「에필로그」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 재즈와 정치… 개인의 경험을 통해 그려낸 아주 특별한 20세기 재즈에 심취했던 홉스봄은 《뉴 스테이츠먼》에서 가짜 이름으로 재즈 비평가 노릇을 했고, 마할리아 잭슨이나 베니 굿먼과의 만남을 잊을 수 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나는 교수로 살아오면서 20세기 말의 양대 문화 중심 도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거기서 가르쳤다는 행운을 누렸다. 런던에서는 대영박물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연구실이 있었고, 뉴욕에서는 맨해튼에서 제일가는 재즈 클럽 브래들리스가 있는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살았다.” 재즈에 대한 홉스봄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6장 「섬나라에서」) 하지만 당시 재즈는 미국을 아는 통로였고, 당연히 인권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미국에서 민권 운동이 격화되고 유색인이 영국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면서 인종주의는 좌파 진영에서 시급한 대책을 요구하는 화두로 떠올랐다. 1958년 이른바 노팅힐 인종 폭동이 벌어지고 나서 나는 영국에서 벌어진 초창기 반인종주의 운동의 하나인 ‘인종 화합을 위한 스타 운동’에 재즈를 통해 관여했다.”(13장 「40대에 맞는 전환기」) 지금도 홉스봄은 웨일스에 별장을 두고 헤이온와이의 문학 축제와 브리콘 재즈 페스티벌 사이에서 문화 인텔리겐차 노릇을 톡톡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 베를린에서 히틀러의 부상을 지켜본 유대인, 공산주의자가 되다 홉스봄은 1936년 케임브리지 시절 공산당에 가입하여 1991년 해체되기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던 “후회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 베를린의 평범한 학생이었던 홉스봄은 자신이 역사의 전환기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치 바깥에 있기란 불가능했다.” 몇 달간의 이 베를린 생활 때문에 홉스봄은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독일에서 홉스봄과 같은 청년에게 좌파 말고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는 이미 실패했고, 홉스봄 자신도 만약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분위기상 자신도 나치 민족주의자가 되었을 거라고 회상한다. 그때는 누구나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은 5000만 명의 희생을 초래했지만, 그것은 히틀러를 물리치는 대가였다. 소련 공산 정권의 학살을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에도 새로운 시대의 탄생은 늘 희생을 동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수백만의 생명이 희생된다 해도 마르크스 유토피아는 그만 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그 믿음이야말로 바로 히틀러에 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홉스봄은 자신이 공산주의에 빨려든 이유를 이렇게 나열한다.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집단 황홀경”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완벽하고 총체적인 지적 체계가 주는 미학적 매력, 새로운 예루살렘을 염원하던 시인 블레이크와 비슷한 약간의 소망, 속물근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지적 혐오감이다.(5장 「베를린:갈색과 빨간색」) 특히 집단 황홀경은 종교적인 경험 이상이라고 소개한다. 프랑스 좌파의 거국적 시위였던 1936년 레퓌블리크 광장 동쪽에서 벌어진 바스티유 함락 기념일의 기억을 홉스봄은 이렇게 기록한다. “몸을 파는 거리의 여자들까지도 몰려나와서 누구보다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몸에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보기 드문 경험을 그날 했다. 나는 그저 느끼고 겪었다. 그날 밤 우리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파리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한바탕 잔치가 끝나고 나서 나는 길모퉁이에서마다 벌어지던 춤판에 끼어들어서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면서 마치 구름 위에 두둥실 뜬 것처럼 파리 시내를 느릿느릿 걸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먼동이 트고 있었다.”(19장 「마르세예즈」) ★ 20세기 대표 역사학자의 현실 비판 홉스봄이 요즘은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현 노동당 정부가 너무 시장 논리 일변도로 기운다고 비판하지만, 실은 블레어가 정권 창출보다는 당내 기득권에 집착하는 강경 좌파 세력을 누르고 노동당 당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홉스봄의 도움이 컸다. 홉스봄은 1960-1970년대에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무조건 파업을 주도한 강경 좌파의 노선이 지속되는 한 영국 노동 운동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지적하면서 집권 노동당 정부가 단순히 불만족스러운 차원을 넘어서서 마치 보수당보다도 더 나쁘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대는 비타협적 노조 지도부를 비판했다. 홉스봄의 우려는 현실화되어 그 뒤 노동당은 18년 동안 보수당에 정권을 내준다. 산업 노동자가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을 무시하고 “겁쟁이는 물러서고 배신자는 비웃어라, 우리는 남아서 붉은 깃발을 휘날릴 테니.” 식의 막무가내 노선에 누구보다도 왼쪽에 서 있었던 원로 공산주의자가 일침을 가하자 노동당 강경파는 타격을 받았고 토니 블레어를 중심으로 한 노동당 내 개혁 소장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마침내 당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홉스봄의 입장 또한 남다르다. 그는 호전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작은 땅덩어리 안에 모여 살기보다는 흩어져 사는 것이 오히려 인류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선택받았거나 특별한 민족이라는 주장이 조금이라도 정당하다면 그것은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에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그 부족이 모여 살았던 게토나 집단 거주 구역 안에서 이루어진 업적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이 게토를 떠나도록 허락받았거나 스스로 떠나는 쪽을 선택한 이후로 주로 두 세기 동안 드넓은 세계에서 그들이 인류를 위해 이룩한 괄목할 만한 업적 덕분이라고 생각한다.”(2장 「빈과 유대인 소년」) 홉스봄의 자서전은 의미심장하게도 2001년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시점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의심 많은 역사가”가 필요할 때라고 결론 맺는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노쇠하고 회의적인 역사가의 눈에도 그것은 대량 학살, 훌륭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기술,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하는 현실 속에서 신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온 세계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선언 등 20세기의 가장 고약한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삼류문사들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불행하게도 잘도 찾아서 내뱉으면서 서양 세계는 언론을 타는 사람들의 게거품에 휩쓸렸다.”(「에필로그」) ★ 정치적 우파 독자도 신중히 읽어야 할 몇 안 되는 좌파 역사가 ―스튜어트 홀(오픈 대학교 사회학) 홉스봄에게 역사란 세계를 변화시키는 메커니즘을 발견하는 것이다. 홉스봄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를 해석하는 도구였지만, 홉스봄이 공산당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홉스봄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해인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폴란드계 영국인 유대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적국의 국민으로 만난 부모님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어느 쪽 나라에서도 살지 못하고 중립국인 스위스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홉스봄은 빈과 베를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공황 통에 고아가 되어 친척 집에 얹혀살다가 열세 살에 혼자 영국으로 건너간다. “지지리도 안 풀리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어릴 적부터 똘똘했던 홉스봄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킹스칼리지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신입생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세간의 이목을 받던 홉스봄이 선택한 것은 역사학이었고 페이비어니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공산당원”이었기에 모교의 강단에 서지 못하고 1947년 런더 대학교 버베크칼리지 사회경제사 교수를 거쳐, 1982년 이후로는 스탠퍼드, MIT, 코넬, 그리고 뉴스쿨 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경제학자 로버트 하일브로이너는 홉스봄을 두고 “역사에 대해 이토록 명쾌한 설명으로 미래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자도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홉스봄 자신은 “전문가들이 득세하는 세계에서 주류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고,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에 능한 코스모폴리탄이었으며, 못 배운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학문적 관심을 쏟아 부었던 지식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런 홉스봄에게 《르 몽드》는 “페르낭 브로델에 버금가는 깊이를 보이는 석학”이라고 격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