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같이 맑고 아련한 시정
김성옥의 새 시집은 삶에 대해, 사랑에 관해 느끼고 깨우쳐가는 사랑의 시, 존재론의 시를 담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의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금결처럼 일렁인다.-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김성옥의 세 번째 시집 『사람의 가을』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김성옥은 198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그리움’을 주제로 서정시의 전통적인 기법에 충실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빛 한줄기의 강』과 『그리움의 가속도』에서 보여준 김성옥의 시적 응집력은 이번 새 시집 『사람의 가을』에서 점증된다.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그리움 김성옥은 전작에서 ‘허위와 무의미, 음모와 공포로 가득 찬 세상에서 벗어나는 힘’을 그리움이라고 규정해 왔다. 이 ‘그리움’은 어떤 정해진 대상이나 지향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김성옥의 ‘그리움’은 확정되지 않는 그 무엇을 향한 주체의 내적, 외적 힘과 의지, 움직임을 가리킨다. 즉 시적 대상을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둠으로써 물질화된 대상, 고정된 시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를 시인 자신은 ‘흔들림의 미학’이라 보며 주요한 시적 태도로 채택한다. 김성옥의 시는 연모(戀慕)나 상사(相思)의 감정에서 현실의 무의미함을 떨치려는 의지로도, 때로는 볼품없고 비루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으로도 자유롭게 변용한다. 사랑은 언제나 / 흔들림으로 시작된다. // … // 어찌 흔들림 없이 / 어지러운 지상에 / 사랑을 세울 것인가 // 몇 차례의 흔들림으로 / 우리의 삶도 깊어가고 / 흔들림으로 하여 / 우리의 사랑도 / 비로소 사랑이 된다. -「흔들림의 미학」에서 비움과 버림의 방법론 이번 시집 『사람의 가을』에서는 이러한 주제의식과 시적 태도에다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는 점이 의의라 할 것이다. 시인은 비움과 버림의 원리를 비로소 이 시집에서 채택한다. 시인에게 삶이란 존재의 온전한 의미에 닿는 여정이며 그것에 필요한 힘은 오직 자신을 가볍게 만듦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술잔을 비우듯이 / 노래도 비워내면 / 세상이 가벼워진다. ―「노래하는 남자2」에서 공허한 초월론을 넘는 진실 초월의 미학과 구도자의 포즈는 ‘구원의 방식’으로서 문학이 지녀왔던 오래된 주제이다. 특히 최근에는 상업적인 코드로까지 사용되어 유행하고 있다. 그것을 좇아 산다면 현실의 삶이 불가능할, 이러한 비움과 버림의 교리가 유행하다시피 하는 이유는 그것을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가두고, 그것을 통해 자기만족에 도달하면서 동시에 역으로 반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초월론의 함정을 넘어 진실하면서도 새로운 문학적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사람의 가을』의 미덕이다. 예전에는 / 너에게로 가는 길이 / 급하고 어지러웠으나 / 이제 나는 / 더디게 갈 수 있고 / 또한 편하게 갈 수 있다. // … // 비워서 가볍게 / 너에게로 간다. ―「사람의 가을」에서 만남과 부대낌의 시학 김성옥의 버림이 공허하지 않은 이유는 어떤 대상을 향한 시선, 그것과의 교섭 속에서 버림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 침묵하는 것, 흔들리는 것에서 시인은 이러한 버림과 비움의 공력을 읽는다. 풀, 바람, 새, 길과 같은 존재들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기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만약 그것들이 인간처럼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려 한다면 자신에게도, 자연 세계에도 끔찍할 뿐인 재해가 벌어질 뿐이다. 김성옥은 여기서 존재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대안적인 삶의 형태를 읽어낸다. 사랑도 지혜로워야 한다면 / 제주도 돌담이 / 천 년을 지켜온 사랑법을 / 배워야 하겠네. // … // 떠나는 바람을 가로막지 않고 / 돌 틈으로 넌지시 / 보내는 것이라 하네 ―「사랑법」에서 연애시에 담긴 구도의 서 『사람의 가을』의 가장 큰 특징은 일견 종교적으로 읽힐 수 있는 주제를 연애시의 형식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끊임없이 버림받으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연모의 발화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속세의 사랑이 환희와 슬픔을 반복하듯이 구도자의 길 또한 정진과 절망 사에서 동요한다는 전언은 비움과 버림이라는 종교적 주제를 관념적인 차원에서 끌어내어 삶의 지평에 놓는다. 우리에게 ‘버림’이 어려운 이유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의 욕망과 묶여 있기 때문이다. 탈욕(脫慾)의 지난한 과정은 이 불안을 떨치는 것이며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대가 울고 있다. / 나의 몸으로 // 벗겨지지 않는 갑옷 같은 운명으로 // 그대는 / 나를 운다. ―「음(音)」전문 그리움마저 버리는 그리움 『사람의 가을』에 이르기까지 김성옥이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것은 그리움의 대상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대상, 오직 자신의 내면적인 삶 속에서 순간순간 발견할 수 있는 그리움의 궁극은 이 시집의 후반부로 가면서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빈 껍질로 남아 / 저무는 해를 바라봅니다. / 한번도 만나지 못한 그대를 / 만나지 못한 채로 / 그대를 진정으로 사모한 일만이 / 더욱 사무칠 뿐입니다. ―「친견」에서 물이 자라는 것을 보았는가 / 흐르면서 자라는. // 흘려버려서 / 결코 넘치지 않는. // 내 사랑도 / 버려서 넘치지 않고 ―「황홀한 버림」전문 김성옥의 그리움은 끝내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했던 나를 버리고, 사랑의 시간마저 사라질 때, 스스로 무의 존재로 변화할 때 결실을 맺는다. 진정한 만남은 결국 텅 빈 곳을 향해 스스로를 비워가는 것, 내 자신과 내가 가닿고 싶은 대상의 경계마저 무화되는 ‘일체의 없음’에서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저자 김성옥
부산에서 태어나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9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빛 한줄기의 강』, 『그리움의 가속도』가 있고 현재 서림화랑의 대표이다.
自序
사람의 가을아우라지 강은 두 갈래로 흐른다콩나물은 서서 키가 큰다백비흔들림의 美學나의 그림풀삼각형의 비애새는 숲을 바꿀 수 있다완전한 어둠귀향차를 마시며절망의 노래 1절망의 노래 2상처는 밥이다비상구로 가는 길하느님의 통금사랑이 길을 잃은 적은 없다사랑가을얼룩마지막 더위흔적으로남대문 새벽 시장황진이바람같이바다일기길가을 노래막차전주(全州)에게백 평의 꽃밭채플린을 위하여사랑법행복한 이별음(音)터초대이별분수추억그대 집 앞에서그대에게 가는 길 1그대에게 가는 길 2뗏목몸친견(親見)황홀한 버림무너지는 남자위기의 남자뛰어가는 남자그 남자, 마술사착한 남자교향의 남자유리로 된 남자노래하는 남자 1노래하는 남자 2남자의 지도내 안에 갇힌 남자낙법(落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