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괴테 인스티투트 인터 나치오네스와 정식 계약을 통해 출간된 민음사의 릴케 문학선. 기념비적인 한국어판 번역본을 만들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인터 나치오네스 출판사는 역자의 선정에서부터 제작 과정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보이며 선집 출간에 참여해왔다고 한다. 이 선집은 릴케의 방대한 작품 중에서 중요 작품과 문헌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선별해 번역한 것으로 본 대학 교수였던 구기성씨가 선별 작업을 담당했다. 독일어 원문을 최대한 충실히 살려내는 데 방점을 두어 가급적 직역을 선보이고 있으나 의미 전달을 위해 종종 의역을 보이기도 했다. 1966년 인젤 출판사에서 출간한 <릴케 전집>(총 4권)을 원전으로 하고 있다.<형상시집 외>는 ‘형상시집’의 강열한 이미지에서 (독일시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모더니즘 시의 본격적인 실현으로 간주되는 <신시집>의 사물시에 이르기까지 릴케의 중기 시편을 담고 있다. 이 시기의 시적 특징으로는 메타포의 상징성, 언어의 웅장함과 모호성,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비장감 등을 꼽을 수 있다.
국내에 이미 무수한 릴케 판본이 있지만 민음사의 릴케 시리즈는 독일의 괴테 인스티투트 인터 나치오네스와의 정식 계약을 통해 번역 지원을 받아 출간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인터 나치오네스는 한국에 릴케 독자가 많은 데 비해 기준이 될 만한 릴케 번역 판본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역자 선정에서부터 제작 과정까지 주의를 기울일 정도로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이번 시리즈는 삼십여 년에 걸쳐 시작 활동을 한 릴케의 방대한 작품 가운데 중요 작품과 문헌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신중하게 가려내어 묶은 선집이다. 수록된 작품은 수십 년간 릴케 연구에 몸 바친 전공자이자 독일의 본 대학 한국어과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역자(구기성)가 선정하였고 오랜 시간을 독일에서 보낸 역자의 역량에 따라 독일어 원문의 뉘앙스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초점을 잡았다. 그 밖에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릴케의 사진과 시인이 영감을 받은 사람이나 사물, 풍경이 각 권의 성격에 따라 함께 실려 있어 일반 독자가 난해한 릴케의 작품을 읽는 데에도 별 무리가 없도록 마무리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얼마나 여성적이며 아름다운 연상을 불러일으키게 해주는 이름인가! 꽃과 사랑, 고독과 죽음을 노래한 방랑의 시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릴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향한 열렬한 구애를 시로 승화시키면서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도시집』 전편에 걸쳐 절절히 흐르는 사랑의 송가이다.
내 눈빛을 끄세요.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발 없이도 당신에게 갈 수 있습니다.입 없이도 당신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내 팔을 꺾으세요, 그럼 손으로 잡듯내 심장으로 당신을 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으세요. 그럼 내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당신이 내 뇌에 불을 지르면,당신을 내 피에 실어 나를 것입니다. -『기도시집』 제2부 <순례의 서> 중에서
릴케가 평생을 바쳐 사모한 여인이 유부녀였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라는 사실은 시인이 죽은 후에야 밝혀졌다.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사랑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무덤까지 끌고 갈 수밖에 없었던 시인은 자신의 숙명을 시로 완성시켰다. 또한 『기도시집』에는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 여행과 톨스토이와의 만남이 시인의 시적 체험으로서 용해되어 있다.
릴케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노래하기도 하며 맹인이나 걸인, 혹은 느닷없이 왕을 노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관심이 우선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그 암울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사랑에 미흡한 소년 같은 얼굴로 시를 읽는 사람들의 감수성을 젖게 하고 그 축축해진 틈을 비집고 그는 섬뜩하게 다가선다. 그리하여 장미꽃의 속을 보여주기도 하며 시체 공시장의 썩은 냄새를 풍기며 전달하기도 한다. 확실히 릴케의 시는 시적 대상이 갖는 특이성으로 인해 독자를 끄는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그와 같은 힘은 시적 대상을 깊이 응시하여 대상의 본질을 이끌어낸 데 있다.
오롯한 대사원의 주위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부정만 하는 사람처럼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홀연히, 그대의 미소에 의하여 사람은 한결 정답게 그대에게 끌림을 느낀다.
백 가지 입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입으로미소 짓는 천사여, 다감한 모습이여,우리의 시간들이 그대의 둥근 해시계에서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그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자오선의 천사」『신시집』부분
위의 시는 프랑스의 파리 남방 샤르트르(Chartres)에 있는 고딕 양식의 대사원 벽모퉁이에 붙어 있는 자오선의 천사상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는 백 개의 입으로 된 하나의 입으로 미소 짓는 천사와 해시계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시간을 그린 것으로, 릴케가 조각가의 관찰력으로 사물을 응시하여 그려낸 <사물시Dinggedichte>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이들 <사물시> 편에서 릴케는 개개의 현상에 대해 겸허하고도 참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는, 살아 있거나 혹은 생명이 없는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찰력을 얻게 된 데에는 로댕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릴케는 1902년 8월 <로댕 연구>를 써달라는 위촉을 받고 파리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무보수 비서로 지내다가 1906년 돌연 결별하기까지 그가 로댕에게서 배운 제작 방법은 하나의 생명이나 대상을 끈기 있게 내면적으로 응시하는 것, 무겁게 닫혀 있는 사물의 압력에 견디고 경건하게 그 내부에 들어가는 것이다.
파리 생활의 절망과 고독은 릴케에게 또 하나의 역작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무의미한 것, 타락과 암흑, 그리고 만연해 있는 악을 관찰하고 체험했으며 이러한 체험과 고독한 하숙 생활을 바탕으로 탁월한 일기체 소설인 『말테의 수기』를 썼다. 『말테의 수기』는 체념 의식과 개개인의 고유한 삶이나 죽음은 아랑곳없고 질보다 양이 판치는 대도시의 양상에 대한 공포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절망의 기록이다. 이 안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똑같은 핵(核)의 주위를, 다시 말하면 빈곤과 죽음과 공포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인간상이 그려져 있다.
거리는 너무나도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가 지루해하며 내 발 밑에서 걸음을 빼앗아갔다. 그러고는 나막신을 신은 듯이 이리저리 딸가닥거리며 돌아다녔다. 여자가 그 소리에 놀라 너무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켰기 때문에 얼굴이 두 손 안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손 안에 비어 있는 얼굴의 틀을 보았다. 시선이 손에 머물러 있는데도 손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보지 않는 데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노력을 필요로 했다. 얼굴을 안쪽에서 보는 일도 소름끼쳤지만, 얼굴 없는 적나라한 상처투성이 머리통을 보는 일은 훨씬 더 끔찍했다. -『말테의 수기』중에서
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여자를 그린 이 장면에서 릴케는 비참한 인간상을 주도면밀하게 그려내는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밖에도 이 작품에는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죽기 위해서 자선병원을 찾아가는 인간의 군상, 죽음조차 대량생산되는 대도시의 비정함을 물기어린 필치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말테의 수기』를 탈고한 직후 극도의 무력증에 빠져 있던 릴케는 그의 인생을 뒤바꾼 세 번째 인물을 만난다.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 호엔로에 후작 부인은 1911년 릴케를 아드리아 해변의 두이노 성에 초대하였고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성채(城砦)와 그 아래로 끊임없이 몰려와 세차게 부딪히며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릴케는 그의 필생의 역작인 『두이노의 비가』 중 「제1비가」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총 10편에 이르는 비가에는 생을 온전한 존재의 반면(半面)으로 보고 생의 허무를 개탄하는 작가의 처절한 몸짓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시인이 도달한 존재 긍정의 표현으로서, 삶의 긍정과 죽음의 긍정이 일체되어 나타난다. 결국 생과 사의 두 영역에서 한없이 길러지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의식이 비가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테마이다.
그 누구의 죽음도 아닌 자기 자신의 죽음을 바랐던 그에게 그 자신만의 죽음이 성취되는 날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쇠약한 그가 장미 가시에 찔려 백혈병을 일으켰고 이것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죽음에서까지 릴케는 전설을 남겨주고 갔다. 그 전설과 더불어 릴케는 우리의 영혼 속에 오래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이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기꺼움이여.-릴케 자신이 손수 쓴 「묘비명」 중에서
사람과 사물, 풍경과의 만남에서 그 내면을 깊이 응시하여 본질을 이끌어내고자 한 그의 글쓰기는 20세기 독일 현대 작가들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 옮긴이 서문1. 형상시집– 제1권서시 | 어느 사월에 | 달밤 | 기사 | 소녀의 우울 | 신부 | 정적 | 천사들 | 수호 천사순교한 여인들 | 성녀 | 어린 시절 | 어느 어린 시절에서 | 소년 | 견진성사를 받는 아이들최후의 만찬 | 서시 | 외로운 남자 | 아샹티의 여인들 | 비탄 | 고독 | 가을날 | 가을기도 | 엄숙한 시간- 제2권시 | 고지(告知) | 잃어버린 나날의 단편 | 자살자의 노래 | 눈먼 여인2. 신시집 초기의 아폴로 | 소녀의 한탄 | 사랑의 노래 | 에란나가 사포에게 | 사포가 에란나에게 사포가 알카이오스에게 | 어린 소녀의 묘비 | 제물 | 동방의 낮의 노래 | 아비샥다윗이 사울왕 앞에서 노래한다 | 여호수아의 민회(民會) | 탕아의 가출 | 감람나무 과수원피에타 | 시인에게 부치는 여자들의 노래 | 시인의 죽음 | 부처 | 자오선의 천사 대사원 | 대현관 | 장미형의 창문 | 주두(柱頭) | 중세기의 신 | 시체 진열장죄수 | 표범 | 영양 | 일각수(一角獸) | 성 세바스티안 | 봉헌자(奉獻者) | 천사 (외 다수)▨ 해설▨ 작가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