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시(戱詩), 컬트시 연작 등을 통해 자유로운 소재와 언어로 정형화된 기존의 시를 해체하는 박상배의 시집
박상배 시인의 시집 『시와 하늘』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는 196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김수영의 추천을 통해 등단한 유일한 시인이다(김수영은 추천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오랜 독일 유학 생활을 하느라 많은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박상배는 우리 시단에서 시와 언어에 대한 깊은 자의식을 가지고 기존의 시 창작방법론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는 전위적이고 독보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오늘의 시가 취하는 규범 언어에 대한 예속 상태를 벗어나서 내일의 시인은 능동적 공세를 펴나가야> 한다는 믿음으로 시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의 시작에 대해 동료 시인 이승훈은 <박상배가 해온/하는 작업은 외롭지만 신나는 일>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파격적인 실험을 통한, 시에 대한 시 쓰기
박상배는 이번 시집에서도 희시(戱詩), 컬트시 연작 등을 통해 자유로운 소재와 언어로 정형화된 기존의 시를 해체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승훈은 박상배의 시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상배는 그 동안 시와 시론을 통해 이른바 텍스트시를 강조하고 실천했다. 텍스트시는 그에 의해 처음으로 우리 시단에 소개된다. 그에 의하면 서정적 에센스가 무덤에 가버린 시대에 남는 건 텍스트뿐이고 텍스트시뿐이다. 텍스트과 텍스트 사이에 시가 있다는 것, 결국 당신들이 생각하는 시적 본질은 없고 언어만 있다는 것, 그리고 언어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 그 동안 이런 인식은 그에 의해 비시, 형태시, 메타시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예술 장르간의 이산, 혼융, 퓨전, 확산, 집합을 노리고, 이런 점에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문학사적 가치가 있다.
이번 시집의 절반 가까이 되는 戱詩 연작에서 그는 <동덕여대인문대학/독문과배상박 -「戱詩 9」>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써넣기도 하고, <고현철이라는 생면부지의 고현놈이 아아/아 그놈이 버릇도 없이(뺄까? 넣자)/날 어르고 뺨친다 말야 속임수를 쓴단/말야 씹어도 고이 씹어야지 씹헐놈(넣자) -「戱詩 16」> 처럼 비어를 사용하기도 하여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한편 「戱詩 3」에서는 <송대관의 노랫말에도 들어 있듯/아련한 정 때문에//십년 살다 마음 식어/걷어찬 남/여자도>라는 부분에 대하여 <사선 부분을 읽을 때 여성 독자는 \’남\’을 남성 독자는 \’여\’를 선택하길 권함.>이라는 각주를 달아 시에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문을 열어두기도 한다. 전통적인 시 언어의 경계를 벗어난 이러한 일련의 실험들은 독일 전후시와의 관련 하에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단지 외국시의 영향 하에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戱詩 연작의 근원은 전통 한시의 패러디인 조선 후기 김삿갓의 戱詩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박상배의 戱詩 또한 유희적 어조를 통해 골계미를 획득하고 있다.
일상의 속됨을 아우르는 가벼운 웃음의 세계
박상배의 두번째 시집 『잠언집』에 대하여 평론가 김준오가 언급했듯이 그의 해체주의 시관은 시를 일상의 세속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과거와는 달리 시를 모든 문학 양식들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것으로 만든다. 언어 속엔/가벼운/나의 지구가 돌고/부서진/나의 규율/나의 지구를 따라/가벼운/나의 여자가 돌고/있는 듯/없는 듯/신명나게/나의 청춘이 돌고/언어 속엔/또/바람난/너와 나의 이야기/우리의 역사가 돌고/연기 나는/갈채의 꽃들이 돌고/어지러운/자유가 돌고/그리고/그리고/언어 속엔/이념의 찌꺼기/나의 여자가/배설한/음악이 돌고 -「춤」전문
위의 시는 시인 자신의 시에 대한 메타시이다. 여기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까지 포착하여 시의 소재로 삼는다. 아내 대신 설거지나 빨래를 하다가도(「부부애」), 맥도날드에서 우연히 조카딸을 만나서도(「좋다 만 일」), 여학생들 틈에 끼여 동료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도(「늦깍이 청강생」) 시상을 얻는다. 그는 무겁고 진지한 사색으로 세상에 접근하기보다는 <이가 하나씩 빠질 때마다/허공을 하나씩 얻는다/있던 것을 하나 잃고/없던 것을 하나 가진다/허공도 이젠 존재이다. -「虛空 1」전문>라며 일상적 경험을 통해 가볍게 <있음/없음>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이렇게 그는 시작 활동 이래로 끊임없이 일상의 차원까지 시 속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이승훈이 말한 것처럼 <시와 하늘을 연결하려는 몸짓>이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세상 만물을 그 아래 품고 있는 하늘처럼, 시인 또한 무수한 손으로 세상의 비속한 모습까지도 아우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 박상배1940년 부산에서 출생.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비엔나 대학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 196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현재 동덕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집으로 『모자 속의 詩들』(1988, 문학과지성사), 『잠언집』(1994, 세계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