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연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4년 4월 28일
ISBN: 978-89-374-8910-5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35x210 · 128쪽
가격: 14,000원
분야 한국 문학
나쁜 소년이 전하는 퀘이사의 신탁
새로운 감수성을 수혈할 미래에서 온 시집
부조리한 세계와의 지독한 불화와 사랑, 그 아름다운 신경질
해설을 쓴 평론가는 죽었고, 시를 쓴 시인은 사라졌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시인 김경주를 비롯하여 수많은 불온한 청춘들은 이 시집을 필사하며 “돌림병”을 앓았다. 시집에 얽힌 이야기 또한 한 편의 시로 읽힐 만큼, 한편의 젊은이들이 ‘빨간 책’을 읽었다면, 또 한편에서는 몰래 숨어들어 이 ‘검은 책’을 읽었다. 바로 그 전설의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출간 20년 만에 부활했다. 허연 시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출간되었을 때,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그 어떤 유(類)도 아니며, 자기만의 공화국”을 가지고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긍정의 정공법으로 ‘무의미의 의미’라는 두려우리만치 아름다운 미학을 창출해 냈다.”(문학평론가 故 황병하)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는 추함, 비루함, 소멸, 허무 등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지독하게 대면시키며 “불온한 검은 피”를 끊임없이 수혈한다. 비애로 가득 찬 이 시집은 슬픔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 형식으로 노래하면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감싸안으며 사랑을 치열하게 탐색한다. 그는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하고 충돌하면서 “어디에도 희망은 없으므로”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나쁜 소년의 불온한 검은 피는 여전히 우리의 혈관을 흐르며 심장을 뜨겁게 데운다. 혈서를 쓰듯 한 방울 한 방울 검은 피로 그려 낸 62편의 시편들은 우리를 ‘첫 시집’이라는 그 거부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감동으로 몰아넣는다. 이것은 20년 전 과거의 시집이 아닌, 영원히 우리보다 20년쯤 앞선 미래에서 온 시집이다. 그것이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가 이 시집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이유다.
1부
지옥에서 듣는 빗소리
전쟁 기념비
내가 나비라는 생각
날아가세요―비가(悲歌)
장마․장마․장마―K를 추모함
상계동
새벽
무반주
경원선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K
방문 앞에 와서 울다
그날
목요일
비야, 날 살려라
2부
권진규의 장례식
곡마단
구상(具象)
공작 도시―손상기의 그림에서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셨습니다
손상기는 곱추가 아니다
판화
오윤 작(作), 바람 부는 곳
GOGH
영화에서
철도원―영화
대화
오 샹젤리제
Midnight Special․1
Midnight Special․2
필름
그 거리에선 어떤 구두도 발에 맞지 않았다
길
나는 또 하루를
이사
3부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저녁, 가슴 한쪽
참회록
갈대에게
별곡․1
별곡․2
교정(校庭)
철로변 비가(悲歌)
칠월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진부령
나를 가두지 마
꽃다발
내 사랑은
4부
거미와 나
포구
잠들 수 있음
벽제행
편지
출근
나무
희망
그해 폭설
파르티잔
불간섭
그날도 아버지는
청량리 황혼―CANVAS에 유채
발문|김경주
퀘이사의 신탁
■ 여전히 뜨겁게 흐르는 불온한 검은 피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세상에서 시인은 과연 어떤 시를 쓸 수 있을까. 어떤 의미도 조합해 낼 수 없는 무의미한 세계에서 시인에게 희망이란 “화살표도 숫자도 모두 지워져”(「희망」) 버린 이정표와 같다. “세상 모든 소금 덩어리들이 비를 맞고 있”(「장마․장마․장마」)는 것처럼 사라져 버릴 듯 위태롭다.
허연 시인은 20년 전 『불온한 검은 피』 초판 자서에서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헛수고에 지쳤을 때 그 고통의 악습과 매혹에 차라리 고개가 끄덕여질 때 시를 썼다. 외따로 떨어진 무수한 불유쾌한 말들의 조합—시라는 것—이 내게는 면벽이나 환희에 가까웠다.”
그는 20년 후 개정판 자서에서 다시 이렇게 고백한다. “패배한 공화국이었지만 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고통뿐인 세계일지라도, 패배한 공화국일지라도, 피하거나 묻어 버리지 않고, 그 먼지 같은 폐허를 끌어안고 사는 일, 그에겐 그것이 시 쓰기이고 삶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차창룡의 말처럼 “시인이란 일찍이 허무를 알아 버린 자들이고, 허무를 알았음에도 대책 없는 자들이고, 또 스스로 대책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며, 허연은 생래적으로 바로 그 허무를 몸으로 깨달은 시인이다.
허연에게 시는 반항이다. 구원을 부정하고 세상에 대한 도전과 반항적인 자세는 이 첫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때 묻은 나이”, “죄와 어울리는 나이”가 되기 전, 시인 허연의 가장 순수했던 “나쁜 소년”의 유년기를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이 끊어 놓은 지평선을
달음질치는 상상을 하던 열두 살 적
마른 개나리가 햇살에 미쳐 서 있던 늦은 겨울
주일 헌금으로 과자를 사 먹고
퉁퉁 부은 종아리를 만지며
기어오르던 제방길
울컥하고 돌을 주워 하늘에 던지면
살아 움트는 건 모두 눈물이었습니다
용서하는 일보다
언제나 먼저 따라와 밟히던
먼지뿐인 길이여
발목을 붙잡던 불 켜진 창들이여
—「길」
“주일 헌금으로 과자를 사 먹고”, “울컥하고 돌을 주워 하늘에 던지”는 것이 아직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반항의 전부이지만, 그는 이 무기력한 반항의 결과가 결국 허무일 수밖에 없음을 생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반항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지금 목숨을 건다. 얼굴을 마주한 세상과 여자와 술값과 연탄가스에. 나의 꿈은 언제나 섬이며, 선착장의 붉은 깃발이며, 운명처럼 사라진 고향이다. 왜 가난은 항상 천재이며, 고독과 번민이 천재여야 하나. 사랑을 일삼기에도 난 시간이 없다. 서커스에서 춤추는 용과 나는 다를 게 없다. 뭐 시인 만세라고 빌어먹을 너희들은 나를 학생이라고 부르고, 허 군이라고 부르고, 가끔은 젊은 시인이라고 부른다. 독일이 폭력에 마약에 시달린다고, 갈 놈은 다 가는데 나는 지금 출근을 한다. 이해하지 못한 채 끌려간다. 언제부터 너희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버티고 있었나. 왜 나는 목숨을 거나. 도대체 나는 왜 아버지를 닮고 있나. 나는 지금 병원엘 간다. 목숨을 걸었으므로, 바람처럼 가야 하므로, 발자국을 지워야 하므로, 나는 지금 목숨을 건다. 지중해에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출근」
이처럼 열두 살 소년의 반항은 사회 초년병이 된 후에도 계속되며, 통념과 관습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진다.
그의 시는 거침없고 솔직하다. 날것 그대로의 일상적인 언어로 가슴 시린 서정성을 보여 준다. “럭비공 같은 비약, 문맥의 비예견적인 뒤틀기”로 표현되는 그의 개성적인 언어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 시집은 비애로 가득차 있다. 슬픔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 형식으로 노래하면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감싸안으며 사랑을 치열하게 탐색한다. 그는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하고 충돌하면서 “어디에도 희망은 없으므로”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뒤돌아보면
채 닦이지도 않은 눈물만 얼어붙어
먼 불빛들 사이
우뚝 서 있어라, 운명처럼
그대를 사랑한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으므로
—「진부령」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내 사랑은」
이러한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긍정이 “무의미의 의미”라는 아름다운 미학을 만들어 낸다.
이 시집 속엔 술에 취해 밥상을 엎는 아버지, 까무러치듯 쓰러지는 어머니, 멍든 4라운드 권투 선수, 실어증에 걸린 인간, 피를 파는 소년, 따귀를 맞는 직업훈련생, 구치소에서 돌아와 중국집에서 문신을 새기는 청년들, 담벼락에 기대어 우는 사람들이 분노와 연민 속에 뒹굴고 있다.
온통 쓸쓸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며 죽음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가 이토록 아름다운 건, “주저앉으며 일어서며/ 다시 살아가는 일”만 남은 사람들, “울기 위해” 사는 사람들, “살아서/ 느린 걸음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을 연민하며 그들에게 “사라질 때까지만 옆에 있어 준다고” 영원한 약속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너에게, 말 없는 눈발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쓸쓸함을 묻지 않으리라, 어느 날 막막한 강변로에서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창문 틈에 너를 기다린다는 연서를 꽂아 놓을 때까지, 네가 내 옆에 없음을 알고 전율할 때까지
낡은 자명종의 태엽을 감으며,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 발문에서
이 시집엔 비애가 가득하다. 이 시집은 슬픈 은유들로 가득하지만 그의 은유는 사람을 배반하거나 인간에게 심술을 걸기 위한 수사로 머무르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시집 속에서 이 결들이 드러내고 싶은 것은 인간만이 시를 향해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견고한 믿음이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피를 나누어 주기도 하고, 인간은 인간을 위해 피를 빼앗기도 한다. 하지만 시 역시 인간에게 자신의 피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김경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