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글 류신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3년 12월 6일
ISBN: 978-89-374-8870-2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5x215 · 324쪽
가격: 18,000원
발행일 2013년 12월 6일 | 최종 업데이트 2013년 12월 6일 | ISBN 978-89-374-8871-9 | 가격 12,600원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모티프를 얻은 독특한 서울 탐방기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중앙대 유럽문화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 류신은 현대 독일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독문학자이자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두 권의 평론집을 낸 문학 평론가다. 그는 이 책에서 80년 전 경성 시내를 주유했던 구보 씨를 2013년 지금의 서울 거리로 호출해 서울의 일상을 미시적으로 탐사하며, 소설, 시, 회화, 조각, 대중가요 등의 문화 텍스트를 시대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풍성하게 인용해 벤야민식 도시 읽기를 시도한다.
공간은 곧 인간의 실존 양식을 해독하는 실마리다. 도시의 거대한 풍경 속에 은폐되고 망각되었던 사소한 이미지들이 깨어날 때 도시와 도시 거주자의 행위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문학과 예술의 독법으로 관찰한 서울은, 자본주의와 상품 물신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 욕망과 감정, 의식과 무의식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소비 욕망과 개발 욕망이 정치, 경제, 사회뿐 아니라 문화와 생태 문제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간이다. 한편으로는 물질적 욕망보다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명동성당처럼 자본의 환등상을 물리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기도 하다. 류신이 남긴 이 기록은 공간에 스민 문학의 기억을 되새겨 우리가 나아가야 할 좌표를 탐색하는 21세기판 아케이드 프로젝트다.
책머리에
프롤로그
1 영등포에서 숭례문까지
영등포 타임스퀘어 | 버스 | 프로젝트 | 은행 | 노량진 수산 시장 | 고시원 | 산책자 | 한강철교 | 63빌딩 | 국립중앙박물관 | 타워 크레인 | 용산 남일당 | 서울역 | 숭례문
2 경복궁에서 서울광장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 | 통인시장 | 광화문광장 | 광화문 사거리 | 청계광장 | 서울시청 | 플라자호텔 | 서울도서관 | 서울광장 분수대
3 롯데호텔에서 세운상가까지
롯데호텔 아케이드 | 정오 | 롯데백화점 | 러브릿지 | 신세계백화점 | 지하도 | 명동 눈스퀘어 | 이동 통신 대리점 | 맥도날드 | 올리브영 | 명동성당 | N서울타워 | 청계천 | 세운교 | 세운상가
인터로그
지하철
4 홍대 입구에서
탐앤탐스 |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초안 | 르네상스 안경점 | 스타벅스 | 던킨도너츠 | 버거킹 | 배스킨라빈스 | 편의점 | 주유소 | 가두판매점 | 피로 사회 | 파사주 | 광고탑
인터로그
지하철 | 야간 비행 | 한강시민공원 | 승강장 | 롯데월드
5 코엑스몰에서
코엑스몰 | 네일숍 | 헤어숍 | 메가박스 | 비디오 아케이드 | 아쿠아리움 | 성형외과 | 반디앤루니스 | 웰빙 | 태평양홀 | 삼성역
인터로그
택시
6 가로수길에서 강남역까지
가로수길 | 러버콘 | 횡단보도 | 강남대로 | 강철 도시 | 엔제리너스 | 도시 극장 | 도시의 신 | 강남역 캐노피 | 유리 도시
인터로그
광역 버스
7 다시 영등포에서
표범 | 주상 복합 | 가로등 | 아파트 | 포스트잇
에필로그
참고 문헌
도판 저작권
■ 서울을 걷는 도시 관상학자 벤야민과 구보
소설 한 문장에서, 시 한 구절에서, 그림 한 점에서
근현대의 욕망이 응축된 서울의 진면목을 드러내다
저자 류신은 서울 출신이 아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20대부터 집과 학교, 집과 직장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하루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즉 ‘서울에’ 살지는 않으되 ‘서울을’ 살았다. 그래서 살기도 힘들지만 떠나기도 힘든 이곳,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모든 욕망의 집결지”(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이 궁금했다. 하나의 공간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가능한 한 다양한 차원에서 장소성(placeness)을 살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거리로 나가 서울을 구성하는 시각적 현실을 체험하고 시와 소설, 그림과 사진을 동원해 그 사회 문화적 함의를 해독했다.
특히 문학 텍스트는 서울의 이미지를 채집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문학은 특정한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살아 내는) 인간의 삶을 드러내 주는 훌륭한 수단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유하)나 「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당장 동시대의 문학에서 서울과 서울살이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것’을 ‘없애야 할 것’으로 혼동하는 개발 욕망의 야만적 태도를 지적하거나(황정은, 『백의 그림자』) 편의점에서 소비자라는 비교적 평등한 정체성을 획득하고 안심하는 현대 도시인을 발견해(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내는 것이 그 사례다.
책은 주인공 ‘구보’가 2013년의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 시작되고, 자정을 지나 귀가하면서 마무리된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거리 산책자라 할 만한 소설가 구보 씨처럼 21세기의 구보도 하루 동안 서울 거리를 산보한다. 다만 80년의 세월을 거치며 급격히 넓어진 서울을 돌아다니기 위해 도보 외에도 버스, 지하철, 택시 등 다양한 교통수단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구보의 산책은 영등포에서 출발해 광화문과 을지로 일대, 홍대 입구, 코엑스, 가로수길, 강남역으로 이어진다.
구보는 산책을 통해 서울 곳곳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목격한다. 서울은 무엇보다 소비 욕망으로 작동한다. 불안정한 삶이 주는 두려움을 구매와 소유 행위로 덮으려는 소비자 대중은 백화점과 호텔,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쇼핑에 목을 맨다. 자본주의의 욕망은 과도한 개발에서도 드러난다.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는 “건축은 명백히 한 시대를 ‘고발’한다.”(『반하는 건축』)라고 했다. 세운전자상가처럼 이제는 몰락한 욕망도 있지만 그 너머로 지금도 타워 크레인은 솟아오른다. 개발은 ‘재’라는 접두사가 붙으면서 영원한 동력을 얻었다. 1990년대 수도권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개발 욕망은 2000년대에 다시 서울 안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온갖 뉴타운과 도심 재개발 계획 앞에 “서울은 언제나 공사 중이다.” 용산 곳곳에 외팔 십자가처럼 꽂힌 타워 크레인이 바로 지금의 한국을 고발하는 증거물이다.
■ 무감각한 일상에 균열을 내는 문학적 몽타주의 실현
보다 나은 삶을 상상하는 씨앗이 되다
주지하듯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죽기 전 1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연구다. 본래 ‘열주(列柱)로 지탱되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를 일컫는 아케이드는 19세기 초반 파리 도심의 상가 모델로 도입되어 번성하다가 백화점의 등장으로 몰락했다. 벤야민은 한때 “상품 자본주의의 원조 신전”(『아케이드 프로젝트』)으로 번성한 이 쇼핑 공간을 미시적으로 탐사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기원을 천착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산책 애호가였다. 파리 시내를 직접 걸어다니며 남들이 쉬이 지나쳐 버리는 자질구레한 것들에 관심을 보였고 그 사소한 파편에서 자본주의의 문화적 뿌리를 예리하게 들춰냈다.
벤야민이 19세기 자본주의를 해체한 다음 그 조각들로 자본주의 자체를 새롭고 낯설게 재구성하려 한 것처럼 이 책도 주인공 구보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다종한 텍스트와 그림과 사진과 이에 대한 해석을 뒤섞어 동시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욕망의 근원을 추적한다. 벤야민은 『일방통행로』에 이렇게 썼다. “의지에 생생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표상된 이미지뿐이다.” 눈앞에 펼쳐진 서울의 풍경이 기성의 문학, 예술 작품과 조우할 때 생성되는 변증법적 이미지(사유이미지, Denkbilder)는 특유의 낯설게하기 효과로 타성에 젖은 인식에 충격을 가한다. 그리고 낯선 이미지를 통해 각성된 인식은 견고한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낳는다.
상품 소비 공간으로 전유(專有)되었던 아케이드는 류신에 이르러 건물과 건물을 잇고 길과 길을 연결하며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소통의 네트워크로 재해석된다. 대중은 상품 소비자가 아닌 ‘나’와 ‘너’라는 사람으로 재발견된다. 그렇게 이 책은 단순한 도시 인상기에 그치지 않고 지극히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서울의 이미지들 속에서 사유와 인식의 해방을 돕고 다른 삶의 양식, 다른 도시의 모습을 꿈꾸는 가능성을 던진다.
■ 본문 중에서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서울의 거리를 걸었다. 거리 답사가 서울을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거리는 대도시 삶의 양식이 라이브로 공연되는 무대, 말하자면 동시대 문화가 발생하고 진화하는 역동적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거리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도보 체험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산책의 호흡에서 사유의 리듬을 발견한 고대 그리스 소요학파의 후예가 되고 싶었다. 더불어 생활 공간 서울을 순례하며 나의 존재론적 좌표를 재정위하고 싶었다. 서울의 풍경을 온몸으로 품고, 진심으로 느끼고 싶었다. 요컨대 서울이라는 필연적 운명을 사랑하고 싶었다. 이 책은 서울에 대한 내 애증의 기록이다.
―「책머리에」
길바닥에는 단풍보다 화려한 학원 전단지들이 나뒹구는, 취업과 진학과 신분 상승 욕망의 격투장. 시험에 대해 떠도는 각종 정보와 루머들을 짙은 담배 연기 속에서 공유하는, 서글픈 청춘의 피난처. “합격해야 탈출할 수 있는 섬, ‘노량도’”(김애란, 「서른」). 여기가 바로 노량진이었다.
―「고시원」
서울의 욕망을 온몸으로 대변하는 기중기가 바로 타워 크레인이다. 꼿꼿이 서 있던 타워 크레인이 허리를 굽히고 주저앉으면 욕망 하나가 축조된 것이고, 저놈이 다시 허리를 곧추세우면 또 다른 욕망이 발기한 것이다. 서울은 언제나 공사 중이다.
―「타워 크레인」
오늘날 서울역은 소설가 구보 씨가 낭만적인 여행의 출발점으로 동경하던 경성역과는 너무 다르게 진화했다. 출발과 도착이라는 정거장의 역할 이외에 부차적인 기능이 너무 많이 입점했다. 소설가 구보 씨가 느꼈을 여행의 행복을 맛보기에는 역사가 너무 상업화됐다. 추억을 담기에는 역사가 너무 자동화됐다.
―「서울역」
구보는 산책하듯 백화점을 거닐며 ‘잘 배치된 부’를 감상했다. 백화점은 자본주의 시장 원리를 가장 세련된 형태로 극대화한 공간이다. (중략) 정교한 연출과 마술적 배열을 통해 상품을 영원한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거대한 욕망의 사원이다. 요컨대 백화점은 자본주의의 신흥 종교다.
―「롯데백화점」
구보는 몸을 돌려 왔던 통로를 거슬러 걸어가다가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케이드는 바로 이곳이다.
물론 외형만 염두하고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이 아케이드에는 교활한 상품 물신이 숨어 있지 않았다. 검은 입을 벌린 무시무시한 자본의 악어도 없었다. 행인을 매혹하는 “계산된 몽환극”이 연출되는 쇼윈도도 부재했다. 이곳에는 인간의 욕망을 농락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없었다. 대신 ‘기도하는 손’이 있었다. 오직 고요와 침묵이 흘렀다. 이곳에는 삶에 대한 진득한 반성이 있었고, 누군가를 향한 진심이 있었으며, 바람직한 삶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었다. 불의에 저항하는 양심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요컨대 이곳은 아름다웠다. 형식과 내용, 물질과 정신이 신비로운 합일(unio uystica)을 이루어 낸 속세 속 성소였다.
―「명동성당」
구보는 서울의 하계로 내려갔다. 서울이라는 “미로의 내장” 속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역 벽에 걸린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잠시 훑어보았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 선들이 제각기 달리고 꺾이고 다시 달리면서, 또 서로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서울 지하 세계의 거대한 성좌를 아름답게 그려 내고 있었다. 서울이라는 미로의 내장도 미로였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일상의 동선이 만들어 내는 고유한 별자리를 몇 개씩 갖고 있을 터였다.
―「지하철」
첫인상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흡사 도서관 같았다. (중략) 이제는 공부도 유행하는 옷을 입고, 개방된 공간에서, 로스팅한 원두를 갈아 만든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멋있게’ 하는 광장의 시대가 온 것이라고 구보는 생각했다.
―「탐앤탐스」
이곳은 단순히 손톱을 관리받는 곳이 아니라 내 몸의 아주 작은 일부도 아주 소중함을 누군가에게 승인받고 인정받는 곳이었다. 자존을 관리받음으로써 기분을 구매하는 곳이었다. 고된 노동과 팍팍한 일상이 나이테처럼 축적된 지저분한 손톱과 냄새나는 발톱을 화려한 에나멜로 분칠하는 곳이었다.
―「네일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