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 우수문학도서 선정평범과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역동적인 사유자신의 영육(靈肉)을 통째로 흐린 늪 바닥에 밀어 넣는대담하고도 도발적인 시의 언어시대의 거부로 이어진 자유와 치열한 양심의 시인 ‘김수영’을 기리기 위하여 1981년 제정된 <김수영 문학상>이 또 한 번의 혁신을 시도했다. 올해로 제25회를 맞이한 <김수영 문학상>은 2005년 제24회까지 한 해 동안 출간된 시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았으나, 2006년 올해부터 운영 규정에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것. 기성 시인은 물론 미등단의 예비 시인들에게도 그 문호를 활짝 열고, 넘치는 패기와 신선한 개성으로 한국 시단의 미래를 책임질 많은 시인들을 발굴하고자 그 제도를 공모제로 전환하였다. 공모제 전환 후의 첫 번째 <김수영 문학상>. 많은 기대와 관심 속에서 예심과 본심이 이루어졌고, 강렬한 에너지와 대담하고 도발적인 시어로 모두의 찬사를 불러일으키며 “단연 빼어나다는 데에 이견이 없”는 작품이 탄생했다. 2006년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바다로 가득 찬 책』은 결코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 예술적 도살, 즐거운 식육 ― 매혹적인 해체와 구원의 축제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서동욱은 강기원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를 두고 “척추 혐오자이고 도살의 광적인 팬이며 렉터 박사의 분신이자 요리광”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사용한 호칭만으로도 그녀의 시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강기원의 시는 기존의 어떤 상식도 거부한다. 새롭고 대담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시가 목적 없는 해체와 도발만을 일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그녀가 ‘척추 혐오자’이고 ‘도살의 광적인 팬’이며 ‘렉터 박사의 분신’으로서 시도하고 있는 ‘도살’이란, 인간 유기체에 대한 해체로서의 ‘도살’이다. 서동욱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예술이 열망해 마지않는 새로운 비전의 창출, 과학과 철학적 규약이 만들어 놓은, 유기체라는 눈가리개 너머의 몸의 세계의 현시에 성공한 시편들을 보여” 주고 있다. “퍼즐의 몸 흩어지다/ 조각난 머리, 젖가슴, 허벅지, 무릎뼈가/ 밟히다, 짓밟히다”(「다몽증(多夢症)-몸」) “나를 폭파시킬 수 있었다면 그리했을 거예요// 콧방울, 혓바닥, 유두, 배꼽, 은밀한 그곳까지/ 바벨의 뇌관을 박는 거지요”(「피어싱」)강기원은 우리의 신체를 해체함으로써 해방을 꾀하며, 더 나아가 해방의 결과물인 ‘고기’로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골즙까지 남김없이 빨아 먹는 것 앙상한 늑골만 남을 때까지”(「복숭아」) “늑골의 강력분/ 땀과 눈물의 소금기/ 숨결 효모/ 수줍은 미소의 당분 약간/ 칠 할인 체액을”(「베이글 만들기」)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요리광’이자 ‘육식 애호가’인 이 시적 화자가 \’잡아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기를 ‘먹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허기진 네게/ 인상 깊은 만두를 먹여야지/ 만두소처럼 나로 너를/ 온전히, 맛있게, 그득하게 채워야지”(「만두」) “나인줄은 모르게/ 감쪽같이 뽀얘져서/ 고추 후추 듬뿍 뿌려/ 나인 듯 아닌 듯/ 자 드세요”(「곰국」) ‘먹이기’라는 행위에서 그녀가 의도하는 것은 바로 ‘구원’이다. ‘먹이기’라는 행위를 통해 타인을 구원하고 동시에 자신도 구원받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어머니 대지’가, 우주가 살아 나가는 방식”인 것이다. 척추를 부정하고, 흘러내리는 고기로서의 즉, “해체에 직면한 인간-유기체는 강기원 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첫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부터 강조되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이번 시집 『바다로 가득 찬 책』의 비약적 발전은 그야말로 눈부신 성과다. 그녀가 고안한 특별한 언어 사이에서 흐르는 ‘도살’과 ‘식육’과 ‘먹이기’라는 과정을 통한 ‘구원’의 발견은 실로 놀라운 시적 성취이며, 그로 인해 시인 역시 시적 화자처럼 ““만물을 삼키고 뱉어 내는 소용돌이”, 만물을 ‘먹이고 먹는 일’을 돌보는 질서, 더 나아가 우주의 바퀴를 회전하게 하는 “위대한 암컷””으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 본심 심사평 중에서강기원의 작품은 여성성이라는 것이 음식을 끓이는 불처럼 작용하여 언어에서 강렬함과 맛있는 냄새가 피어오르게 하는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하여 시에 대한 독자의 미각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밤의 적막이 깃털이던/ 검은방울새”요,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인 시인을 갖게 되었고 “한때 그녀는 명소였다”라는 구절에 나오는 낱말을 빌려 시의 명소(名所)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정현종(시인)강기원의 시는 평범, 당연, 상식, 고정관념을 거부한다. 그의 시는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 역동적인 사유, 엉뚱한 발상과 대담한 진술들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영육을 통째로 흐린 늪 바닥에 밀어 넣어 절이는 듯한 그의 의식은 그로테스크하면서 종교적이고 도발적이다. 제도 속의 가축 떼를 놀라게 하는 맹수처럼, 지루하고 고루한 것들을 물어뜯으려는 힘이 그의 시 도처에서 느껴진다. 강한 시인을 예감케 하는 한 신인의 등장을 보는 듯하다. ―최승호(시인)■ 작품 해설 중에서『바다로 가득 찬 책』은 “야수인 예수”와 렉터 박사라는, 식인 풍습에 기원을 두는 두 인물을 큰 축으로 삼아 설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 두 인물은 잡아먹기와 먹이기라는 서로 상반된 방향의 운동을 하는데, 고기를 잡아먹는다는 매혹적인 행위 안에서 ‘먹이기’를 발견하는 것은 시적 화자의 정신세계에서 큰 전회에 해당한다.유한성 속에서 홀로 죽는 대신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먹이는 사건’. 이것은 내가 나의 유한성을 넘어서, 타인이 누리고 살아갈 시간 한 조각을 쪽배처럼 얻어 타고 계속 살아 나가는 방식이다. 결국 ‘먹이기’라는 행위의 본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구원의 사건’이며, 이렇게 타인을 먹임으로써 그를 구원하고 동시에 내가 구원받는 것, 그것이 바로 ‘어머니 대지’가, 곧 우주가 살아 나가는 방식인 셈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한 개체로서의 여자라기보다는, 코라(Khôra), 바로 생명들의 요람인 어머니 대지이며 “만물을 삼키고 뱉어 내는 소용돌이”, 만물을 ‘먹이고 먹는 일’을 돌보는 질서, 더 나아가 우주의 바퀴를 회전하게 하는 “위대한 암컷”이다. ―서동욱(시인, 문학평론가)★ 강기원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가 있다. 2006년 제25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의 말
전지가위 위대한 암텃 미근 복숭아 봄날의 도서관 언어로 가득한 주방 차디찬 고깃덩어리 만두 베이글 만들기 곰국 절여진 슬픔 그린티 아이스크림 칵테일 껍질 치한이 되고 싶은 봄밤 가을날의 피에로 쇠 침대 비눗방울 당 르 누아르 기린 바다로 가득 찬 책 그린다는 것 마젠타 화이트 블랙 회색이란 너의 이름 야생 보호구역 하짓날 하오 세시 피어싱 달거리가 끝난 봄에는 연애에 대한 기억 미약 제조법 연애 고무장갑 벨트 고리 저녁 어스름처럼 스며든 마네킹 고슴도치 열두 개의 회색 벨벳 양복으로 남은 사내 에스컬레이터 미아 다몽증 – 몸 난지도 데자뷔 염 씻김굿 울음 빅 브라더 얼굴 작동 부호화 시스템 방 한 칸 어떤 하루 덩굴손 선물 다몽증 – 집 비 붉으락푸르락 이별 검은방울새 너무나 조용한 소풍 잠꼬대 돌계집 뭉게구름 나의, 나의 것도 아닌 보름달
작품 해설 : 렉터 박사, 외과 수술, 아니 식사 / 서동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