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찬일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6년 5월 30일
ISBN: 978-89-374-0744-4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12쪽
가격: 7,000원
시리즈: 민음의 시 135
분야 민음의 시 13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 우수문학도서 선정고통과 불안, 상처 그리고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 봄으로써 철학적 성찰에 이르는 박찬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모자나무』가 출간되었다. 시집을 구성하고 있는 총 6개의 장 중, 앞의 5개 장에서는 총 50편의 시에, 마지막 6장에서는 시인의 삶 속에서 깨달은 귀중한 지혜를 57개의 아포리즘에 담았다.
자서1. 모자나무수리산의 발견모자나무유리창 모자철제 다리죽은 나무가 나무다다대포의 비가녀석아, 녀석아 머릴 내밀어라의암터널아버지의 이발사기일복통2. 폭포십이선녀탕태풍초록 무덤폭포빠른 비행기, 높은 무역센터수녀원장갈릴레오집안의 산보자들132억 년에 대한 말씀2008 푸른 트럭시조3. 검은제비나비나는 나비의 이름 1나는 나비의 이름 2나는 나비의 이름 3검은제비나비 1검은제비나비 2검은제비나비 34. 공중전화의 생활난사과나무의 불안마음에 대한 보고서인생내 소남무 숲공중전화의 생활난숲길여의도성모병원나는 우산을 모른다\’불행 중 불행\’의 목록을 작성해 보시길태양이 궁금하다1999년의 \’목욕탕의 詩\’와 2002년의 \’목욕탕의 詩\’, 그리고 \’또 하나의 詩\’5. 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춤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8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7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6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5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4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3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2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1수리산에서ㅡ노자의 가르침 0땅 하늘 오줌 똥6. 아포리즘.기타
죽음이라는 존재의 유한성에 기인한 시 세계 “균열된 폴리포니 시대의 잿빛 레퀴엠”이라는 조정권 시인의 평처럼 박찬일의 시는 이 세상의 부정적인 것 ― 죽음, 고통, 불안, 상처 등 ― 에 대해 진지하다.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한순간의 위트 섞인 반전과 블랙 유머 들을 통해 행(幸)이 불행으로, 축복이 고통으로, 삶이 죽음으로, 영원이 단절로 이행되어 버린다.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모자나무」), “천천히 사라져 간다”(「유리창 모자」)처럼 그는 인간의 유한함, 삶의 불완전함과 덧없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의 마지막 행에 슬쩍 가져다 놓음으로써 변증을 시도한다. 이는 시인의 대상(세계)에 대한 관찰이 시대의 현실, 삶, 나아가 자신의 존재론적 조건을 허무하고 비극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마음에 대한 보고서」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나를 여태까지 키운 것은 불안이었다”, “따지고 보면 다 세끼 불안 먹자고 하는 짓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서 있는 모든 것은 눕고 싶어 한다. 맞는 말이다. 불안이다. / 서 있는 모든 것은 누울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중력이다. // 불안에 시달리다가 중력으로 끝난다. – 「인생」 전문위의 시 「인생」에 따르면 서 있는 모든 것은 눕고 싶어 하고, 누울 수 있다. 도식적으로 볼 때 서 있는 것이 삶을 뜻한다면, 눕는다는 것은 죽음을 뜻할 것이다. 시인은 삶은 곧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고 불안에 시달리다가 결국 중력으로 끝난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눕고 싶어 하”는 지향성과 함께 “누울 수 있다”는 선택의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불안하고 유한한 삶을 사는 개체이지만 인간만큼은 죽음 자체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에는 다른 개체와는 다른 고유성과 특별함이 부여된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 혹은 죽음에 이르는 방식의 중요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물의 생장 활동을 포함한 삶에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삶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마지막 순간, 즉 ‘죽음’이라는 시간의 유한성에 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박찬일 식의 허무와 덧없음의 블랙 유머생명 가진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삶에의 의지가 함께하건 함께하지 않건 간에 생존 본능에 충실한 치열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비를 보면서 감탄하는 이유 또한 연약한 두 날개를 쉼 없이 팔랑거리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만발한 꽃과 꽃 사이를 쉼 없이 날아다니기 때문일 것이다. 땅에 두 발을 붙이고 걸어 다녀야 하는 인간과 달리 나비는 그 연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두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나비를 보며, 사람들은 도달하지 못할 파라다이스를 꿈꾸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대상에 대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선의 뒤집기를 시도한다는 점에 박찬일 시의 묘미가 있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하늘하늘 날아다니다가 / 하늘 바깥을 궁금해하다가 / 평생을 다 보낸 자 // 하늘 아래 것을 다 놓친 자 // 물구덩이에 빠졌다 / 물구덩이에 하늘이 비치고 있다 // 나비의 원수는 날개 / 나비의 원수는 하늘 – 「나는 나비의 이름1」 전문나비를 한순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나비를 아름다운 생명체로 보이게 만들고 나비에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유를 주었던 날개이다. 하늘 바깥이 궁금해 하늘을 날던 나비를 하늘로 착각하여 물구덩이에 빠지게 한 것은 나비의 본능이요, 빠진 물구덩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바로 나비에게 좀 전까지 자유를 주었던 두 “날개”인 것이다. 최대의 자랑거리이자, 포식자에게서 안전을 확보하게 했던 두 날개는 알고 보니 “나비의 원수”였으며, 나비가 좇던 파라다이스인 하늘 역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가 되어버린다. 이처럼 생명을 유지하게 했던 날개가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시의 마지막 반전과 아이러니는 “하늘만 보던 사람인데 / 늙어서야 땅을 본다.”(「수녀원장」)나 “죽은 나무가 나무다. / 영원히 나무다.”(「죽은 나무가 나무다」)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박찬일 식의 삶의 허무와 덧없음에 기인한 블랙 유머라고 할 수 있다.이렇게 박찬일 시인은 삶의 어쩔 수 없는 균열(죽음, 불안, 고통 등)을 직관하고 성찰함으로써, 그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마련해 주고 있다. 그가 구사하는 반전의 변증법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아 시 해석을 쉽지 않게 하지만 반대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여러 잠언 중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죽음과 對面하며 사는 것이므로 죽음에 반항하는 태도이다.”(아포리즘ㆍ기타 9), “불안과 우울은 주체의 불안과 우울이다. 주체가 없으면 불안과 우울도 없다. ‘주체 부정’은 ‘병’의 치유에 도움이 된다.”(아포리즘ㆍ기타 32) 등의 문장은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 추천사 박찬일의 시는 균열된 폴리포니 시대의 잿빛 레퀴엠이다. 반주 없이 부르는 이 아카펠라는 실존의 상처를 위무하는 찬트가 아니다. “불행 중 불행은 / 불행하게 사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 졌다는 것”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 박찬일의 시는 고통을 요구한다. 물기 어린 서정을 드러내 온 재래적 시 쓰기에서 볼 때 불기 한 점 없는 언어로 추위와 불안과 고통을 강요하는 시는 낯설다. 이 낯설음은 오늘의 시에 대한 낯설음이지만 충격이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불행이 인간의 전 재산이라는 듯 불행의 목록을 가득 펼쳐 보인다. 인간은 트럭에 실려 불행에 딸려가도록 되어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시 「모자나무」에서처럼 드러누울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는 주검들을 가지 위에 걸어놓고 도처에서 자신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있다. 이 의도적 죽음의 진술들은 초기 「나비를 보는 고통」 연작이나 「팔당대교 이야기」에서의 추락처럼 강박적이고, 최근의(「철제다리」의) ‘철제다리 6번’ 위에서처럼 자발적이고 충격적이다. 이 자발적 죽음에 대한 선언은 시적 자아가 저항해 온 세상의 단단함에 부딪혀 균열과 파편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의 모든 시에 등장하는 ‘있다’ ‘없다’ ‘싫다’ ‘아니다’ ‘않는다’ 등의 부정어법의 교묘한 반복으로 인해 더욱 견고 지향성을 지닌다 할 수 있다.― 조정권(시인)박찬일의 시는 객관적 묘사의 시도 주관적 진술의 시도 아니다. 객관적 묘사처럼 보이는 데선 풍자하고 자조하고 주장하고 깨닫고 있으며, 주관적인 진술처럼 보이는 데선 자신의 일상을 꼼꼼히 기록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의 객관적 묘사에 대한 주관적 비틀음은, 세계의 중성적 외관 뒤에 버림받은 자, 추락한 자, 가난한 자의 설움과 애환이 준동하고 있음을 실감케 하며, 그의 주관적 진술에 대한 객관적 기록은 시인이 세계에 대한 울분이나 불만 대신 존재증명에 실패한 자의 전말기를 쓰고 있음을 가리킨다. 왜 그렇게 하는가? 무엇보다도 시인이 인간의 존재해야 할 이유를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두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과연 몰락한 뒤에도 왜 삶은 계속되는가? 존재증명에 실패한 뒤에도 왜 존재는 존재하는가? 그것에 답을 주려면 어쨌든 존재증명에 실패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는 쉬운 시가 아니다. 난해한 시도 아니다. 그의 시는 절실한 시다. 세계의 의미 없음에 이미 절망한 자가 여전히 세계의 의미를 묻는 방식으로 그것을 복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정과리(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