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문화관광부 교양도서 선정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3」을, 2002년 《시평》에 「수락산」외 5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곽효환 시인의 첫 시집 『인디오 여인』이 출간되었다. 총 67편의 시로 구성된 그의 시집은 “사람과 사물과 풍경의 서사를 서정 위에 담는 데” 성공한 아주 특별하고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기성 시인 어느 누구도 쉽게 도달하지 못한 곳 — 서정과 서사의 조화로운 결합 지점 — 에 한발 먼저 가까이 다가섰기 때문이다. 또한 곽효환은 시의 대상과 무대(영역)에 한정을 두지 않고 그의 시선이 간 곳이라면 어느 방향, 어떤 지점이든지 그곳의 모든 사물의 현상과 풍경의 영역으로 시적 대상을 확장하여 그곳에서 발견한 특수성을 통해 오히려 인간과 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성을 읽는 데 탁월함을 보여준다.
늦지 않았는가. 오랫동안 그물처럼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화두이다. 그래서 늘 두려웠다. 몇 번을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과 풍경의 서사가 보이기 시작했다.이 시편들은 내 몸을 부리고 살았던 시대의 중심과 주변에 대한 비망록이다.중심에 선 사람들, 중심에서 주변으로 혹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옮겨 선 사람들, 내내 주변에 머문 사람들 그리고 내 시선이 머물렀던 곳과 사람들에 대한. — 자서(自序) 전문사람과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서사와 서정의 조화로운 시학“몇 번을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과 풍경의 서사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말한다. 이 하나의 문장에서 우리는 남보다 늦게 시 쓰기를 시작한 데 대한 시인의 내외적 두려움과 망설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넘쳐 오르던 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시인은 그를 망설이게 했던 모든 사념까지도 승화시켜 토해 낸 자신의 시가 추구하는 궁극적 미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단언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서정과 서사를 서로 다른 쪽에 놓인 문학적 본질로 인식해 왔다. 서정과 서사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추구하는 게 문학의 큰 갈래였다면 서정ㆍ서사를 동시에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는 기성 시인들과 독자들에게 시 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과 논란을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또한 시의 가장 중요한 속성 내지 본질이라고 인식되어 온 그동안의 전통적 서정시의 시적 대상이 대체로 자연에 한정된 데 비하여, 현대 시의 다양한 조류는 오히려 그를 탈피하는 데 치중해 온 시점에서 주변과 일상의 사사로운 것에서부터 거대한 우주까지 모든 대상을 시 영역으로 확장한 곽효환의 시 쓰기는 각별하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정환 시인은 “시의 풍경화를 보는 것은 드물게도 즐거운 경험”이라고 말하며, 곽효환의 시 「천수만에서」를 “뒤늦음의 미학”이라고 절찬한 바 있다.아직 가을은 오지 않았는데 / 여름이 남기고 간 상처가 곳곳에 패어 있다 / 천수만 너머 저편에 군락을 이룬 억새들이 / 씨앗 뭉치를 입에 물고 / 바람을 따라 출렁이며 위태롭게 몸을 흔드는데 / 아직 새 떼는 오지 않았다 / 둥지 잃은 텃새들이 드문 드문 모여 / 이제 곧 가을이라고 이제 가을이라고 / 다 잊어버리라고 모두 떨쳐버리라고 / 비에 젖은 날개를 털고 있다 / 아, 비린 바다 내음 — 「천수만에서」전문김정환은 1행과 2행 사이 “아직 오지 않은 가을”과 “여름이 남기고 간 상처” 사이가 절묘한 ‘뒤늦음=미학’의 공간이라고 본다. 그 공간이 상처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형상화하고(“패어 있다”) 3행과 4행, 그리고 6행을 자연—공간의 역동으로써, 인간—생애화한다고 본다.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더 깊은 ‘뒤늦음=미학’의 공간(“아직 새 떼는 오지 않았다”)이 시간으로 제시되고 이어지는 행의 “드문 드문”이 그 모든 것을 “공간=풍경=생애화”한다는 게 김정환의 설명이다. 특히 마지막 행은 ‘시의 풍경’ 혹은 “시=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즉 김정환은 “언어=삶=풍경”의 중첩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우리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는 시편곽효환의 시에서 돋보이는 점은 주변의 사사로운 것(그래서 언뜻 소박해 보일 수도 있지만)에까지 눈길을 주어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는 시인의 폭넓은 세계 인식과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타에 대한 끝없는 탐구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오래된 우물」을 살펴보자. “16층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몸을 던진 “초로의 사내”의 죽음이 시인의 마음을 움직여 말을 하게 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시에 대해 황규관 시인은 “이 하나의 사건에서 시인의 눈빛은 그의 죽음 자체에 가 있다기보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계적인 일상으로 복원해 내는 도시의 ‘놀라운 진위성’에 닿아 있으며, 그에 대해 통분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이와 같은 예리한 통찰과 비판의 시각은 여러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정릉동 천주교회 성자상을 보며 써 내려간 「품」과 한국의 5월 혁명에 대해 언급한 「가라 80년」이나 「한 대학교수의 시국선언」처럼 시인의 감상이 시대의 격변과 함께 맞이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서글픈 질타와 쓸쓸한 고독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세상에 수고하고 피로하고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아 / 다 내게로 오라 / 내 앞을 가로지른 거대한 고가차도, / 차도 위의 자본주의적 존재양식 / 그 무한 속도로 인하여 / 내 더 이상 너희에게 갈 수 없나니 / 한 발짝도 뗄 수 없나니 — 「품」에서 지독한 두통이다 / … / 이 참을 수 없는 고통 /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 / 이젠 가라 / 80년 / 영영 가라 / 5월에도 끓지 않는 피 — 「가라 80년」에서「폭설」이나 「언제 다시 보자는 말」 등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시인 자신의 삶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폭설」의 예를 들면, 종일토록 눈이 내려 현대 사회의 정신없는 시간의 수레바퀴 안에서 간신히 쳇바퀴 돌기를 멈추고 예상치 못한 자연의 힘으로 하던 일에서 잠시나마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시인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시인은 삶이 바빠 “모두를 한동안 잊고 살았나 보다”고 미안함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다시 한번 이 눈 속에서 밤새 뒹굴자”고 잊고 살았던 시간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적어놓는다.30여 년 만의 폭설 그 시간의 벽을 뚫고 / 이제야 그에게로 간다 / 하늘엔 눈 가득하고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늘 / 너에게로 간다 // … / 일그러진 몸둥이에 담긴 상처받은 영혼 / 숨죽인 심장 고동 소리 / 어느 것 하나 상처가 아닌 게 없음을 / 어느 것 하나 그리움이 아닌 게 없음을 / 모두를 한동안 잊고 살았나 보다 — 「폭설」에서눈과 귀를 활짝 열어놓고 길을 따라 찬찬히 걷는 나그네 시인작품 해설에서 유종호(문학평론가)가 말했듯이 곽효환 시인이 간 길은 나그네 길이며,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다. 처음에 “길을 잃고 버려지고 싶다 / 아득히 잊혀지고 싶다”(「길을 잃다」)던 시인은 인생은 나그네 삶이란 본성을 따라 가던 길을 멈추지 아니한다. 시인(나그네)은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서 본 고골리와 마야코프스키의 묘를 얘기하고 고리키 세계문학 연구소 소속 고려인 노 교수의 일생을 축약해 들려준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만난 레닌 분장의 사내와 초여름에 털모자를 들고 호객하는 청년들을 얘기한다. 또 학생의 지탄을 받은 뒤 내용에 상관없이 모든 시국선언에 서명하는, 이제는 고인이 된 80년대의 대학교수를 얘기한다. 그러다 시인은 다시 길을 잃기도 한다. 조국에서든 타국에서든 우리가 나그네 길에서 보는 것은 전에 본 것과는 다른 길이요 산이요 사람이요 음식이다. 그 길에서 우리가 보게 되고 만나게 되는 것은 모두 우연의 소치이다. 사람들은 집을 떠나 나그네 길에 나서고 싶어 한다. 신선한 미지와 기막힌 우연에 대한 갈구가 가슴을 설레게 하기 때문이다. 삶 자체가 출발지와 종착지가 있는 여행이기 때문에 우리는 미지와 우연 사이를 기대와 호기심에 차서 항상적으로 걸어가고 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나그네의 눈과 귀는 특수 속에서 보편을 보고 듣는다.— 「작품 해설」에서시인의 발이 닿는 곳은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여행길이며 고행길이기도 하고 삶 자체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즉 서사와 서정을 동시에 담으려 했던 시인에게 있어 낯선 풍경과 문화는 모두 각별한 은유와 상징성을 지닌다. 곽효환은 삶의 복잡 다난한 일상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현상의 본질에 대한 진솔한 탐구로부터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부연하면, 삶이 나그네 길이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아스텍 문명지에서 “군옥수수를 파는 인디오 여인”과 우연히 조우하면서 그녀에게서 그늘진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해 낸다든지, 쿠바 리브레를 마시는 쿠바인들이 말하는 “자유”와 “행복의 감각”에 대해 착잡한 심정을 표현하는가 하면, 테오티우아칸 가는 길에서 만난 도시빈민의 숲 “거리의 아이들”의 절망 속에서 꿈과 전설을 찾고, 모스크바에서 만난 택시 운전사와의 대화 중에 빙그레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곽효환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자신도 어느새 한 사람의 나그네가 되어 풍경 안에 놓인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는 사람이나 건물만이 아니라 바람이나 그림자까지도 모두가 삶 자체로 승화된다.
자서 길을 잃다 서사시 읽는 겨울밤 거지들 저울 알랭 로브그리예 군옥수수를 파는 인디오 여인 헤밍웨이를 닮은 사람들 쿠바 리브레 나는 기쁘다 테오티우아칸 가는 길 황량한 벌판 위의 성당 맨발의 천사 모스크바의 택시 운전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붉은 화살 텔레그라프에서 만난 사람 1 텔레그라프에서 만난 사람 2 텔레그라프에서 만난 사람 3 상식의 두 얼굴 백야 그녀와 함께 중세로 가면 불러다오 그리움의 내력 지우개 백두고원 재북인사묘역 굴뚝 위에 둥지 물 길러 가는 길 산 뒷산에서 길을 잃다 다시 무건리에서 수락산 카페 재클린 겨울로 가는 포구 천수만에서 순천만에서 수련 분교 아이들 다시 순천만에서 흰 철쭉 입하 서리 뒤에 가을꽃 봄나무 아래 가을을 심은 날 그해 여름 독도 앞 바다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무더위 風磬, 諷經 그리고 風景 꽃들, 길 위에 눕다 부끄러움에 대하여 품 가라 80년 야간열차에서 만난 사람 첼로를 위한 변명 삼척항에서 고래를 보았다 중선암 그를 찾아가는 길 남성극장에 관한 추억 옛날처럼 한 대학교수의 시국선언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기차를 타고 슬픈 겨울 폭설 아주 오래된 우물 자살에 관하여 언제 다시 보자는 말 내 안의 풀꽃들, 풀꽃들 어머니, 나흘간의 외출 새 차 산 날 작품 해설 : 나그네의 눈으로 / 유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