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소연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6년 1월 30일
ISBN: 978-89-374-0739-0
패키지: 변형판 124x210 · 116쪽
가격: 12,000원
시리즈: 민음의 시 131
분야 민음의 시 13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 우수문학도서 선정김소연의 시에서는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들의 그물망으로 포획된 존재와 사물들의 실존이 섬세한 은유의 직물로 구성된다. 이 직물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와 사물들의 빛은 강렬하고도 매혹적이지만,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이 빛의 배후에 똬리 틀고 있는 어떤 어둠의 흔적을, 다시 말해 존재를 감싸고 있는 비가시적인 배경과 배후를 향한다. 이 시집을 관류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가 ‘그림자’라는 사실이 이 같은 시선을 입증한다. 그리고, 새삼 말할 것도 없이, 그림자는 빛이 조각한 어둠의 얼굴이라고 해야 한다. 시인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자체로는 ‘표정’이 없고 어떤 ‘자세’만 갖는 비가시성을 특징으로 삼는다. 그림자가 갖는 이러한 비가시적 특성은 오로지 빛을 통해서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은폐된 진리의 역설적인 존재 방식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도 또한 진실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빛이야말로 이 세계 속의 존재와 사물들에 투사해놓은 자신의 실존을 오로지 이 같은 어둠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떻게든 입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둠과 그림자가 없다면, 가시적인 존재와 사물들이 어찌 빛의 산물임을 우리가 알 수 있겠는가? 김소연의 시는 이 빛과 어둠이 몸을 섞고 있는 그림자의 이미지를 통해 삶의 표면과 배후를 연결하는 그 어떤 세계의 비의에 접근해간다. 첫 시집에서 보여 주었던 싱싱한 언어 감각은 이제 이 빛과 어둠으로 직조된 삶과 존재의 비의를 향해 촉수를 뻗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이 삶의 비의를 촉지해내는 저 촉수의 이름이 사랑임을,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성공적으로 입증해낸다. – 김진수(문학평론가)
I. 달팽이 뿔 위에서 달팽이 뿔 위에서 빛의 모퉁이에서 자유로 짝사랑 이단(異端) 오래되어도 모르다 당신의 아홉 번의 윤회 시인 지렁이 씨 저녁 11월 영혼의 새
II. 우리의 귀에 새순이 날 때까지는 보은(報恩) 진달래 시첩 행복한 봄날 목련나무가 있던 골목 이다음에 커서 나는 십일월의 여자들 그날이 그날 같았네 이 순간, 옷장 속의 사자와 마녀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III. 흔적 당신의 혀를 노래하다 내가 부모 되어 알아보리라 너의 눈 일요일 순도 손톱달 흔적 상쾌함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강릉, 7번 국도
IV. 불귀 추억은 추억하는 자를 날마다 계몽한다 불귀 1 불귀 2 화진포, 7번 국도 불귀 4 불귀 5 불귀 6 불귀 7 불귀 8 불귀 9
V. 적막과 햇빛 사이 기일(忌日) 정지 봄날은 간다 파란 바께스 하나 온기 술자리 가족사진 서커스 나무 그림자 안에 내 그림자 적막과 햇빛 사이
산문 – 그림자論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한 시인 김소연이 첫 시집 『극에 달하다』(1996) 이후 꼭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민음사에서 출간했다. 민음의 시 131번이 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는 총 5부 50편의 시와 산문 「그림자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당 10편의 시를 배치하는,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90년대 젊은 시인들>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한 좌담(1998)에서 오형엽은 김소연에 대하여 “<새로운 존재론적 인식>의 계보에 첨가할 만한 젊은 시인”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선, 10년이 지난 지금 여기, 김소연의 두 번째 시집은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들의 그물망으로 포획된 존재와 사물들의 실존이 섬세한 은유의 직물로 구성되어 (…) 이제 이 빛과 어둠으로 직조된 삶과 존재의 비의를 향해 촉수를 뻗치고” 있다. ■ 그림자론(論) 1 ― 시 쓰는 일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것시집의 맨 마지막에 배치된 산문 「그림자론」을 먼저 살펴보는 것은, “이 시집을 관류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가 ‘그림자’라는 사실”인 까닭이며, 이 세상에 빛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동시에 사물들로 이 세상이 채워져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그림자이다. 그림자 없는 사물들은 실감을 확보하질 못한다. (…) 직진하고자 하는 빛의 결곡한 욕망을 사물들은 완강히 가로막는다. 그때 그 자리에 그림자가 생긴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빛이 사물에게 진 자리에 그림자가 맺힌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자는 빛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묵언의 말을 건네고 있다. (…) 시 역시 그림자와 같지 않을까. 빛의 방향과 사물의 모서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계에 현현해 있는 모든 현란한 것들의 표정을 지우고, 그 자세만을 담으려 한다는 점에서. 시 쓰는 일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이다. 빛은 어깨 뒤에 있고 그림자는 내 앞에 있을 때에 시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 「그림자論」 위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자론’ 그 자체가 김소연의 시론(詩論)이자 시작법(詩作法)인 까닭이다. 그림자는 “빛과 사물의 관계”를 침묵으로 말해 준다. 그렇게 시와 닮은 그림자를 앞에 두기 위하여, 빛을 등 뒤에 두고서, 김소연은 그림자를 말하기 시작한다. ■ 그림자론(論) 2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그림자는, 어떤 자세에서부터 시작된다. 김진수의 표현대로, 그림자는 자세를 통해서만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비가시성”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 「빛의 모퉁이에서」 그 자세는 빛을 등진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빛을 등진 곳에서 그림자가 지기 때문이다. 이를 김소연은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빛이 사물에게 진 자리”로 표현한다. 그는 “아득한 빛”을 등지고 앉아 “뒤에 두고 온 것들”을 노래한다. 뒤에 두고 온 것들이 너무 많았네 해 지는 쪽을 등지고 앉은 사람처럼 그 뒤의 아득한 빛들이 당신을 비추고 있었네― 「그날이 그날 같았네」그림자와 같은 시를 쓰기를 거부하는 시인, 즉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지독하게” 환한 빛으로 인하여 밤-어둠으로 이끌려가게 되는 역설을 겪는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 「빛의 모퉁이에서」■ 사랑의 흔적 ― 불귀(不歸),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그림자와 같은 시를 쓰기를 거부하는 시인, 즉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지독하게” 환한 빛으로 인하여 밤-어둠으로 이끌려가게 되는 역설을 겪는다.사랑의 가역 작용―그래도 미숙한 질료인 마음에는 흔적이 남네 생각하고 생각하여 상처 내지 흉터라 부르지 않고 흔적이라 불러보네 ― 「흔적」 한 사람이 달을 베고 누워 있다 심장을 훤하게 켜놓은 채 반듯하게 누워 있다 (…) // 누군가 늑골에 손을 넣어 두꺼비집을 내린다― 「불귀 6」 ■ 적막과 햇빛 사이 ― 지금은 시를 쓸 시간 햇빛이 난간에 매달린 적막을 떼어낼 때 세상이 살아 있다는 건 모두 거짓말, 떨어지며 절규하는 적막 덕분에 고막이 터진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적막과 햇빛 사이」 시인은 ‘순간’과 연애하는 자들이다.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지각할 뿐 아니라 그 흐름의 어느 한 때를 떼어내서 그 시간과 노닥거리며 수작하는 자들이다. 이 시인은 지금 어떤 순간과 연애하고 있는가. 가끔 방 안에 ‘푸르스름한 적막’만이 자욱할 때가 있다. 햇빛이 잠깐 자취를 감추어서 예기치 못한 적막과 고요를 선사하는 그 때다. “고요해서 다 들리는 시간”이고 “적막해서 다 보이는 시간”이다. 시인은 아예 이 시간과 차 한 잔 하고 있다. “침묵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이 순간들이, 침묵함으로써 돌아앉아 시를 써온 나와 함께, 찻숟가락을 입에 물고 마주보며 웃는다.” 아마 이럴 때 김시습도 시를 썼겠지, 홍랑 매창 옥봉 같은 이들도 그랬겠지.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글쎄, 왜 아니겠는가. (「2005년 제4분기 문예지 게재 우수문학작품 선정평」 중에서) 그림자가 진 적요함 속에 시가 흐른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아니 시를 읽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