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원재길이 15년 만에 귀환한 시의 본령
말[言]과 절[寺]이 만나는 곳. 속됨과 성스러움, 인간과 신들이 어울려 노는 자리. 하늘과 대지와 물과 바람, 목소리와 악기와 춤과 이미지와 풀냄새와 육향, 깃털과 피와 뼈와 꿈과 환상을 골고루 섞어서 젓는 반죽기. 인간 표현의 맨 윗자리. 에너지의 농축. -작가의 말에서
원재길 시집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은 1988년 첫 시집 『지금 눈물을 묻고 있는 자들』을 내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후 15년 만의 시집이다. 그동안 여러 권의 장편소설과 소설집, 우화소설과 산문집을 출간하고 번역까지 겸하며 전방위 작가로 알려진 원재길의 새 시집은 현실에서 입은 상처를 담담하게 다스리면서 신생(新生)의 삶을 회복하고 외부와의 새로운 교감을 모색하는 반성과 성찰의 시편들로 꾸며졌다. 15년 만에 출발점인 시로 돌아와, 시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문학 세계를 열어가는 의미가 담긴 시집이다.
『나는 걷는다……』은 일상의 작은 사물들과 자연 현상의 미세한 변화를 예민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1부와 ‘젊은 날의 여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시인의 젊은 날을 숲을 가로지르는 산책으로 형상화한 장시 「겨울에서 봄으로」의 2부로 나뉜다. 생의 고통, 현실의 아픔을 온몸으로 민감하게 느끼면서도, 감정을 토로하지 않고 마치 구경꾼이 지나가며 던지는 말처럼 무심하고 허허로운, 때로는 유머러스한 시인의 어법은 내면의 상처를 다스리고 치유하는 방식이 된다.
일상 속에 숨은 까마득한 틈 1부에 실린 작품들은 일견 고즈넉하고 아무 일 없어 보이는 일상의 풍경을 제재로 삼는다. 시인의 시선 또한 산책자의 그것처럼 무심하고 가볍다. 「휴일」의 고요한 한낮 풍경, 「여우비」나 「폭설」에서 보이는 기상의 변화, 「모자」나 「붉은 흙」, 「중년」이 그리는 일상의 주변 모습은 특별한 심상이나 기교를 배제한 채 자연스럽고 담백한 서술이 주조가 된다. 극적인 면을 자제하는 대신 작은 파문을 던지는 구절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빛의 시인인 당신늘 잘 읽고 있습니다.지상의 행복은 하루하루 지워지고사람과 잘 섞여지지 않는 날엔당신을 꺼내 읽습니다.가끔 이해할 수 없는 구절도 있어왜 큰키나무들이 별안간 넘어가고바닥까지 강은 말라 터지는지폭풍은 때 없이 닥치며일시에 많은 죽음사실 시란 어느 정도난해한 것이겠지요 ―「나무 그늘에 누워」중
기상의 변화로 은유된 갑작스러운 삶의 불행은 시인에게 마치 ‘난해시처럼’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유머러스한 진술은 눈앞의 변화를 과장하거나 쉽게 비관하지 않고 차분히 바라본다면 결국 “큰 주제”를 읽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금언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현실의 삶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모순 속에서 어떻게 삶의 이 “큰 주제”를 읽어 낼 것인가에 시인은 집중한다.
바다 건너 광장에서포성이 울렸다(중략)별안간 많은 청년이 죽고비 그친 담벼락 밑어지러이 흩어진 꽃잎을 본다(중략)시원시원 흔들리며머리 풀어 말리는 나무들―「비 그친 뒤」 중
현실의 폭력과 무심하게 흔들릴 뿐인 나무들로 상징되는 상처와 풍경의 기이한 공존은 이밖에도 「바람의 집」, 「강」, 「급사」 등에서 예고 없이 닥친 불행,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삶의 근원적인 불가해성으로 나타난다.
틈 사이에서 피어나는 생명
납득할 수 없는 삶의 불행에 대처하는 시인의 태도는 낙천주의라는 우회로를 택한다. 그것은 때로 반문의 형태로, 혹은 동문서답식의 형태로 등장한다.
난 너무 일찍 수화되었어좀 더 익었으면 했어신이 서두른 까닭은 무얼까(중략)너는 아주 잘못 산 경우는 아냐하루 더 살며 나빠지는 사람이얼마나 많은데?살아보니 행복이었니?―「푸른 낯」 중 나는 내 식으로 춤춘다 떠도는 꼴 생겨 먹은 대로 나무는 나무의 마음 시간은 시간의 성깔대로 찬 가로등 불빛 아래 털썩 뼈 풀어 놓고 손발 멋대로 흔들며 마냥 ―「낙천주의자」중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삶의 평면에 나 있는 온갖 틈을 불행의 근원으로만 보는 시각을 달리한다면 전체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평탄한 일상을 방해하는 틈은 이제 갇힌 현실을 뚫고 희망의 싹을 틔우는 장소가 된다.
죽은 지 일 년도 더 지나서몇 번 내버리려다가 놔둔 행운목오늘 아침 별안간웬 싹이 쑥스스로 연둣빛 광휘에 눈 비비며반역처럼 올라왔다(중략)언제 안 아픈 적 있었니?지상에 죽음 아니었던 날 기억나니?그렇게 물으며조용조용 콧노래 흥얼거리며―「싹」 중
이제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중심어 ‘생명스러움’이 등장한다. 최근 서울 생활을 접고 강원도 원주로 칩거한 시인의 근황과 무관치 않아 보이는 이 조어는 일상의 주변과 전원 풍경, 역사적 비극과 아픈 추억까지 아우르며 작품 곳곳에서 얼굴을 내미는 “큰 그림”이다.
괜찮아생명스러운 것들별일 아닐 거야,br> 잠깐 빗줄기에 멍드는 뜰날리기 무섭게 내려앉는 흙먼지모든 건 잠깐 지나가는악몽의 배경일 뿐―「여우비」중
일순간 나의 책상에서몇 권의 얕은 사상이 기우뚱거렸다목 움츠리고 다시 내다볼 때어느새 날 저물어연장 챙겨 돌아서며김 올리는 어깻죽지 ―「노동의 힘」중
지하 방에서 죽을 순 없다곰팡내 나는 삶뿌리째 캐서 볕 아래옮겨 심고 싶다 ―「블로크 시 」아, 나는 미친 듯이 살고 싶다」에 바침」 중
삶과 시의 거처로서의 \’사이\’
틈에서 피어나는 생명스러움은 2부의 장시 「겨울에서 봄으로」의 마지막에서 절정에 달한다. 온갖 초목과 쓰레기 더미, 날벌레, 나무와 공터까지 뭇 존재의 사이에 생명과 시, 시인 자신의 거처가 있음을 발견한다. 시란 곧 “말[言]과 절[寺]이 만나는 곳. 속됨과 성스러움, 인간과 신들이 어울려 노는 자리.”라는 시인의 깨달음은 삶과 시가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생성되는 것이라는 강한 울림을 던진다.
* 원재길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연세대 사학과와 같은 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첫 시집 『지금 눈물을 묻고 있는 자들』을 냈고, 1993년 장편소설 『겉옷과 속옷』을 발표하며 시인과 소설가의 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겉옷과 속옷』, 『그 여자를 찾아가는 여행』, 『오해』, 『모닥불을 밟아라』, 『적들의 사랑 이야기』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누이의 방』,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 등이 있다. 이밖에 우화소설 『별똥별』, 산문집 『올빼미』 등을 냈으며 『연어와 여행하는 법』, 『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 『꿈의 비밀』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나는 걷는다……』은 15년 만에 내는 두 번째 시집이다.
1부 휴일 여우비나무 그늘에 누워 폭설 아침 풍경 모자(母子) 비 그친 뒤 바람의 집 강 붉은 흙 중년 급사(急死) 누이 숙면 눈 푸른 낯 밀애 결혼 노동의 힘 들리는 소리 낙천주의자 산자락 3월 블로크 시 \’아, 나는 미친 듯이 살고 싶다\’에 바침 물속 풍경 싹 가족 나들이 통원 치료 환청 명옥헌(鳴玉軒) 시가 마르는 까닭 산에서 길을 잃다 싸락눈 속도광 안부 편지 물의 끝 2부 겨울에서 봄으로 – 젊은 날의 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