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승훈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2년 6월 15일
ISBN: 978-89-374-0703-1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96쪽
가격: 9,000원
시리즈: 민음의 시 109
분야 민음의 시 109
나의 무가치가 나의 가치이고, 나의 무의미가 나의 의미이다. 나도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도 내가 쓴 시를 모르고,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해할 게 없으므로. -이승훈
1서울에 오는 눈 | 천진 | 창문 | 해는 짧다 | 진여 | 비 | 연꽃 옆에 | 한 송이 꽃 | 새떼부질없는 시 | 일월 | 꽃 피기 전에 | 벽도 없고 문도 없다 | 밝은 거울 | 이른 봄날 | 봄눈해는 뜨고 달은 진다 | 저녁 | 밖에서 찾지 말라 | 그대로 두어라 | 봄이 가네 2뗏목의 추위 | 거울 | 말의 사랑 | 잠자리 한 마리 | 물고기 주둥이 | 이슬 | 사자 새끼 술집 | 흐린 하늘 | 풀 한 포기 | 무심한 창문 | 풀잎 끝에 이슬 | 비둘기 한 마리 | 시밤이슬 | 마음 | 저 바람 때문에 | 문을 열고 나가지만 | 꿈같은 소리 | 다시 왕십리 간판만 눈부신 거리여 | 밤비 | 허송세월 | 봄 | 사랑3언어 2 | 사물의 편에서 | 한때 | 나 없이 쓰기 | 떠돌이 언어여 | 시 | 유희 | 언어놀이언어 1 | 생각 하나에 대한 애정 | 밝은 날 | 서초동에 머물며 | 시 | 언어 서방시는 나쁜 장르이다 | 시 | 인생 | 오늘 부는 바람 | 나도 긴 의자에 누워
시 쓰기와 인생의 본질에 대한 명상
시인 이승훈 교수의 신작 시집 『인생』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시 쓰기와 인생의 본질에 대한 중견 시인의 성찰이 담긴 65편의 시들을 묶은 시집이다. 이승훈 시인은 초기에 극도로 난해하기까지 한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며 치열하게 \”나란 무엇인가?\”의 문제에 천착했던 시인이다. 그런 시인이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이르러 맞닥뜨린 것은, \”나는 없다, 모든 것은 허상이다.\”라는 깨달음이었다. 이 일면 허망하기도 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시인은 시와 인생에 대한 엄숙할 정도로 진지한 명상적인 시들을 선보인다.
나도 거울 당신도 거울 저 산도 거울입니다 거울 사막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거울이 생각합니다 거울이 나입니다오늘도 선풍기 하나 틀어 놓고 거울 속에에서 거울이 나라는 거울에 대해 논문을쓰지만 이 놈의 더위 이놈의 더위
거울인 걸 모르고 미욱한 나는 아직도거울 속에서 나를 찾아 헤매고 담배를피우고 차를 마시고 문득 이 차 한 잔이거울입니다 모두가 거울입니다 그러므로거울 생각도 버리고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머물지 마시오 거울은 세계입니다저 거울이 나요 이 시는 거울이 쓰는 시입니다―「거울」
『인생』에는 이처럼 사각의 틀 모양을 한 시들이 여러 편 있다. 마치 사진이나 그림이 정해진 크기의 액자나 종이 안에서 표현되듯, 언어를 사각의 틀 속에 가두어 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문학의 언어는 사각의 종이 안에 표현되지만, 다른 어떤 표현보다 자유롭다. 시의 언어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훈 시인은 시를 다시 사각의 틀 속에 집어넣는 실험을 하고 있다. \”거울이 나\”이고 \”거울이 세상\”이고 이 시도 \”거울이 쓰는 시\”라는 말은, 나도 세상도 시도 본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허상이라는 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허상이며, 시인이 그토록 찾던 \”나\”라는 존재도 허상이다.―이것이 이승훈 시인이 자아 탐구를 주제로 한 40년 가까운 세월의 시작(詩作) 생활 끝에 마주하게 된 깨달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자마자, 오히려 시인은 언어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사각의 틀에 갇혀서도 시의 언어는 자유롭듯, 거울에 갇힌 존재 역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허망한 깨달음으로부터 시 쓰기 혹은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고 사물과 나, 시어와 시의 조화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아무것도 없으므로 모두가 있\”(「사자 새끼」)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승훈 시인의 이러한 시적 실험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그의 시 쓰기는 자신을 드러내는 또 다른 언어 운용 방법이며, 시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윤여탁)이 된다.
무엇보다 『인생』은 제목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시인의 인생에 대한 쓸쓸한 반추가 여러 곳에 스며 있다. \”언제나 날씨는 춥고/ 따뜻하고 다시 춥고/ 인생에선 이런 게 중요하다/ 인생엔 아무 뜻도 없으므로\”(「인생」), \”……그동안 내가 부른 노래는/ 모래 그리고 나도 모래야 그러나 당신은/ 모래에 물을 주지\”(「허송세월」) 등 어느 순간 세어 버린 흰 머리에 놀라며 헛되이 보낸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허송세월\”했다고 시인은 한탄하지만, 『인생』은 오랜 세월 시를 가지고 구도(求道)한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존재와 삶 그리고 시(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묻어난다. \”잠자리 한 마리\”, \”풀 한 포기\”, \”비둘기 한 마리\”도 사물과 인간사에 대한 성찰의 열린 매개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승훈
1942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으나 박목월 선생의 권유로 국문과로 전과했다. 졸업 후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이상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 1학년 때인 1961년에 박목월 선생의 추천으로《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자아 탐구를 주제로 일관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초기에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극도로 난해한 시들을 쓰기도 했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존재의 문제를 오랜 동안 다룬 끝에 다다른 것은 \”나는 없다.\”는 결론으로, 현재는 대승불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無住)\”, 즉 \”머무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다\”라는 말은 이번 시집의 주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시집 『사물A』, 『환상의 다리』, 『당신의 방』, 『너라는 환상』, 『밝은 방』, 『나는 사랑한다』, 『너라는 햇빛』 등이 있고, 시론집 『시론』, 『비대상』, 『모더니즘 시론』,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해체시론』, 『한국 현대시론사』, 『한국 모더니즘시사』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