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40대 배문성 시인은 중년에 드는 길목에서 시를 통해 자신이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배문성 시인은 또한 독자에게도 각자의 삶을 정리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시인의 친구 이문재 시인은 이렇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내 오랜 친구 배문성의 시를 읽으며, 나는 내 삶을 정돈할 수 있었다.ㅡ독자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시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삶을 영위하지 못했다는 자기 진단이 그 정돈의 핵심이다. (……) 내가 삶을 누리지 못하는 동안, 삶은 나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마흔 몇이라는 생애의 귀퉁이가 벌써 나달나달해진 것 같다.\” 희망이란 때론 사람을 얼마나 추하게 만드는 것인지 네가 사십대에 이르기까지 깨끗한 영혼을 가지려면 희망을 갖지 않을 것 아예 그 싹도 보이지 않게 와장창 절망해 버릴 것 그것이 이 땅에서 희망을 갖는 유일한 길이다 ㅡ「희망에 대하여」중에서 시인은 특히 거울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키워 가려 했던 어릴 적의 모습은 상실하고, 자신이 그토록 닮지 않으려 했던 지난날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 너머 감춰진 탐욕스런 아집이 담긴 눈빛 영락없는 아버지가 그 거울 속에 계셨다. (……) 아마 나의 아들도 나를 닮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40이 될 무렵이면 아이도 나를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비켜갈 수 없는 전승이 그 거울에 박혀 있었다. ㅡ「40세」중에서 떠나간 사람에 대한 추억과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 배문성 시인의 시에는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나온다. 그 사건과 배문성 시의 관게에 대해 이문재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내 친구의 기억은 아버지이고 추억은 \’분열증을 낳은 산행\’이다. 유년기에 이미 반면교사로 결정(기억)된 아버지. 시인에게 아버지는 \’나에게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성년 이유 시인은 평생 끝나지 않을 \’산행\’ㅡ선배와 함께 지리산에 올랐다가, 악천후를 만나 그 선배를 잃었다.ㅡ을 추억하며 살아간다.\” 지나친 나무와 바위, 산 아래 달려가는 바람, 그 사이로 피어오르던 안개구름, 언뜻 비치는 햇살, 잠시 땅에 누워 하늘을 보면 햇살에 비친 나뭇잎이 겹치고 겹쳐서 가느다란 빛의 통로를 열어주던…… 앞서가는 친구가 남긴 세찬 숨소리, 벌거벗은 사내들의 등을 때리던 하얀 물줄기, 무심하게 물위 여기저기 다니며 더 이상 날갯짓을 하지 않던 잠자리들의 주검, 철 지나 고동색으로 썩어가던 산목련, 연보라 채 익지 않은 산국과 키 큰 고사리잎, 초롱꽃, 산나리, 키를 넘는 조릿대 그늘에 숨어 있던 뱀 지나가는 소리, 산 너머로 가득 채운 먹장구름, 언뜻 빛을 내고 사라지는 번개, 발아래 찢어지고 있는 번개를 내려다보는 두려움, 드러누우면 온몸에 쏟아지는 별들, 북두칠성과, 그 사이로 지나가던 야간 비행기의 안전등, 그래 인공위성과 샛별, 카시오페이아, 동트기 전에 남동쪽 하늘에 잠 못 이루게 하던 기슭에서 올라오던 산바람 소리 기억에는 사실은 사라지고 느낌만 남아 있습니다앙상하지만 증거처럼 박혀 있는 인상만 있지요중요한 것은 앙상하게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분열 산행기」중에서 시인의 작품에는 이러한 오래된 경험이 기억이라기보다는 느낌으로 남아 있다. 선배를 잃은 사건은 시인의 인생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한다. 즉 살아남은 자로서 부끄럽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이 시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시인 개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을까그리고 누가 저 별빛 어디에네가 숨어 있는지 찾고 싶었다사라지지 않고어딘가 숨어 있으리라내가 눈을 감을 때만 나타나나를 보고 있을 너를 나도 보고 싶었다 ――「달맞이 꽃」중에서
용서를 구하지만 화해해 줄 타자가 없는 외로운 삶
배문성 시인의 시에는 기다림에 지친 외로움이 강하게 배어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오지 않는다. 시인은 <겨울이 다 가고서야 나는 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나는 왜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을까/사실 나는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노을의 집」에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혼자 남아서 삶을 살아가는 심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잊어버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잊으려고 사는 것이,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사무치는 일이다네 앞에서저렇게 물들고 있는 노을 앞에서들어가지도 못하고돌아서지도 못하고남아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미치는 일이다 ―― 「노을 앞에서」중에서 이문재 시인은 이러한 기다림의 정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배문성 시의 화자에게는 속죄하고 화해해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을 내밀며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타자가 없으므로, ‘이제 그만 됐다’라며 품을 열어 줄 타자가 없으므로 시의 화자에게 화해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러니 그에게 기억과 추억은 천형이다. 그에게는 살아 있기 그 자체가 천형이다. 천형을 받은 자의, 치사량에 가까운 외로움은 세상에서 저녁만을 본다. 아니, 세상의 저녁만을 살아 내고자 한다.\”나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평생을 미안해하면서 살아야 되겠죠사월에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세상 모든 것을 다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기억들이 나뭇잎마다 가득한 거지요하나씩 둘씩 떨어지는 겁니다 ――「숲」중에서시인의 외로움은 누구도 동참해 줄 수 없는 경험이다. 그러나 배문성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외로움으로 승화시켜서 독자를 자신의 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 배문성
1958년 부산 출생. 1982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당신들 속을로』 출간. 현재 문화일보 기자.
1부제비꽃 | 노을의 집 | 가을의 집 | 악몽 | 저 가을 속으로 | 동행 | 그늘 | 숲에서 | 붉은 새애인 | 배웅 | 노을 속으로 | 노을 앞에서 | 숲에 누워 | 희망에 대하여 | 숲 | 뛰어내리는 것들추억에게2부별제사 | 느티나무 | 걷는다 | 잠자리와 함께 진다 | 분열 산행기 | 운다 | 권기돈에게 | 사진 한 장40세 | 옛 사람에게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나? | 배 위에서의 정사 | 사내들의 우리 집3부봄길 | 먼길 | 먼먼 길 | 파도 | 자장가, 혹은 악몽, 아니면 추억 | 까마귀가 할퀴다내게는 꿈이 하나 있었는데 | 별 | 달맞이 꽃 | 저 별빛 속으로 | 대화 | 숨 | 극락 앞에서자해 | 웃는 사람 | 파랑새 | 등산 | 꽃이라고 말하는 너에게 | 진달래 | 나는 불량해서 좋다타자를 위한 기도 | 수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