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는 정통 집시의 영혼에서 흘러나온 충만한 악절처럼, 미묘하고 아름답고 미끄럽다. 어둡게 타오르다 스러지는 청춘의 재처럼, 모든 경험의 끝인 슬픔처럼.- 허혜정(시인, 문학평론가)
『단편들』(1997)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 이후 발표된 그의 시편들은 서정시의 계보이기도 하며 해체주의적 메타언어의 실험시 전략을 더욱 공고히 갖추기도 한다. 총 4부로 나누어서 선보이는 이번 시집의 시편들은, \”\’정통 집시\’의 영혼에서 흘러나온 충만한 악절처럼\”(허혜정) 울린다.이미지, 모티프, 복선을 깨뜨리는 독특하고 확산적인 문법의 시박정대 시인은 때로는 언어를 아끼지 않고 주절대는 듯, 때로는 극도로 언어를 아끼는 듯한 시작 태도를 지닌다. 그때의 언어들은 시인이 바라보는ㆍ드러내는 세계의 이미지를 그려 내는 데 족하다. 다만 시인은 이미지들과 모티프들의 존재의 문법을 지키지 않는다. 허혜정은 \”삶의 지배 문법으로 주어져 있는 연대기적 질서의 단선성을 해체하며, 현재나 과거의 시점에 구애 받지 않는 심리적 풍경에 작은 통로를 뚫어 놓는다.\”고 하였다. 촛불, 눈물, 음악, 페루, 나비의 경계, 달, 불꽃, 술, 담배, 달빛 등 자주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다양한 변주를 통해 의미를 새롭게 하는 방식. 이러한 방식을 통해 시인은 도달할 수 없는 영원성과 동시에 순간성의 박제를 그려 낸다. 그렇다면 시인이 그려 내고자 하는 도달할 수 없는 생(生)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시간이 무한히 반복ㆍ순환한다는 인식, 공간이 무한히 확대ㆍ정지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그 \”근원적 삶에 회귀하지 않는다\”. 시인은 어쩌면 우리의 영혼과 숨결이 일순간 머물렀던 \”사라진 모든 장소\”의 이름, 혹은 언젠가 음악을 들으며 서 있던 그 나무, 그 장소, 그 얼굴들을 그린다. 하지만, 그 \”환상의 도시\”에서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때 나는 정말 \’길 위에\’ 있었고, 당신은 아마 천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때 천사에게 가는 길이 아니었다\”(「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시인은 그 장소에 머무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서 기억과 추억의 반추 작용을 하면서 \”고요한 혁명\”(이재복)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시인이 바라보는 무시간성ㆍ무공간성의 세계는 \”경계\”의 시학과 맞닿아 있다. 이 경계성은 무엇과 무엇의 \”사이\”라는 의미로도, 무엇과 무엇의 \”겹침\”으로도 해석된다. 「열두 개의 촛불……」을 쓰는 동안, 시인은 줄곧 어떤 경계에 대하여 생각했다 한다. 바람과 바람의 경계, 나무와 땅의 경계, 그리고 열두 개의 촛불과 그대 한숨의 경계, 그러다가 시인은 어떤 나뭇잎 천사의 도움으로 \”벽파령\”이라는 데 이르렀다. 나는 열두 개의 촛불이 다 꺼진 다음에야 가까스로 타오르는 하나의 거대한 촛불을 보았다.\”벽파령\” 산정에서 만난 것은 열두 개의 촛불이 다 꺼진 다음에 가까스로 타오르는 \”달\”이었다는 시인의 후기에서 드러나듯이, 이것은 \”불가해한 현실은 꿈과 같은 것\”이라는 보르헤스적인 환상적 세계 인식을 보여 준다. 시인의 \”경계의 시학\”은 다른 모습으로도 표출된다. 시인이 반복ㆍ중첩해서 사용하는 이미지와 모티프들은 명상적ㆍ환상적 알레고리 수법을 주로 사용하였던 보르헤스의 후기 미니 소설의 작법과 유사하다. 푸른 호랑이의 모티프를 통해 드러내려 한 대상에 대한 허무적 인식이나,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 \”아침가리\”라는 패러디 혹은 모티프 차용을 통한 환상적 현실의 반추 역시 시인이 앞선 전위주의자들의 작법에 기대어 시작(詩作)을 한 흔적이다. 시인은 공공연히 리차드 브라우티건, 황지우, 로맹 가리, 보르헤스, 로르카, 짐 자무시, 폴 발레리 등의 글이나 이미지가 자신의 시에서 원형 그대로 혹은 \”훼손\”되어 인용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이 점을 통해 시인은 또 하나의 경계에 선 셈이다. 앞선 전위주의자들과 자신의 시작에서의 접점, 기존의 이미지와 자신이 그려 내고자 한 세계와의 접점, 장르 교차나 장르 변용을 통한 패러디와 메타시 사이의 접점의 경계에 말이다. 늘 \”존재의 문법으로 주어져 있는 세계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박정대 시인의 시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시적 문법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촛불의 시간, 내 마음의 우주 속을 떠도는 격렬비열도, 허무의 풍경 위에 놓여 있는 범선 한 척, 우연의 음악, 포르투갈 집시의 노래, 푸른 호랑이, 끝, 미완성의 시간, 음악의 시간, 육체의 시간, 촛불의 시간,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 음악 같은 눈, 비정성시, 해금 산조, 음악의 성분, 체 게바라, 게릴라, 꿈의 세계, 서울의 폭설, 자본주의적 폭설, 고통의 세기, 피의 냄새, 부조리한 세계, 불멸의 음악, 검은 점들의 혹성, 검은 새 한 마리, 수정의 겨울제4부를 이루는 장시 「음악들」은 서너 행이 한 장을 이루어 모두 91장으로 되어 있다. 긴 시의 각 장에서 나오는 이미지들과 모티프들은 위와 같이, 저 폐허와 같은 도시에 존재하는ㆍ시인이 구축하는 환상 도시를 구성하는 성분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변주하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통해 영원성과 순간성, 자아와 혼돈, 근원과 무한성의 근저를 탐색하고자 하는 것이다.박정대 시인의 시편들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탐색하기 위한 데 맞추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형이상학적 주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연시(戀詩)처럼 읽히게 한다는 점에 이 시편들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시인의 시 세계에는 깊은 서정적 울림이 있다. 시인이 자서에서 \”나는, 여전히 사막이다, 사막의 음악이다\”라고 한 것처럼, 그는 사막에서 삶과 시를 길어올리는 악사(樂士)인 것이다.시인은, 끊임없이 변조음을 만들어 내는 촛불의 음악과도 같은, 영원성의 심저에 도착했다가도 또 다른 생이 피어오르는 푸른 길의 유혹과도 같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 인간이 다시 되찾고자 하는 세계의 꿈과도 같은, \”\’정통 집시\’의 영혼에서 흘러나온 충만한 악절\” 같은, 그런 시를 쓰고 있다.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 장만옥 /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의 술고래 낚시 / 무가당 담배 클럽의 기타 연주자들 / 무가당 담배 클럽과 바람의 국경선 / 안개 속의 쓸쓸함, 1997년의 핀볼을 기록함 / 내 생애 마지막 개기일식 / 뼈아픈 후회 / 달 / 푸른 돛배 / 혜화동, 검은 돛배 / 해변의 욕조 / 나는 음악처럼 떠난다 / 리고 그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 버찌 / 동정없는 세상 / 슬픈 열대야 / 목련통신 / 앵두꽃을 찾아서 / 영원의 거리에서의 송어 낚시, 133분 40초 / 소금쟁이 검객들의 이야기 / 시베리아 검객들의 이야기 / 아침가리,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 / 근위병과 게릴라들 / 홍명희 생가 /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 중세의 가을 / 백년 동안의 가을 / 백두산 꿈을 꾸었다 / 너 / 피의 적군파 / 은척에서 / 모래군의 열두 달 / 집으로 가는 길 / 하얀 돛배 / 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 / 지구의 북호텔에서 / 자작나무 뱀파이어 / 12월, 방랑자여 슈파로 가려는가 / 누가 이렇게 잠드는가 / 겨울 부석사 / 음악들 / 눈 내리는 밤 / 음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