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
이수명은 우리 문학을 설명하는 다른 문법을 통해 주목받아야 할 시인이다. 그녀의 시들이 구사하는 눈부신 감각의 언어들은 우리 시의 또 다른 풍요로움이라고 말해야 할 곳에 위치한 반란이다.- 신철하(문학평론가)
이수명은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하여 1995년 첫 시집『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1998년『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를 출간하면서 문단에 새롭고 독특한 이미지를 불어넣는 시인으로 자리 매김되었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 폐쇄적이고 파편화된 현실에 주목하면서 그로 인해 개인이 처하게 된 절망적 상황을 이질적인 문법으로 표현하였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그간 보여 주었던 파격과 이질성을 한껏 밀어 올린다.
닫힌 세계에 대한 개인의 감정적 반응은 완고하게 거세된 채 \”차갑게 발음되는 어휘들, 간결하고 완강한 문장, 금속의 기계음에 가까운 어조\”, 환유와 은유의 비약적인 자리바꿈은 의미론적 단절을 넘어서 불가해한 느낌마저 준다. 이 불가해한 느낌은 다른 말로 바꾸자면 익숙하지 않다, 새롭다는 것인데 사실 새롭다는 말만으론 부족하다. 이수명의 시는 \”우리 시의 주류가 행해온 시적 문법과는 훨씬 다른 위치에 자리하고 있\”(신철하)으며 \”모더니즘의 생장 한계선에서 자생하는 극지식물에 비유될 수 있다\”-김수이
소통 불가능한 현실을 향한 어두운 환상곡
각각의 시는 대부분 제목 「케익」, 「오렌지 먹는 사람들」, 「그네」, 「공원에서」, 「일요일」, 「공놀이」, 「세수」 등에서 보듯 분명 일상에서 출발하지만 시로 완성된 편편은 전혀 예기치 않은 이미지를 도출한다. 각각의 이미지는 연속성이나 맥락 없이 나열되는 동시에 폐쇄적이다.
공원에 앉아 있었다. 거리는 모두 증발했다. 공중에 떠 있는 건물들이 서로 부딪혔다. 나는 도피중인 수목들을 표시했다. 내가 상속한 이 수목들을 모두 잊었다. 숲의 은유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사건들은 점점 흐려졌다. 흐려지고 비슷해졌다. 나를 데려가주오. 빛이 중얼거렸다. 빛이 없는 곳에서 빛이 중얼거렸다. -「공원에서」중에서
나무는 땅을 버리고 \”도피중\”이고 건물들은 서로 맞부딪치며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일상의 장면들은 점점 흐려지면서 빛을 잃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배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간의 흐름이 뒤엉켜 있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심지어 \”빛이 없는 곳에서 빛이 중얼거리는\” 현상마저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현실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그것은 현실과 존재 간의 괴리가 빚어낸 착란적인 환상이다. 또한 그것은 시인 자신이 편입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존재가 제기하는 이의\”이며 자신만의 세계를 향한 슬픈 꿈이다. 그 꿈이 슬픈 이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갈망이기 때문이다. 가령 시에 등장하는 \”그\”로 대표되는 3인칭 화자들은 이 환각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복귀하기 위해 달리고 달리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한다.
그는 달린다. 원 밖으로 달린다. 운동장 밖으로, 자신이 높이 날려보낸 그의 얼굴 밖으로 달린다. 그는 달아난다.// 죽을힘을 다하여 그는 작아진다.// 그는 쓰러진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에워싼다. 그리고 목에// 그의 얼굴을 걸어준다. -「야구 선수 K」중에서
고전주의적 문체와 포스트모던한 의식의 교차
시적 자아는 환상을 통해 그 견고한 현실의 틈새를 확인하려 하지만 \”그\”의 시도에서 보듯 \”나\” 또한 이 닫힌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어디에서나 현실이라는 세계 공간의 \”밖\”에 있으며 심지어 집에서조차 나는 \”집 밖\”에 있다. 그것은 이 무시간의, 무의미한 세계에서 \”나\”가 갖는 유일한 확신이다. 그 확신을 바탕으로 시인은 단절된 이미지의 나열과 의미론적인 파격에도 불구하고 문법상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용의 파괴는 있어도 형식의 파괴는 없다. 그와 같이 고전주의적 문체와 포스트모던한 의식이 교차되는 이수명의 언어는 깊은 미로를 헤매며 자기에의 실종과 발견을 되풀이하는 혼란을 보여 주었지만 문법적으로는 정확하고 견고한 문장을 보여 주었던 카프카의 언어와 유사하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기둥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땅에까지 닿는 긴 그물을 들고 있었다. 나는 내 집에서 나가달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곳은 당신 집이 아니오. 그가 말했다. 이곳은 당신 집 밖이오. 하고 그는 말하더니 친절하게 덧붙혔다. 집은 없소. 집 밖이 있을 뿐이오. 아무도 당신 집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오. 침입자는 그물을 폈다. 그리고 나를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침입자」 전문
불모의 세계에서 코드 찾기
출구이자 입구인 하나의 코드를 한 몸에 지닌 채 탈주와 편입이 동시에 진행되는 현실 세계, 그곳에서 출구를 찾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현실을 향해 끊임없이 구애의 손길을 뻗는다.
나는 내가 보낸 밀정을 살해했다. 또 다른 밀정을 보내서. 내가 제2, 제3의 밀정을 보냈을 때, 내가 내 밀정의 밀정이 되어 사라지기 전, 나는 바다가 환한 불빛을 달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바다의 프리즘」중에서
이 절체절명의 구애의 행위에는 시적 기교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철저한 부정적인 세계 인식과 화해 불가능하다는 단호한 확신이 시인의 상상력과 만나 그로테스크하게 현실을 되비출 뿐이다. 어떤 장식적인 어법도 소용없이 오로지 자신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현실에서 시적인 것을, 시적인 것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을 환기시키는 이수명의 시에서 시적인 것과 현실은 서로 구분될 수 없으며 시인은 국외자적인 감정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 그것이 이수명의 시를 밀고 나가는 힘이다.
이번 시집에서 독자는 그 각고의 시작 과정을 목격하면서 닫힌 세계에 흠집을 내고 침묵하는 한 존재의 준열한 시 정신을 만날 수 있다.
1부 케익 / 살인자들 / 가든 파티 / 새와 함께 / 테니스 써클 / 밧줄 / 대화법 / 트럼펫 / 유리 끼우기 / 구경꾼 / 공원에서 / 장미 한 다발 / 신사와 식사 / 푸른 사과 / 첼제 의자 / 야구 선수 K / 나는 고양이와 회의를 한다 / 칼 / 나의 식물 / 소풍 / 프로그램 / 검은 자동차 / 민들레 총 / 부서진 계단 / 앉아 있는 새 /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2부 무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 바다의 프리즘 / 붉은 담장의 커브 / 침입자 / 정원사 / 벽지 / 오렌지 먹는 사람들 / 오렌지 나무의 농담 / 나무 소에서 피리를 불었다 / 호도나무를 베다 / 그의 초승달 / 흉기 / 모래주머니 / 달패이 시계 / 식당에서 / 나는 나뭇잎을 물고 / 숲을 지나가는 법 / 안내 / 나의 연주 / 그네 / 얼음의 세목 / 먹구름 / 해바라기 / 늙은 빵 / 일요일 / 호수 / 벌레 / 연분홍 타이어 / 나무젓가락 / 잠 / 나는 너의 방을 노랗게 칠한다 / 어항 / 공놀이 / 세수 / 태양과의 통화 / 지하실 / 인조 과일 / 화물 열차 / 망고 / 벌목꾼들 / 그가 유리를 닦을 때 / 못 / 얼굴 / 검은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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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담장의 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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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 2015.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