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중견 시인 문정희의 신작 시집
문정희의 시들은 내 속에,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그러나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몸의 음악”이다. – 이문재(시인)
문정희 시인의 신작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문정희 시인은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30년이 넘는 창작 생활 동안 서른 권에 가까운 저서를 펴내는 등 풍요로운 집필 이력을 지닌 대표적인 중견 시인으로, 이번 시집은 1996년에 출간한 『남자를 위하여』 이후 지난 5년 동안 쓴 시들을 묶은 것이다.
생(生)을 극복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피를 흘리고 목이 졸린다. 이 시들에서는 우선 \”가시\”와 \”무덤\”과 \”사약\”이 험상궂게,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길이라는 게 \”시 몇 편\”일 뿐이다. 올가미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약하기만 하다. 위태롭기 그지없다.그리하여 이 시들이 스스로 일상의 반란이 되어, 지나가는 객(客)에게 다가오는 밤, \”감옥\”에서 \”별!\”을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시인이 다시 탄생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순간이다. 인간의 여자가 있고, 분노를 삭인 언어가 있다. 회한과 모순을 보듬어 안은 사랑이 있다. – 윤후명(소설가)
삶의 모순과 존재의 아픔으로 엮어낸 시린 사랑 노래
「알몸 노래」, 「오라, 거짓 사랑아」, 「콧수염 달린 남자가」, 「길 물어보기」의 모두 4부로 나뉘어 있는 『오라, 거짓 사랑아』는 중년에 이른 시인의 일상과 인생에 관한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특유의 유연한 문체로 씌어진 시들은 모두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중견 시인이 살아온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실려 있다.
내가 만난 모든 장미에는/ 가시가 있었다/ 먹이를 물고 보면 거기에는 또/ 어김없이 낚싯바늘이 들어 있었다/ 안락하고 즐거운 나의 집 속에/ 무덤이 또한 들어 있었다-「통행세」중에서
시인에게 인생은 \”장미와 가시, 먹이와 낚싯바늘, 즐거운 나의 집과 무덤\”이 거울의 안과 밖처럼 공존하는 시공간이다. 또한 그의 몸속에는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들끓고 있다. 그야말로 인생의 슬픔과 존재의 모순을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모순을 피하지 않는다. 그대로 보듬어 안아 내 살〔肉〕로 만들려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 시로써만 가능해진다. 그래서 문정희의 시는 그 누구의 시보다 깊은 아픔을 담고 있으며 또한 기이하게 따뜻하다.
문정희의 시편들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아직 젊은 나도 얼른 나이 들고 싶다. \”출렁이는 자유와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으로 식탁을 차리고, 도대체 천 년이란 세월이 넓이인지, 깊이인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다. 대관절 그 시공간 안에 무엇이 들어 있어, 너와 나를, 그리고 이 삶인 것들을 고통의 미로 속을 헤매게 하는 것인지, 헤아려 보고 싶은 것이다. 한 걸음 늦게 가는 여자가 두 걸음 앞서가는 시인으로 환생하는 이 놀라운 \”장면 전환\”이라니. 그토록 오랜 상처를, 우리 주위에 늘 자욱한 도처의 상처를, 그토록 가벼운 프로필로 포착해 내는 시인의 \”가을\”이, 시인의 \”몸\”이 시리도록 눈부시다. 눈이 부셔 슬프고, 슬퍼서 종내는,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들어간 빙초산만큼 자극적이다. 삶인 것들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리하여 문정희의 시들은 내 속에,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그러나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몸의 음악\”이다. -이문재(시인)
중견 시인의 원숙한 시선 속에 드러나는 참된 깊이
특히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시인의 뼈아픈 회한이다. 어느 날 병원의 차디찬 검사대 위에 올라서서 마주하게 된 자신의 \”축 늘어진 슬픈 유방\”(「유방」). 그것은 그동안 나의 유방은 남편의 것, 아이들의 것이었을 뿐, 나의 것은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던진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도 시시때때로 \”세월의 생생함과 세월의 헛됨\”을 한번에 느끼게 한다. 그런데 어느새 불모의 땅이 되어 버린 나의 유방, 나의 몸, 나아가 나의 정신에 대한 아픈 깨달음은 곧바로 진정한 나와 오롯이 대면하는 기회가 된다.
목숨의 가장 낮은 심연에 정박하여/ 밤새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으로 내가 내 이름을 불러본다 -「겨울 입원」중에서
그후 시인은 거짓된 것이라도 사랑이 오기를 희구한다. 그것은 곧 불모의 존재가 되어 버린 자신을 스스로가 따뜻하게 껴안아 보려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그래서 슬며시 사라져 버린 삶이 자신의 내부에서 다시 한 번 꽃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헛된 바람이라 해도 상관없다.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좋아하는 시인에게는 사랑이 오기를 바라는 시간이야말로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과정이 문정희에게는 곧 시가 된다.그런데 문정희의 시들은 삶의 모순과 존재의 아픔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드러내지만 어디까지나 일상적인 소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문체는 유연하기 그지없다. 오랜 창작 생활이 가져온 중견 시인의 원숙함의 발로일 것이다. 그 나이의 시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서둘러 도통(道通)함을 지어내지 않는 까닭에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응축된 삶의 적나라한 아픔에는 참된 깊이가 내재해 있다.
* 문정희
시인 문정희는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여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이후, 현대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1995년 미국 아이오와 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했다. 현재 동국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찔레』,『아우내의 새』,『남자를 위하여』등을 비롯하여, 시선집 『어린 사랑에게』외, 시극집 『도미』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1. 알몸 노래통행세 | 러브호텔 | 머리 감는 여자 | 키 큰 남자를 보면 | 정물화 속에서 | 유방보라색 여름바지 | 가을 우체국 | 알몸 노래 | 나목을 위하여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몸이 큰 여자2. 오라, 거짓 사랑아술 | 아름다운 곳 | 밤(栗) 이야기 | 버들강아지 | 사과를 먹듯이 | 어떤 선물 | 물개의 집에서평화로운 풍경 | 분수 | 첫눈 온 날 | 겨울 입원 | 가을산 | 토요일 오후 | 민들레목련꽃 그늘 아래서 | 상처를 가진 사람 | 유쾌한 사랑을 위하여 | 부탁 | 축구 | 가을 상처3. 콧수염 달린 남자가할머니와 어머니 | 콧수염 달린 남자가 | 여성 작가의 손에 핀 저승꽃 | 그가 악수를 청해오면선글라스를 끼고 | 나의 혀 | 레즈비언 테레사 | 전구와 콘돔 | 새와 기숙사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 그리운 그녀 | 가야금, 그분 | 늙은 여자 | 붉은 무덤 얼굴에 달고흙호텔 | 시인의 집4. 길 물어보기길 물어보기 | 우리들의 주말 | 혹 | 한 사내를 만들었다 | 터미널호텔 | 비탈길 | 진짜 시이사 | 동행 | 낙상 | 촛불 한 개 | 거품 | 사진 찍는 남자 | 부끄러운 날바퀴벌레 한 마리도 똑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 | 너희들의 이름 | 나의 특강 | 배꼽나라그리운 까마귀 | 내가 찾은 골목 | 지는 꽃을 위하여 | 오빠 |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문정희의 시편들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아직 젊은 나도 얼른 나이 들고 싶다. “출렁이는 자유와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으로 식탁을 차리고, 도대체 천 년이란 세월이 넓이인지, 깊이인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다. 대관절 그 시공간 안에 무엇이 들어 있어, 너와 나를, 그리고 이 삶인 것들을 고통의 미로 속을 헤매게 하는 것인지, 헤아려 보고 싶은 것이다.
한 걸음 늦게 가는 여자가 두 걸음 앞서가는 시인으로 환생하는 이 놀라운 “장면 전환”이라니. 그토록 오랜 상처를, 우리 주위에 늘 자욱한 도처의 상처를, 그토록 가벼운 프로필로 포착해 내는 시인의 “가을”이, 시인의 “몸”이 시리도록 눈부시다. 눈이 부셔 슬프고, 슬퍼서 종내는,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들어간 빙초산만큼 자극적이다. 삶인 것들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리하여 문정희의 시들은 내 속에,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그러나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몸의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