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끝별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0년 5월 25일
ISBN: 978-89-374-0685-0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8x210 · 100쪽
가격: 10,000원
시리즈: 민음의 시 96
분야 민음의 시 96
88년《문학사상》신인상에 시가, 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 정끝별의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우리 문단의 30대 시인을 대표하는 정끝별은 이번 시집에서 리듬과 이미지가 충만한 시정으로 독특한 시 세계를 일구고 있다. 첫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이 적요하고 농밀한 내면의 산책 길을 열어 보이며 전통적인 시 가락의 현대적 변용을 시도했다면, 『흰 책』에서는 시인의 고통스러운 자기 부정 그리고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1밀물 | 흰 책 | 사랑 | 아我 집을 棺관통하다 | 지나가고 지나가는 1 | 동지 1 | 속 좋은 떡갈나무 | 떡갈나무 둥치와 숟가락 | 달집 | 우리 집에 온 곰 | 내 안 저놈들 | 동지 2 | 강진 편지 | 안개 속 풍경 | 늦여름 한 마당 | 얼굴을 파묻다 | 현 위의 인생 | 인디언 전사처럼 | 흰 거지 검은 거지 | 지나가고 지나가는 2 | 사람들은 물고기를 닮았다 2희망 | 만두 속 달팽이 | 더럭 터럭 | 이하동문 | 한 집 사랑 | 토정비결을 보다 | 두 문 두 집 | 전전긍긍 | 날아라! 원더 우먼 | 부기우기 뜨랄라 | 게임의 법칙 | 단풍 갈까? | 한 집 눈물 |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 집필을 선언한 시인 | 시인의 일식 | 길섶 꿈속 | 그리운 한 집3뒷심 | 블루 블루스 | 고집 | 흑백알락나비 | 독 | 무용가처럼 | 사랑새앵무 | 병들어 누울 역 | 관망 | 한마터면 | 손가락을 빨다 |기타를 부수다 |주차 정차 정사 | 안달복달 | 풍뎅이 | 울진에 울새 | 이력서를 쓰다 | 정글 1 | 옹관 3| 정글 2 | 동요動搖
1 『흰 책』 : 새로운 언어에 대한 열망
\”이 제목은 그동안 내가 붙들고 있었던 기존의 언어 혹은 기존의 시에 대한 도전이랄까 부정이랄까 하는 의미도 담고 있을 겁니다. 동시에 소멸, 부정, 거부, 도전의 맥락과 생성, 순수, 출발의 맥락을 함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제가 가까스로 매달려 있던 기존의 언어 혹은 기존의 시에 대한 거부이자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담고 싶었습니다.\” 라고 시인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번 시집은 미망처럼 사로잡혔던 기성의 언어들, 그 집착과 관성의 의미 더께를 걷어 내고 언어 그 자체로 환원된 새로운 시어들을 찾아 도약하려는 시인의 바람을 담고 있다.
흰 자모음을 두서없이 휘갈겨대는군요 바람이 가끔 문법을 일러주기도 합니다 아하 千軍萬馬라 써 있군요 누군가 백말떼 갈기를 마구 흔들어대는군요 희디흰 말털들이 부지런히 글자를 지우네요 아이구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떼떼로 몰려오는군요 흰 몸이 흰 몸을 붙들고 자면 사랑을 낳듯 흰 자음 옆에 흰 모음이 가만히 눕기만 해도 때때로 詩가 됩니다 (중략) 가갸거겨 강을 라랴러려 집을 하햐허혀 나무를 들었다 놓았다 한밤내 석봉이도 저렇게 글줄깨나 읽었을 겝니다 그밤내 불무 불무 불무야 (중략) 호호백발 두 母子가 꿈꾸었을 해피엔딩을 훔쳐 읽다 문득 자고 있는 아이놈 고추를 만져보는 기가 막힌 밤인 겝니다.
-「흰 책」에서
\”흰 자음 옆에 흰 모음이 가만히 눕기만 해도 때때로 시가 됩니다\”라는 구절은, 시를 이루는 것이 낱말의 의미가 아니라 언어의 자유로운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시인의 변화된 인식을 드러낸다. 이 낱말들의 무정형의 만남은 때로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와 같은 동요를, 때로는 \”가갸거겨 라랴러려…\”처럼 무의미한 자모의 나열을 낳기도 한다. 이렇듯 순수하게 환원된 언어들은, 시로부터 시인을 해방하고, 마침내는 \”호호백발 두 母子가 꿈꾸었을 해피엔딩을 훔쳐 읽다 문득 자고 있는 아이놈 고추를 만져보는 기가 막힌 밤인 겝니다. \”의 구절이 보여 주듯 소박하나마 행복한 시를 꿈꿀 수 있게 해 준다.
2 흐르는 농(膿,弄), 말(語), 되풀이
『세상 모든, 농과 되풀이를 위하여』라는 시인의 자서에서 드러나듯 이번 시집의 지배적인 심상은 단연 \”농(膿, 弄)\”과 \”되풀이\”라 할 것이다. 첫 시집에서 중심이 되었던 \”숲\”과 \”길\”의 테마는 보다 일상적인 차원의 삶으로 부대낀다. 일상을 이루는 것은 수많은 상처들이며 그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고름 즉 농(膿)이 언어화된 것이 장난짓거리 즉 농(弄)이며, 시(詩)는 이 농의 되풀이이다.
지나간다 한 사람 참 밤나무 꽃을 지나 벌써/ 너도 밤나무 열매와 나도 밤나무 그늘을 질러/ 지나간다 눈물샘 밑 한갓진 공터를 돌아/ 오래 지나온 길을 더듬어가는 뒷골몰에는/ 까악 깍 까치 집도 있다/ …..지나가는 청춘인가 싶은 저 폐허에게/ 지나가는 비를 껴안고 울먹이는 저 거리에게/ 한 사람을 막 지나가는 저 막막한 가로등에게/ …..성큼성큼 지나가고 지나가는/ 한 사람 안이 없어/ 잃어버릴 밖도 없다/ …../ 늘 밤나무 위 너도 올빼미 뒤/먼 달 아래 한 사람 지나가고 지나간다.
-「지나가고 지나가는 1」 중에서
정끝별 시의 독특한 가락을 느낄 수 있는 이 시는, 마지막까지 시집의 제목으로 \’흰 책\’과 겨룰 만큼 정끝별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시편이다. \”너도 밤나무 열매와 나도 밤나무 그늘을\” 질러가는 한 사람의 등 뒤에서 수없이 뜨고 지는 시간의 반복과 노래의 후렴구와 같은 삶의 무게를 감지할 수 있다. 김훈은 정끝별의 시가 보여 주는 이 \”되풀이\”의 풍경에서 삶에 대한 지독한 열망을 읽어 낸다.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열망을 추슬러서 세상 안으로 돌아와 자리잡을 때 정끝별의 시에는 물기가 번지고 리듬이 인다. 그 물기와 리듬이 세상을 견딜 만한 곳으로 바꾸어 주는데, 거기에는 여전히 세상 밖을 향한 열망이 살아 있다. 그가 말한 되풀이의 삶은 아마도 이러한 것이지 싶다. 아, 빼도 박도 못할 이 되풀이!\”반면 장석남은 이 농짓거리에 숨겨진 정끝별 시의 작은 저항을 간파한다. \”문학으로 또는 시로 \”세상을 바로 보자\”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때 농의 언어로 농의 환부를 싸매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사(近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정끝별의 언어는 일상 \”속\”의 환부를 어깃장으로 얼크러 놓기도 하고 때로는 다독임으로 쓸어안기도 한다. 이 농의 교란은 독자들의 눈을 끌어당겨 삶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만드는 또 하나의 창이다. 그 세계는 참으로 유니크하다.\”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시집 제목인 『흰 책』이 의미하는 것은 무얼까요?먼저 「흰 책」이라는 표제 시를 쓰게 된 동기부터 밝혀야겠네요. 이 시는 겨울밤, 그것도 흰 눈이 펑펑 내리는 한밤에 발상을 얻었습니다. 작업을 하다 베란다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보름달을 배경으로 눈이 너무도 소담하게 내리고 있었어요. 한낮처럼 환하더라고요. 눈 내리는 그 한밤의 풍경을 보는 순간, 이게 시(詩)구나, 하얀 시, 그것도 너무 자연스럽게 해피엔딩을 꿈꾸게 하는 시구나, 했더랬어요. 그 순간 제가 붙들고 있던 언어라는 게 남루하기 그지없더라고요. 그렇다면 이 제목은 그동안 내가 붙들고 있었던 기존의 언어 혹은 기존의 시에 대한 도전이랄까 부정이랄까 하는 의미도 어느 정도 담고 있을 겁니다. 또 한편으론 하얗게 지우고 새로 쓰고 싶은, 예를 들면 「해피엔딩」(이런 시어는 제가 무척 싫어했던, 또 낯설어 했던 단어였습니다만) 같은 걸 새로 꿈꾸어 보고 싶은 욕망을 담고 있기도 하죠. 그 이유는 아마도 흰색의 일반적인 특징과도 연결될 거라 생각합니다. 소멸, 부정, 거부, 도전의 맥락과 생성, 순수, 출발의 맥락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연상했으면 좋겠어요. 한마디로 제가 가까스로 매달려 있던 기존의 언어 혹은 기존의 시에 대한 거부이자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담고 싶었습니다.
이번 시집을 함축할 수 있는 표현이나 테마가 있다면 뭘까요? 「세상 모든,// 농(弄, 膿)과 되풀이(반복)을 위하여」라는 자서(自序)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환부에서 흘러나오는 고름(膿)을 농(弄)으로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지루하지 않게요. 빼도 박도 못하게 되풀이될 뿐인 세상 모든 되풀이의 삶을 되풀이되는 리듬으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유연하게요.
시집에 수록된 시들 가운데 자선작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겠습니까?시집의 첫 번째 시인 「밀물」과 표제 시 「흰 책」 그리고 「지나가고 지나가는」, 「속좋은 떡갈나무」, 「강진 편지」, 「동지」, 「아집을 관통하다」 등을 들고 싶은데요.
외람된 질문이지만 시(詩)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장르적 정의보다는 기능적 정의에서요. 글쎄요, 펑펑 눈 내리는 풍경을 보았을 때 우리의 마음이 풍요로워지듯 시란 때때로 우리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보았을 때 우리의 마음이 날카로워지듯 시란 때때로 인식의 힘과 행동을 가져다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시게 됐는데요, 감회를 말씀해 주십시오. 출산 예정일을 앞두고 있는 산모 마음이죠, 모든 엄마들은 똑똑하고 훌륭한 아이보다는 손가락, 발가락 제대로 갖춘 건강한 녀석만을 기원하게 되죠. 그 이상은 욕심이라는 겸손한 마음이 생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