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현종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3년 7월 26일
ISBN: 978-89-374-7302-9
패키지: 양장 · 46판 128x188mm · 204쪽
가격: 14,000원
시리즈: 오늘의 젊은 작가 2
분야 오늘의 젊은 작가 2
발행일 2013년 8월 9일 | 최종 업데이트 2013년 8월 9일 | ISBN 978-89-374-8727-9 | 가격 8,400원
오늘의 젊은 작가 02 문학성․다양성․참신성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이 펼쳐 가는 경장편 시리즈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
공부 기계가 살인 기계로 전도되다!
희세의 이야기꾼 오현종의 속도감과 영상미 넘치는 문체
평범한 재수생이 전략적 살인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역설적 성장 서사
세상에 대한 환멸을 부드러움으로 돌파하려는 주인공 ‘강지용’은 독특하다. 오현종은 매혹이라는 매우 주관적 사건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등장하는 어떤 인물에게도 특별히 동정하지 않고 연민을 끌어내지도 않는다. 정서도 서술도 압축되고 배제되어 있다. 이 새로운 시도와 서늘한 장치가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무척 기대된다.
―강유정(문학평론가)
프롤로그 7
모닥불은 춤춘다 11
봄 25
밤의 얼굴 47
분홍 신 55
셰리와 테리 83
부주의한 속삭임 89
컨베이어 벨트 105
스프링필드(Springfield) 117
골목의 안쪽 139
침사추이〔尖沙嘴〕 151
작가의 말 185
작품 해설
성 안토니우스의 십자가 아래서_ 권희철(문학평론가) 187
■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오현종
오현종은 “영상 문법에 바탕을 둔 속도감 있는 문장들”(문학평론가 손정수)로 “지금, 여기의 삶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희망을 계획으로 대체한 젊은이들의 삶을 목도”(문학평론가 강유정)하며 “그 속에 내장된 이데올로기들을 내파”(문학평론가 김형중)하는 영민한 작가다.
신작 『달고 차가운』은 매번 다양한 소재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 내면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헤치며 현대사회를 적나라하게 묘파하는 작가 오현종이 장편 『거룩한 속물들』 이후 3년 6개월 만에 내놓은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첫사랑에 빠진 평범한 재수생이 전략적 살인자가 되어 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그려 낸 『달고 차가운』은 오현종의 속도감과 흡입력, 영상미 넘치는 강렬한 서사의 힘을 통해 이 계절, 독자들을 ‘달고 차갑게’ 이끌어 갈 것이다.
민음사가 문학성․다양성․참신성을 기치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만을 엄선하여 출간하는 경장편 시리즈의 새로운 이름 ‘오늘의 젊은 작가’ 그 두 번째 작품으로 여기, 오현종 장편소설 『달고 차가운』을 선보인다.
■ 달고 부드러운, 그 일그러진 첫사랑의 비극과 역설적 성장 서사
—살인을 통한 입사 혹은 치명적 성장통
때로 어떤 체험은 인생의 지표를 바꾼다. 평범하고 소심한 재수생이었던 『달고 차가운』의 주인공 ‘강지용’은 인생의 낙인이 되어 지워지지 않을 첫사랑의 매력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첫사랑은 여태껏 자신의 욕망에 대해 단 한 번도 질문해 본 적 없는 무지의 상태에 가깝기에, 이율배반적으로 그토록 무지한 순수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체험을 통해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된다. 순수한 만큼 위험하고 파괴적일 수도 있는 나이, 스무 살의 강지용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용이 ‘민신혜’를 알게 된 순간, 그의 인생은 이제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해 간다. 예전의 그는 고작 어머니의 잔소리나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졌을 뿐이며, 그 자신은 살의에 가까울 정도의 반감이라 생각하지만 그마저도 입시를 치른 고교생치고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신혜를 만나 자신 안에 있던 추상적 반감을 살의라는 행위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지용에게 신혜는 생애 처음 만난 ‘부드러움’이고 ‘달콤함’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 누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부드러운’ 혹은 ‘달콤한’ 말을 해 준 적이 없으며, 재수생이라는 단일한 호명으로 묶어 버린 세상도 부드럽거나 달콤하지 않긴 매한가지다. 지용은 신혜를 통해 ‘부드러운’이라는, 그리고 ‘달콤한’이라는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신혜에게서 부드러움을 알게 된 순간처럼 지금 이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혜는 달콤한 사과를 건네주고, 내가 그것을 달게 먹고 나자 고통을 알게 하는 사과였다고 속삭인 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알았다 해도 나는 그것을 삼켰겠지. 나는 정말 어린아이였다. 그녀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그러나, 고통은 실상 사과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사과를 건넨 부드러운 손길로부터 온다는 진실만은 알았다.
(……)
베개에 등을 대고 기대어 있던 나는 신혜의 머리를 감싸 안고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불 밑은 그녀의 몸속처럼 부드럽고 안온했다. 나는 껍질을 벗긴 사과 알같이 달고 차가운 입술에 오래 입 맞추었다. 너무 달아서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과즙처럼 다디단 침을 빨아 먹다가, 어두운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73쪽
열한 살 어린 나이부터 성매매를 강요당했던 신혜를 가족이라는 지옥에서 구출하기 위해, 지용은 신혜의 엄마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전폭적 신뢰는 배반의 복선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절대적 세계가 되는 사랑의 맹목은 특수한 사태를 보편으로 오해하는 고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수 학원 옥상이 일탈의 전부였던 지용은 신혜를 만나 살인을 저지른 후 미국과 홍콩 침사추이까지 삶의 영역을 넓힌다. 넓어지는 공간만큼이나 세상에 대한 감정과 기대, 적의 역시 확장된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입시 교육은 살인 교육 이상으로 폭력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달고 차가운』에서 공부 기계가 살인 기계로 전도되는 순간 드러나는 두 메커니즘의 유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평범하다 못해 초라했던 주인공은 살인을 통해 가족, 사회를 전복하고 마침내 자신을 이끌어 낸 신혜의 진실까지 알아낸다. 그리고 파괴한 세상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알았던 부드러움과 달콤함도 가짜에 불과했음을 목격한다. 부드럽고 달콤한 세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작가 오현종은 이 소설에서 파괴적 본성이 주인공에게 내재되어 있던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사랑의 일그러진 방식을 통해 드러난 인물의 또 다른 모습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삶의 무수한 주름 속에 숨어 있는 비의를 죽 펼쳐 놓을 뿐이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내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심으로 후회한 적이 없”(166쪽)는 인물들은 쓰디쓰거나 다디단, 혹은 시디시거나 맵디매운 삶의 역설적이고도 강렬한, 그 피할 수 없는 맛으로 독자들을 맹렬하게 몰아넣는다. 이 첫사랑의 뒤틀린 방식이 가져온 파국을 한 번이라도 느끼고 맛본 독자들이라면 『달고 차가운』 그 중독성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선’이 잘려 나간 윤리적 판단의 성 안토니우스 십자가는 『달고 차가운』의 끔찍한 범죄가 죄의 값을 청산하거나 악을 극복하려는 태도에 대한 탐구로 전환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달고 차가운』이 보여 주는 속물들의 삶의 형식이다. 이 소설은 삶은 물론이거니와 변증법조차도 없는 속물들의 너절한 삶이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끝내 ‘선’이나 ‘구원’을 향해 움직이지도 않는 비참한 풍경만을 제시한다.
『달고 차가운』이 거대한 공백으로 제시하는 바람에 우리가 그 빈자리를 채워 넣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삶을 향한 쾌활한 의지, 쓰디쓴 뜨거움의 힘들. 이 작품이 침묵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권희철(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세상에 대한 환멸을 부드러움으로 돌파하려는 주인공 ‘강지용’은 독특하다. 지금껏 보았던 오현종의 소설 목록에 비해 문체나 분위기 역시 구분된다. 오현종은 매혹이라는 매우 주관적 사건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등장하는 어떤 인물에게도 특별히 동정하지 않고 따라서 연민을 끌어내지도 않는다. 정서도 서술도 압축되고 배제되어 있다. 이 새로운 시도와 서늘한 장치가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무척 기대된다.
―강유정(문학평론가)
■ 본문 중에서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아무도 아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나는 긴 이어폰 줄을 오른손에 돌려 감고 더욱 힘을 주었다. 왼손으로는 팽팽하게 당겨진 줄 끝에 달린 이어폰 한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솜이불 위로 여자의 어깨를 찍어 누른 두 무릎이 덜덜 흔들렸지만, 내 다리가 떨리는 탓인지 아니면 여자의 몸이 거세게 버둥대는 탓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든 간에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무릎에서부터 격렬한 살의가 차올랐다. 몸속을 순환하는 피가 뜨겁게 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숨이 잦아들수록 내 숨은 가쁘게 밀려 나왔다.
(……)
나는 요 위에 널브러져 조금씩 체온을 빼앗겨 갈 몸뚱어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이는 익숙한 목소리를 기억하려 애썼다. 같은 노래를 리플레이 하듯 되풀이해서 떠올렸다. 이어폰에서 노래가 흘러 들어오는 순간 세상의 소음이 딱 멈추었던 것처럼 한 사람의 목소리만 귓속을 울렸다. 부드러웠다.
실수를 하면 모두 끝이다. 다음 시험이란 없다. 꿈꾸었던 다른 삶도 없다. 여자의 몸 위에 솜이불을 도로 덮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무도.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고,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깨끗했다. 더러운 일이었다면, 손을 더럽히는 일이었다면 아마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17~20쪽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장 나쁜 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삶, 아닐까. 오늘은 좋은 일만 상상하고 싶었다. 시험처럼 실패해 버리고 싶진 않았다. 붙거나 떨어지거나. 죽거나 살거나. 사랑하거나 외면하거나. 잡히거나 빠져나가거나. 인생은 매번 둘 중의 하나다. 중간은, 없다
—23쪽
차가운 목소리는 어느 곳에서든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다디단 목소리, 신혜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다들 지옥에 있다고 하지. 모두 너 때문에 내가 지옥에 있다고 욕하는데, 너 역시 지옥에 있다고 아우성을 쳐. 그러면 이게 다 누구 책임일까.”
(……)
처음엔 감자탕 국물의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고, 그다음엔 부드럽고 차가운 것이 입속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사람의 혀가 차가울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것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게 빨아 당겼다. 마치 엄마 젖을 빠는 갓난아기처럼.
불현듯, 옆에서 끓고 있던 감자탕 냄비가 걱정이 됐다. 냄비를 잘못 건드리면 국물이 쏟아져 탁자를 짚은 손을 델지도 몰랐다. 하지만 너무 부드러워서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손을 덴대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불 위에서 끓는 냄비를 내버려 두고 달고 부드러운 아랫입술을 핥았다. 학원 옥상에서 아이스바를 빨아 먹는 신혜를 보았던 날부터, 혹시 그날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숨 막혀.”
입술을 먼저 뗀 사람은 신혜였다.
—59~61쪽
“기대를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난 몰라. 그런 건 받아 보지 못해서. 그게 그렇게 나쁜 거였나.”
신혜가 중얼거렸다.
나는 오늘 저녁 식당에서 혼자 해장국과 소주를 먹던 남자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신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남자가 뜨거운 국물을 떠먹으며 왼손으로는 물수건을 쥐고 이마를 닦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깍두기를 씹느라 우물거리던 입과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을 때마다 어김없이 구겨지던 미간, 벌겋게 익은 낯빛에 대해서도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 얼굴을 보면서 느꼈던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까지.
“난 네가 뭣 때문에 미래를 불안해하는지 모르겠어. 뭐가 그렇게 불안해 죽겠는지. 넌 나하곤 다른 사람이야. 말하자면, 차로 사람을 치어 죽여도 인생 종칠 일은 없다고.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뭘 가지고 있는지를 몰라.”
—63쪽
엄마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남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기적이 자신에겐 쉽게 일어날 거라 기대하는지도 몰랐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특별한 클래스로 태어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별한 사람이 못 되는 나는 그러지 못해 불안했지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낳아 달라고 애원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 번쯤은 평범하다는 게 어째서 죄가 되는지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때때로 기적을 상상했다. 기적이 온다면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기적을 가장 바라는 사람은 나일지도 몰랐다. 똑같은 실패를 반복해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가 기적을 기도한다면 불운은 누구 몫일까. 궁금했다.
—75쪽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비겁한 인간이었다. 누나와 나 사이에 놓인 음식이 차갑게 식어 갔다.
“어쩔 수가 없었어, 나는.”
내 입으로 내뱉은 말이 부끄러워 눈앞의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죽어도 가야 하는지, 묻고 싶지도 않다. 네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아주 겁이 나.”
나는 고개를 들고 누나를 봤다. 누나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씹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기 싫은지 시선이 식탁 모서리에 가 있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을 때 누나의 얼굴은 아버지를 닮았다. 그 눈빛, 인간이 아닌 사물을 대하는 차가운 시선. 나는 너를 몰라. 나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검은 눈동자. 주먹으로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고, 안경 너머 작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싶었다.
우리 식구 가운데 나를 유일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던 누나마저 결국 실망시키고 만 걸까.
(……)
“그런데, 그러니까, 네 인생이니까 남에게 휘둘리진 말았으면 해.”
“무슨 말이야?”
“나는 누가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싫었거든.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 누굴 만나러 돌아가는진 몰라도, 엄마 같은 인간을 네 인생에 또 만들어 놓는 건 그
렇지 않니? 누가 내 인생을 맘대로 흔드는 거, 정말 질색이다. 지긋지긋해.”
“오해야.”
컨베이어 벨트가 다시 움직이고 있고, 그 위에 올라탄 이상 무조건 따라가지 않으면 굴러떨어질 거라 말할 수는 없었다. 누나에게 신혜를 보러 돌아가야 한다고, 신혜가 트위터에 글을 올리지 않은 지 보름이 넘었다고, 불안해 미칠 지경인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고백할 수도 없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중전화로 신혜에게 전화를 걸어 보기도 했지만, 네 번 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국제전화를 받기도 곤란한 상황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112~113쪽
양 사장은 둥글넓적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길고 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데나 드나드는 놈이 더러워, 라는 말에 화가 치밀었어야 옳은데, 도리어 속이 시원했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더러운 놈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데 돈을 갖다 바치면서 쫓는 배신자는 나보다 더 더러운 년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짓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나는 어째서 이렇게 분하고 억울한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한 답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심으로 후회한 적이 없었다.
—166쪽
■ 줄거리
재수생 강지용은 같은 학원에서 알게 된 민신혜와 부드럽고 달콤한 첫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신혜가 지용에게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는 지옥의 풍경과도 같은 것이다. 10년 전 열한 살의 어린 딸 신혜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던 엄마는 이제 열한 살이 되는 신혜의 동생에게 다시 한 번 성매매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악마적 범죄를 멈추기 위해 신혜는 지용과 살인을 모의하고, 지용은 완전범죄에 성공한다. 대학 입시에 또다시 실패한 지용이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기 전 치밀한 준비 끝에 호프집 여주인을 살해하고 강도의 소행으로 위장한 것이다.
1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굳게 약속하고 지용은 출국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신혜와의 연락이 끊겨 버리고 지용은 신혜를 쫓기 시작한다. 신혜의 행방을 추적하면 추적할수록 진실은 점차 미궁으로 빠져든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입학한 적도 없으며,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새아버지는 멀쩡히 살아 있다. 엄마가 사망한 후 신혜 앞으로 2억 원이 넘는 보험금이 지급되었고, 살던 집과 바꾼 아파트 분양권마저 부동산 업자에게 팔아넘기고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은밀히 사람을 사서 신혜와 새아버지의 비밀을 파헤친 지용은 이제 신혜를 만나러 떠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