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관통하는 가장 뜨겁고 단단한 언어” -김행숙(시인)
일상에 편재하는 낯익은 언어로
흔적의 이미지를 포착해 낸 한세정 첫 시집
일상과 멀지 않은 친근한 언어로 삶 곳곳에 잠복해 있는 흔적과 그리움에 대해 노래하는 시인 한세정의 첫 시집 『입술의 문자』가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2008년 《현대문학》에 「태양의 과녁」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한세정은 “이미지가 강렬하고 탄탄하며”(김기택 시인)“존재를 관통하는 가장 뜨겁고 단단한 언어”(김행숙 시인)를 구사한다는 평을 받으며 이미지 시단을 이끌어 갈 새로운 얼굴로 주목받았다. 등단 이후 4년 동안 써 온 시편들을 모은 이번 시집은 등단작 외에도 입술에서 말의 흔적과 흔적의 기억을 읽어 내는 「입술의 문자」, 시시껄렁한 기억들로 채워진 쓰레기 하치장 같은 현실을 묘사한 「부메랑」, 시와 시인의 관계에 대한 심도 깊은 통찰을 다룬 「장미의 진화」등 모두 51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 친숙한 언어로 구사하는 이미지가 선명하고 경쾌하며 동적이다.”라는 홍일표 시인의 지적처럼 구루프(헤어롤) ․ 부메랑 ․ 메리고라운드(회전목마) 등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의 이미지는 그리움의 방향으로 흐르는 감정의 동선을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흔히 사용해 온 말과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에 주목하면서도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그림을 펼쳐 보이는 시인 한세정은 이번 첫 시집을 통해 이미지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입술이라는 문자
우리 몸도 시(詩)다. 무수한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올 때 말들의 흔적이 입술에 새겨지고, 그 흔적들이 쌓여 주름에 주름을 더한다. 입술의 주름을 볼 때 우리는 한 사람이 내놓은 말의 뒷모습과 그 사람이 지닌 그리움의 깊이마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입술의 문자를 상상하는 일은 우리 몸이 시(詩)가 되는 행동이자 우리 몸에 새겨진 시(詩)를 읽는 행동. 잔잔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삶에 남겨진 흔적과 그리움에 대해 노래하는 시인 한세정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적인 모든 것을 찾아낸다. 이렇듯 한세정 첫 시집 『입술의 문자』는 일상에 새겨진 흔적에 대해 노래한다. 그녀의 언어를 두고 평론가 고봉준이 “모래의 서체”라 했듯, 모래를 닮은 한세정의 언어는 흔적을 기록하고 지나간 것을 기억하기 위한 시적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 역시 그녀와 함께하는 동안 기억과 흔적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들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입술의 주름으로
결별한 이름을 기록하는 시간
산발한 걸인이 되어
우리는 머리칼이 끌고가는 바람의 문자를 해독했던 것이다
살갗과 살갗이 스쳐 만든 인장(印章)은 문자가 없는 페이지에서 더욱 선명해지고
마침내 바닥에 목을 누인
기린의 긴 혀처럼
우리는 서로의 경전을 천천히 쓸어내렸던 것이다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수면에 얼굴을 묻고
입술이 뿔나팔이 될 때까지
머나먼 입술을 향해 입술을 움직일 때
물살을 문 입가에 되돌아와 겹쳐지는
입술의 무늬
우리는 각자의 입술을 만지며 붉게 물들었던 것이다
-「입술의 문자」
■몰락하지 않는 세계
한세정은 말보다 이미지에 집중하는 시인이다. 기존의 문법을 전복해 새로운 생각에 도전하는 것보다 구체적이고 강력한 이미지를 통해 독자 스스로 자신만의 이미지에 가닿도록 유도한다. 그중에서도 한세정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 이미지들은 오래된 시간 방향으로 구부러진 욕망의 그래프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그리움의 정서는 상실, 즉 그리워할 수 있으나 되돌아갈 수 없는 세계와 ‘지금’의 낙차에서 비롯되는 상실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현존하는 지금, 이곳은 어떤 모습일까? 그곳은 “시시껄렁한 기억으로 채워”(「부메랑」)진 “쓰레기 하치장”의 세계이고 로빈슨 크루소가 거주하는 “섬”이며, “내 안의 굴곡을 벗어나 안나푸르나에 가고 싶”은 욕망이 눈가에 가득한 “안티푸라민”의 상처로 내려앉는 몰락의 세계다. 하지만 한세정의 세계에서 몰락은 끝이 아니라 흔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흔적을 즐길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십 년 전의 거리를 지나갈 수 있”고 “십 년 전의 구름”도 바라볼 수 있다.
푸가를 들으면 십 년 전의 거리를 지나갈 수 있을 거예요 앞니 빠진 아이는 휘파람을 불고 있어요 좌판에 일자로 늘어선 생선은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훅훅 내리쬐는 태양 옆으로 십 년 전의 구름이 흘러가요 휘파람을 부는 아이의 앞니는 오늘도 자라지 않아요
길 위의 아이들은 부메랑을 던져요 부메랑은 한 곳만을 겨냥하지요 과녁의 중심에서 회오리치는 얼굴들, 혹시 귀에 익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지 않던가요? 낯익은 길을 따라서 부메랑이 돌아오고 있어요 익숙한 속도와 방향, 아이들의 눈동자가 반짝거려요 세상은 때론 시시껄렁한 기억으로 채워지지요 우리들의 기억력은 쓰레기 하치장 같아요 푸가 연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부메랑」
■시는 ‘커플’의 산물
한세정 시에서도 ‘당신’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호칭이다. 그런데 『입술의 문자』에 나타난 ‘나’와 ‘당신’은 시집 첫 페이지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듯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연인’ 관계가 아니다. 사실 「장미의 진화」는 ‘장미’나 ‘진화’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꽃잎 속에 꽃잎이 쌓이며/ 최초의 꽃이 완성되듯이”라는 구절은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며 실상 이것은 ‘시인’과 ‘시’의 관계로 볼 수 있다. 한세정은 이 시집을 통해서 한 편의 시가 행위 주체로서의 ‘시인’과 발화 주체로서의 ‘시’가 결합하여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산되며, 그 관계는 조화와 반목을 반복하는 애증 관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라고 쓰고 ‘시’라고 읽는 것, 이것이 한세정 시인이 부여한 ‘당신’이라는 단어의 새로운 용법이다. 그런 까닭에 한세정에게 시는 ‘당신’이라는 타자만으로도, ‘나’라는 주체만으로도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커플, 즉 ‘관계’의 산물이다.
붉은 주먹을 내밀며
넝쿨은 전진한다
꽃잎 속에 꽃잎이 쌓이며
최초의 꽃이 완성되었듯이
우리로부터 진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둥켜안고
심장을 향해 탄환을
최초의 연인이 그러했듯이
최초의 적이 그러했듯이
입술을 물어뜯으며
장미가 피어났듯이
-「장미의 진화」
■ 추천의 말
심장에서 범람한 피가 혈관을 지나갈 때, 계기판의 바늘이 회전하는 일과 거리에서 군상들이 침묵하는 일과 바퀴살이 구르며 사라지는 일이 어떻게 한 몸에서 동시에 일어날까. 어떤 힘이 몸 안의 사건과 몸 밖의 사건을 동시에 연결시킬까. 한세정 시인은 태양의 빛줄기를 수혈하고 몸 밖의 호흡에 끊임없이 관통당하면서 그 힘으로 제 몸 안에 과녁을 키운다. 그 힘으로 가로수는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의 흉곽을 읽어 내며”, “내 손 안에서 장전된 탄환은 당신의 권총에서 발사”된다. 그 힘은 뢴트겐처럼 온 몸을 투시하며 한입의 사과가 어떻게 몸 안을 돌아다니다가 한 그루 나무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울음이 되었는지도 읽어 낸다. 그 힘은 사물과 세계와 천체가 스스로 몸 안으로 들어와 자유롭게 연대하게 한다. 그 힘은 날아가는 탄환의 일직선 또는 수직으로 뻗은 전신주의 일직선과 같이 곧고 단단한 시의 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김기택(시인)
한세정에게 시는 ‘흔적’을 기록하는 행위다. ‘당신’은 ‘흔적’을 새기는 존재고, ‘나’는 ‘흔적’을 기록하는 존재다. 물론 이러한 ‘흔적’의 존재를 긍정하는 한, ‘나’와 ‘당신’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혀질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사라져 가는 윤곽”(「돌의 가족」)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시인과 시/언어 사이의 간극, 그것은 “등뼈를 쓸어내리던 눈동자만이/ 온기를 기억할 것이다”(「돌의 가족」)라는 진술처럼 시인을 시지푸스의 천형으로 인도한다. 그는 다만 “당신을 움켜쥘 수 있는/ 긴 팔이 내게도 있었더라면”(「흰얼굴꼬리원숭이」) 하고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그 간극이 사라지는 순간만을 기다릴 뿐이다. ‘진화’가 계통의 다양화와 복잡화를 의미한다면, ‘흔적’의 모티프를 담고 있는 한세정의 시편들은 분명 진화하고 있다. -작품 해설에서/ 고봉준(문학평론가)
자서
1부
장미의 진화
입술의 문자
그리하여 당신과 나는
한입의 사과
우리는 소리의 흔적이거나 철로에 묶인 쇠사슬이다
열매의 탄생
질주의 탄생
덩굴의 구조
뜨거운 추상
내 손안의 권총
태양의 과녁
피카소의 연인들
태양의 연인들
2부
흰얼굴꼬리원숭이
어둠과 어둠
수프를 젓는 사람
스노쿨링
물고기의 노래
손뼉을 치는 동안
직선의 세계
미로의 방식
밴 디먼의 땅
우리는 가로수처럼
삐루엣
당신의 왼쪽
돌의 가족
0시의 크로키
3부
혈육의 궤도
쌍둥이자리
메리고라운드
여름이라는 골목
덤보로부터 덤보에게
오빠의 기원
구름이 구름으로 태양이 태양으로
구루프의 원리
굿바이 걸즈
모빌의 감정
부메랑
양치하는 노파
4부
안부
로빈슨 크루소에게
안녕, 안나푸르나 혹은 안티푸라민
풍선이 날아오르는 동안
사탕공장 언니들과 함께
얇은 종이 한 장
돼지들
열려라 참깨
서커스
기타 치는 노인
그때 당신은 해를 끌고 지평선 밖으로
묵정(墨釘)
작품해설/고봉준
‘당신’의 새로운 문법
흔적의 언어로 사랑을 기억하고 모래의 서체로 존재를 드러내다
의지의 영도에 도전하는 시인 한세정의 첫 번째 시집
심장에서 범람한 피가 혈관을 지나갈 때, 계기판의 바늘이 회전하는 일과 거리에서 군상들이 침묵하는 일과 바큇살이 구르며 사라지는 일이 어떻게 한 몸에서 동시에 일어날까. 어떤 힘이 몸 안의 사건과 몸 밖의 사건을 동시에 연결시킬까. 한세정 시인은 태양의 빛줄기를 수혈하고 몸 밖의 호흡에 끊임없이 관통 당하면서 그 힘으로 제 몸 안에 과녁을 키운다. 그 힘으로 가로수는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의 흉곽을 읽어내며’, ‘내 손 안에서 장전된 탄환은 당신의 권총에서 발사’된다. 그 힘은 뢴트겐처럼 온몸을 투시하며 한입의 사과가 어떻게 몸 안을 돌아다니다가 한 그루 나무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울음이 되었는지도 읽어낸다. 그 힘은 사물과 세계와 천체가 스스로 몸 안으로 들어와 자유롭게 연대하게 한다. 그 힘은 날아가는 탄환의 일직선 또는 수직으로 뻗은 전신주의 일직선과 같이 곧고 단단한 시의 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김기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