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인 쿨만의 매혹에 흠뻑 빠진 첸의 사랑과 그런 첸을 향한 준하의 사랑, 그리고 카스트 제도의 두 희생양 크리슈나와 슈크라의 비극적 사랑이 그려진 슬프고도 아름다운 선율……어떤 불길로도 태울 수 없는 탯줄의 뿌리 ‘나비’를 이제 갠지스 강물에 띄워 보낸다. 이화경은 이 작품에서 보다 근원적인 생의 아픔과 관계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살의 통증을 선명하고도 강렬하게 보여주는 그녀의 문장은 읽는 이를 순식간에 매료시키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다양한 인물들의 생의 아픔을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그녀만의 탁월한 재주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빛을 발하고 있다.
타인보다 먼 가족으로부터 오는 생의 트라우마 가족이란 얼마나 뜨악한 타인인가. 아니 타인보다 더 낯설고 쓸쓸한 관계가 가족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가족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에 훌륭한 대상이었다. 피붙이이기 때문에 더 맞닿아야 한다는 욕심과 그 욕심이 거절당한 데에서 생기는 분노의 이중 감정은 가족 앞에서 평정심을 잃게 만들었다. (51쪽)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탯줄로 연결되었던 어머니와 분리되면서부터 시작된, 멈추지 않는 고립감과 외로움. 가족에게 위안을 기대해 보지만, 가족은 또 다른 타인에 다름 아니다. 아니, 때로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준하와 첸, 쿨만은 국적과 성별, 나이가 모두 제각각이지만 가족으로부터 끔찍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과거의 상처는 이들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엮이게 만들며 동시에 또다시 상처를 반복하여 경험하거나/주는 운명 같은 힘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상호 간에 동등하지 않은 사랑을 하는 이들의 얽힌 관계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보다는 해결하기 힘든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쿨만은 질투심이 질투의 대상과 질투를 하는 자에 대한 그의 힘을 강화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다는 허기로 언제나 사랑이 떠날까 봐 전전긍긍했던 어린 날의 경험은 그에게 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 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쪽이 관계에서 더 많은 힘과 권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21쪽) 성인이 되어 가족의 품에서 벗어난 세 사람이지만, 아직도 지난날의 기억은 남아, 이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생의 방향을 지시한다. 현재의 시간에 부재한 가족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통증으로 번져 가는 이러한 모습은 마치 『수화』에서 이야기되었던 ‘환통’과도 같다. 이들이 이 ‘환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슴속에 남아 있는 탯줄까지 태워버리는 고통스러운 성장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첸과 준하의 여행은 불확실한 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들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성장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 된다. 마지막 여행지 인도에서 발견한 생의 아이러니 “제 이름을 불러줘요. 한 번만 첸이라고 불러줘요.” “이름? 이름은 하나의 주소에 불과할 뿐이야. 네가 팀 마샬로 불리든, 폴 해리슨으로 불리든 뭐가 달라지지?” (12쪽) 호명이라는 행위는 상대와 나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종의 실천적 형식이며, 때로는 그것이 관계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인도로 떠나오기 전, 첸은 쿨만에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애원하지만 쿨만은 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를 두고 다른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랑을 하는 그들의 엇나간 관계, 바로 엇나간 부름과 대답들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쿨만을 떠나 인도에 도착한 첸이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봉사 활동을 하다가 죽기 직전의 한 인도 노인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첸이 그 노인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아마르 남네이’가 사실은 ‘제 이름은 없습니다.’라는 뜻의 인도 말이었음이 작품 말미에 드러나는데, 이러한 아이러니는 결국 첸에게 관계와 호명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을 남기게 된다. 쿨만이 말했던가. 그저 우연히 맞부딪힌 두 인간이 가까워지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거나 알고 난 다음이 아니라는 말. 어쩌면 서로를 안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와의 관계 속에 놓인 그는 그저 그 안의 그일 뿐. ‘……이었던 그’는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165~166쪽) 첸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무작정 북회귀선을 향해 떠났던 준하가 결국 인도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 역시 삶의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카스트 제도라는 견고한 관습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속에서 끝내 한쪽이 죽음에 이른 비극적인 인도 연인들, 크리슈나와 슈크라. 이들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비극성”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제도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이며, 또한 그래서 보다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준하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하다. 이주 노동자로서 한국에서 죽은 크리슈나를 바라보는 한국인으로서의 심정도 있지만, 그녀는 그들의 사랑 속에서 아름다움과 함께 사랑의 환멸을 발견한다. 수많은 다른 크리슈나와 다른 슈크라가 살고 있는 인도에 대해 준하는 알지 못한다. 크리슈나를 통해서 사랑의 환상을 보기보다는 환멸을 보았고, 무엇보다 크리슈나와 슈크라의 고백은 준하의 것이 아니었다. (146쪽) 갠지스 강에서 태우는 생의 ‘나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또 다른 자기 안의 길을 만드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현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31쪽) 첸과 준하의 여행은 그들의 고통에 대해, 완벽한 해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사실상 완벽한 치유라는 것은 없다. 단지 고통을 직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들을 성장시킬 뿐이다. 인도에서의 경험은 그들에게 극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오직 생을 버티고 선 그들의 두 다리에 아주 조금 더 힘을 싣게 할 뿐이다. 후지와라의 말처럼 우리가 잃어가는 내부의 모든 것, 죽는 것, 살아가는 것 모두가 힌두교 안에 들어 있다면, 힌두교도들인 그들 역시 순응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크리슈나의 삶을 옮겨 적었던 준하의 노트도 불길에 태워 저 강물로 띄워 보내야 할 또 하나의 죽음이었다. 끝까지 타지 않고 가슴에 남을 나비가 있다면,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크리슈나의 흔적일 것이었다. (205쪽) 예측할 수도, 가져볼 수도 없는 미래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사랑처럼 미래에 대해서도 대책 없이 끌리고 미욱스럽게 당할 것이다. 인도가 가르쳐준 미래에 대한 진실만을 준하는 가져가고, 내일이면 떠날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튼튼한 허벅지가 있지 않은가. (207쪽) 외로움에 지치고, 엇갈린 사랑에 괴로워하던 준하와 첸이 여행의 마지막 발걸음으로 나아간 곳은 삶에 대한 사랑이며, 홀로 설 수 있다는 생의 의지이다.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를 따라다니는 고립감은 사실상 생에 대한 감각 그 자체일 것이다. 결국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생의 ‘나비’를 스스로 태울 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잊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준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가며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다.
나비를 태우는 강 작가의 말 작품 해설 인도로 가는 길―두 남녀의 성장소설 / 최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