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낯선』은 세계와 인간을 ‘기록’의 대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인간이 자신의 존재적 입지와 벌이는 힘겹지만 인간적인 분투를 그리는 데 집중한다. 인간은 모더니티의 광기에 대상화된 존재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에 굴복하고 좌초되면서도 힘겹게 자신의 삶과 운명의 진실을 추구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박상우 소설이 종말적 세계에 대한 대결이나 단절 의식보다는 그 속에 놓인 인간에 대한 깊은 응시와 이해를 소설의 중심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보다 낯선』에는 삶의 풍경을 천천히, 그러나 깊이 응시하는 만보와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공명이 깃들어 있다. ―김민수(문학 평론가)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박상우의 네 번째 소설집 『사랑보다 낯선』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인간의 근원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탐색해 온 작가는 “샤갈의 마을과 사탄의 마을을 거쳐, 모든 작가들이 처음 섰던 자리인 사람의 마을에 당도했다.”는 표현으로 여섯 개의 중, 단편 소설을 묶은 이번 작품집에 의미를 부여한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의 행보
1990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시작된 박상우 소설의 여정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전환점에 걸쳐져 있다. 『독산동 천사의 시』(1995), 『호텔 캘리포니아』(1996), 『청춘의 동쪽』(1999)으로 이어지는 작품 세계는 한 편의 거대한 기록화처럼 보인다. 작가는 1990년대를 공간적 배경으로 1980년대의 상처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물들의 고통과 방황을 묘사해 왔다. 어느 문학 평론가는 이를 “1980년대와 강박적으로 절연하려는 의지”라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낭만적 허무주의’, ‘현실에 대한 환멸’ 같은 용어가 심심찮게 사용되어 온 것도 이러한 작가적 이력(履歷)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이러했던 그가 ‘사탄의 마을’을 통과하며 지닌 태도는 예의 종말적 세계의 풍경을 냉혹하게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2000), 『까마귀떼그림자』(2001), 『가시면류관 초상』(2003)으로 이어지는 박상우의 작품 세계는 한결같이 음울한 제목에서 떠올릴 수 있듯이 권태로운 일상의 순환에 갇힌 현대 인간의 차가운 고독과 악마성, 그리고 종말적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비유하자면 박상우 소설은 ‘샤갈의 마을’을 지나 ‘사탄의 마을’로 접어든 것이다. 샤갈의 마을에 거주하는 인물들은 과거의 유토피아적인 기억을 간직함으로써 권태로운 현재를 버티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탄의 마을에서는 자기 삶과 운명에 대한 어떤 근거나 전망도 찾기 어렵다. 이처럼 모더니티의 폭력성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사탄의 마을’ 소설들에서는 기록자의 편집증적인 피로 또한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 있는 풍경의 발견
신작 『사랑보다 낯선』에서 무엇보다 새롭고 두드러지게 다가오는 것은 세계의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와 시선이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종말적 세계에 대한 대결이나 단절 의식보다는 그 속에 놓인 인간에 대한 깊은 응시와 이해를 소설의 중심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삼십 세 비망록」과 「길모퉁이 추락천사」, 그리고 「마천야록」에는 그와 같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선이 관통하고 있다.표면적으로 볼 때 「삼십 세 비망록」은 첫사랑에 대한 낭만적 회고담이다. 그러나 서른이라는 나이가 오기 전에 자살을 선택하는 여자가 던져주는 전언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그녀는 타성에 젖은 삶, 피할 길 없는 운명의 권태로움에 굴복하고 싶지 않아 자살한다. 서른을 넘은 차갑고 거친 삶보다는 차라리 서른 이전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의 첫 애인이었던 주인공 ‘나’는 처음에는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진심을 확인하고 난 후 그녀에게 품었던 고정관념을 수정하고 그녀의 선택을 자기 삶 속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배신과 자살에는 타성적 삶을 강요하는 세계의 폭력이 작용했던 것이고, 그녀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이처럼 타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모습은 「길모퉁이 추락천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편의점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남자(‘나’)는 스스로를 ‘길모퉁이 추락천사’라고 지칭하는 여자에게 단순한 호감을 넘어서는 우호적 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주인 남자에게서 그녀가 \’미친 여자\’라는 소리를 들은 뒤부터는 그녀를 의심하게 되어 결국 그녀를 미친 여자로 치부하고 감정적 혼란을 떨쳐버린다. 그런데 그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나’는 타성적인 사고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녀는 타자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된 현실의 희생자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의 죽음에 자신 역시 관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나중에 그녀의 정체와 비통한 사연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용서를 빌게 된다.「마천야록」은 어느 겨울 새벽에 서울 외곽 마천동의 한 교회 마당에서 동사체로 발견된 룸살롱 접대부 윤소진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소설은 ‘마천동 밤의 기록’이라는 표제 그대로 그녀가 동사체로 발견되기 전날 밤 그녀와 만나고 헤어졌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진술하는 내용을 옮겨놓는 방식을 취한다. 그들은 윤소진의 손님이었던 인터넷 쇼핑몰 상무이사, 동료 접대부, 파출소 경찰, 택시 기사, 그리고 여동생이다. 죽어버린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기에 다섯 진술자들이 제각기 자신의 입장에서 진술한 내용으로 그녀의 삶과 정체성을 구성한다. 다섯 인물의 내레이션은 겉으로 경찰 조서를 위한 진술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에 대한 변명, 항변, 고백 등을 두루 포함한다. 작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를 내는 다섯 인물의 견해를 윤소진이라는 하나의 매개로 통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텍스트로 만들어낸다.위의 소설들은 아무런 악의 없이 존재하는 한 인간에 대해 비정한 타자들이 벌이는 일상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보여준다. ‘천사표’로 묘사되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반대편에는 주인공 남성이 이 야만과 폭력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담하고 있다. 누구나 폭력적인 타자가 될 수 있지만, 역으로 누구나 천사가 될 수 있다는 게 작가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에 대해 진정한 이해와 관심을 갖게 되면 그 속에서 악마와 천사의 양면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적극적인 응시와 재발견을 통해 박상우 소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고자 한다.
자기 운명을 향한 아름다운 분투
‘사탄의 마을’을 벗어나 인간이 있는 풍경을 발견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인물을 응시하기 시작한 박상우 소설의 변모는 그간 걸어온 소설적 여정의 연장인 동시에 세계에 대한 성찰이 심오해진 결과로 보인다. 물론 박상우가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천사표’ 인간들의 운명은 매우 가혹하다. 그들의 운명은 현실이라는 신의 악의에 희생되는 것으로 마감된다. 그런데 박상우의 인간 탐색은 「매미는 이제 이곳에 살지 않는다」와 「화성」에 다다르면 좀 더 치열해진다. 두 소설의 인물들은 일단 ‘천사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겪고 있는 존재적 위기를 적극적으로 인식하려 하고, 현실이라는 신의 악의로부터 자아의 보존을 모색하며, 자신이 가야 할 운명의 지도를 스스로 작성하려고 시도한다.먼저 「매미는 이제 이곳에 살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나’는 지독한 자아 상실의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강의를 그만두고 형은 이유 없이 실종된 상황에 처한 그는 “한때는 생물이었으나 이미 무생물이 되어버린 그것, 제 형상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죽어버린 참매미”처럼 느낀다. 그는 형의 애인 ‘마린’에게 빗나간 애정을 호소하면서 현실에서 도피하려 한다. 그의 주변 인물들은 실종되고 잠적하고 자살하고 가출하는데 ‘나’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 행동들 모두 자아를 발견하고 운명을 찾으려는 고독한 분투의 일환이다. 결국 마린마저 떠나버리는 순간이 오는데, 자기 각성의 계기는 의외로 이 순간에 발생한다. 형의 애인으로 알고 있던 마린이 실은 유부녀이며 형과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처럼 지독한 자아 상실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현실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고 마음껏 울 수 있게 되며 자기 운명을 위한 어떤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절감하게 된다. 따라서 그가 형의 뒤를 따라 짐바브웨로 가는 것은 자기 삶의 진실과 운명을 위한 선택이자 실행이다. 그는 아직 새로운 자아를 확립하지는 못했지만 무기력한 현재와 결별하는 용기를 실천한 것이며,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한 셈이다.이에 반해 「화성」의 주인공 ‘나’는 반대의 여로를 통해 자기 삶의 출발점을 모색한다. ‘나’는 사업 실패와 파산, 이혼을 겪은 뒤 차츰 현실의 맥락에서 밀려나면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비현실적인 것들에 친근해지게 된 ‘나’는 기이하게도 ‘화성’에 대한 집착을 통해 존재의 위기를 보상받으려 한다. 5만 9000여 년 만에 지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화성에 그가 유달리 집착하게 된 표면적 이유는 고교 시절 유난히 화성에 집착했던 민성준이라는 친구 때문이다. 해병대 입대를 앞두고 감쪽같이 사라졌던 민성준이 경기도 화성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그는 화성을 자기 삶의 화두로 끌어들인다. 기이한 방식으로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했던 민성준이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화성에 집착했다는 것, 그런데 그가 지금 경기도 화성에 살아 있다는 것, 따라서 그의 방식과 현존의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도무지 속수무책인 자신의 위기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고 “삶에 대한 정신과 기회를 얻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성에 가서 “화성은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돌아온다. 함께 어울려 살아도 현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먼 행성들의 우주와 같고, 저마다 천상의 화성처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꿈을 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깨달음을 얻는 그는 이제 현실로 복귀하여 자기만의 운명을 향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사람의 마을에 서다
박상우 소설의 행보가 ‘사탄의 마을’을 벗어나 마침내 ’사람의 마을‘로 들어와 있다는 판단은 표제작 「사랑보다 낯선」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시간 강사인 남자는 서른셋의 나이에 스스로 “이미 정신적 노파처럼” 살고 있다고 느끼는 인물이다. 그는 같은 학교의 교수 임채령의 돌발적인 제의에 따라 그녀와 하룻밤 우연한 동행을 하게 된다. 그 자체로도 낯설었던 이 여행은 자살한 전남편을 문상하고자 한 목적이나 그녀가 장례식장 옆 주차장에서 그를 상대로 벌이는 카섹스로 인해 더욱 낯설어진다. 사랑이라는 것조차도 너무나 진부하고 속된 이름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들은 “낯선 시간이 선사하는 긴장감”을 만끽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룻밤의 여정은 의외로 그에게나 그녀에게나 새로운 삶을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것은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고랭지의 버려진 채소밭에 들어가 오래도록 배추 뽑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어느 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에게로 불현듯 찾아온다.
이것은 그때까지 두 사람이 겪었던 여러 ‘낯선’ 긴장들을 훌쩍 넘어서는 전혀 ‘다른’ 삶에 대한 발견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그런 발견이 지극히 사소한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사소한 삶의 순간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으로 인해 포착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삶이란 ‘지금 여기’와 다른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낯선 게 아니라 지극히 익숙한 것이라는 소박한 발견이다. 이러한 깨달음으로부터 그는 어제까지 자신이 살았던 삶을 “비로소 사람의 인력이 느껴지는 지점”으로 재발견하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은 주어진 현실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고, 추구하고, 견지하는 것이 가능하며, 오히려 거기에 더 큰 의미가 숨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전에 박상우 소설은 ‘샤갈의 마을’에서 현재의 단조롭고 공허한 풍경과 다가올 미래의 어두운 징후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탄의 마을’에서 그의 소설은 종말을 향해 치닫는 자멸적인 영혼들과 운명에의 의지를 잃어버린 시시포스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그는 낯익은 현실에서 은은한 감동을 주는 끌림을 본다. 이 ‘사랑보다 낯선’ 끌림을 찾아 ‘사람의 마을’에 당도한 것이다.
‘샤갈의 마을’과 ‘사탄의 마을’은 ‘사람의 마을’에 이르기 위한,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우회의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박상우 소설은 현실을 결핍되고 구속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끝끝내 살아내야 하는 운명의 거점으로 새롭게 바라본다. 그리하여 『사랑보다 낯선』에는 삶의 풍경을 천천히, 그러나 깊이 응시하는 만보(漫步)와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공명이 깃든다.
박상우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독산동 천사의 詩』,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장편소설 『호텔 캘리포니아』, 『청춘의 동쪽』, 『까마귀떼그림자』, 『가시면류관 초상』, 산문집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작가수첩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등이 있다. 1999년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홈페이지 http://www.star612.com)
삼심 세 비망록 마천야록 길모퉁이 추락천사 사랑보다 낯선 매미는 이제 이곳에 살지 않는다 화성 작품 해설 / 김민수 – 사람의 마을을 찾아가는 길 자각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