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란 무엇인가”삶의 강렬한 근거로서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는 노화가. 칠순에도 몸의 진실을 따르는 벌거숭이지만 화폭 앞에선 구도(構圖)로 제왕처럼 완전을 지향하고, 고통 속에 도약하는 미불. 이 소설엔 완전과 불완전, 미와 추, 예술가와 범인(凡人) 등 내 물음이 녹아 있다. 예술과 고통의 연관에 대해서도. 자신의 불완전을 극기하듯 상처에서 진주를 키우는 예술가. —강석경
“예술”과 “삶”의 본질 찾기
강석경 장편소설 『미불』이 출간되었다. 소설가 강석경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늙은 화가를 소재로 한 『미불』은 예술가란 무엇인가를 통해 자기를 탐구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대에서 ‘조소’를 전공한 작가가 예술과 접하며 예술가들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30년 가까이 화두로 삭여 온 “예술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쓴 소설이 바로 『미불』이다. 작가는 『가까운 골짜기』(1989)를 쓰기 전에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5년이 지난 후, 작가의 성숙한 필치로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작가의 문학적 탐구의 대상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과 “삶”의 본질 찾기이다. 이 본질 찾기의 ‘물음 방식’ 혹은 ‘방편’이 작가에게 문학인 것이다. 작가는 한편으론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에서 ‘나’를 탐구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삶을 억압하는 완고한 인습과 제도를 파헤치며 한국 사회를 탐구하기도 한다. 『숲속의 방』(1985)에서 『내 안의 깊은 계단』에 이르는 작가의 소설들이 이 “본질 탐구”라는 주제 의식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등단(1974)한 지 30년 만에 작가는‘쓰고 싶은’ 예술가 소설을 쓴 것.
『미불』에서는 이 주제 의식을 보다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은, 법명이 미불(米佛)인 화가 이평조의 삶을 다루면서, 화가가 마지막 삶을 예술로 불태우는 과정을 그린다. 오로지 예술과 에로티시즘에 사로잡힌 한 자유주의자의 혼과 편력을 다루면서, 작가는 자신이 경외하고 동경하던 모든 대상들을 이 소설에 쏟아 부었다. 작가의 오랜 소재였던, ‘인도’와 ‘경주’가 이야기되고, ‘색(예술)’과 ‘色(에로티시즘)’을 그렸다. 경주에 살고 있는 작가가 화가의 삶을 그리면서, 인도에 가 체류하는가 하면, 「카마수트라」나 춘화를 참조한 것이다. 『미불』은 화가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달과 6펜스』에 비견될 수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란 무엇인가, 에로티시즘이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낭만적 비전으로 바꾸는 일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나 『회색 노트』 혹은 『달과 6펜스』와 같은 ‘예술가 소설’에서 시도되고, 의미를 얻는다.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물음에 매혹적인 예시를 해 주는 것이 『미불』이 다루는 화가 이평조의 삶과 예술의 색이다. 등단(1974)한 지 30년 만에 작가는 자신의 전공과 인도 체험, 그리고 경주의 색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로 ‘쓰고 싶은’ 예술가 소설을 쓴 것이다.
한 세상 색과 예술만을 탐닉해 온 노화가 이평조의 삶, 그리고 극적인 결말
법명이 미불(米佛)인 화가 이평조는 일흔이 넘어섰어도 화가로서의 정열과 한 범인으로서의 성에 대한 탐닉을 멈추지 않는다. 수묵 중심의 기존 동양화를 거부하고 색채와 구도로써 한국화의 경지를 꽃피어 온 미불은, 그렇지만 왜색 사조라 하여 오랫동안 평단으로부터 배척받아 왔다. 일흔이 넘어서서야 비로소 평단은 노화가가 추구해 왔던 ‘구도’와 ‘색채’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미불은 그에 안주하지 않고, “위대한 예술가의 참다운 운명은 ‘일의 운명’”이라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오히려 더 ‘그림’에 대한 정열을 불태운다. 노화가 미불은 진아라는 한 자유분방한 여자를 정인(情人)으로 두고 있다. 주변의 다른 이들은 이 자유분방하고, 어찌 보면 천박한 속인(俗人)이라 할 수 있는 여자를 경계하지만, 미불에겐 그저 귀엽고 매혹적이다. 한 세상 색과 예술만을 탐닉해 온 노화가이기에 ‘불완전’하더라도, ‘추’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듯 “몸의 진실”을 따른다. 그런 그를 잘 알기에, 진아는 미불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는 대신,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노화가 미불은 몇 해 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았다. “삼십 년이 넘도록 술과 객기로 허랑하게 살아오면서 한 일이라곤 어쭙잖은 강사 노릇과 여기저기 그룹전에 그림 몇 점 내며 화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해 온 것뿐”이지 않은가. 순간 직감처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년 이평조가 화가의 길을 택해 현해탄(일본)을 건너갔듯이 익숙한 모든 것들을 뿌리치고 다시 떠나야 한다고. 낭비의 삶을 마무리 짓고자 재출발을 준비하고 있을 때, 딸 정미에게서 편지가 왔다. 미불은 딸의 인도 유학길에 동행하게 된다. 인도의 체험과 인도에서 얻은 영감은 칠순이 넘은 노화가의 “채 꽃피지 못한 진채의 꿈”을 “겨울날 미친 개나리” 만개하듯 꽃피게 하였다. 인도에서 성과 속, 미와 추, 완전과 불완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구도의 체험을 한 것이다.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있고 눈으로 앞 시대의 진기한 명적을 실컷 보며 또한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 바야흐로 붓을 댈 수 있다.”는 남송의 조희곡의 말처럼, 이제 비로소 칠순이 넘어서야 “붓을 잡을 자격”을 갖춘 것이다. 인도에서 귀국한 미불은 이후 「인도귀국전」과 「한국신화전」을 여는 등, 고령에도 왕성하고 눈부신 활동을 한다. 그렇지만, 미불은 곧 암 진단을 받고 병마와 싸우게 된다. 병마와 싸우는 동안, 정인인 진아는 자신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다며 삿된 요구를 내세운다. 미불은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그림 한 점을 높게 쳐서 팔아 학비며 생계비 조금을 대주고, 정인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그러나 진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미불의 그림과 집 등에 가압류 처분을 내리는 소송을 낸다. 화가의 생의 결정일 그림들에 말이다. 생의 마지막 싸움을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 했던 미불에게 남은 건, 모멸감과 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뿐. 무엇이 미이고 무엇이 추인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모든 것이 뒤엉켜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황이다. 신이 있다면 가르쳐줄까 하고 묻는 미불. “나, 저녁 산책길에 신을 만난다면 이같이 기원하리. 신을 의뢰하지 않는 굳센 마음을 주십사고.” 화필과 사랑을 했던 노화가 미불은, 고통도 신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껴안는다. 자신의 불완전을 극기하듯 상처에서 진주를 키우고자 했던 예술가 미불.
저자 소개
강석경
1974년 이대 미대 조소과 졸업. 단편 「근(根)」, 「오픈게임」으로 문학사상 제1회 신인상 수상. 소설집 『밤과 요람』, 『숲속의 방』, 장편소설 『가까운 골짜기』,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내 안의 깊은 계단』, 산문집 『일하는 예술가들』, 『인도기행』, 『능으로 가는 길』, 장편동화 『인도로 간 또또』 등이 있다. 『숲속의 방』으로 오늘의 작가상과 녹원문학상을 받고 단편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로 21세기 문학상 수상.
정인 미친 개나리 여름은 다시 돌아보지 않으리 나, 저녁 산책길에 신을 만난다면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