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오군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당최 그가 머물 만한 장소가 못 되었다. 평생을 눌러 지낼 만한 낙원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를 용납할 줄 모르고 배척만 하는 땅에다 계속 그를 붙들어 맨다는 건 도무지 사람의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사한 연분홍 색깔의 진달래 꽃너울 쪽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나는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 잘 가거라, 오군아! —『낙원? 천사?』 중에서 여생을 특별히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우선 지난 삶부터 정리하고 볼 일이다. 말하자면 묵은 작품들을 손봐서 책으로 묶는 일은 지난 삶의 정리 작업인 셈이다. 간절히 소망하건대, 이번 작품집 출간을 계기로 해서 내 삶의 내용이 과거에 비해 실팍하게 달라졌으면 한다. 더욱더 간절히 소망하건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한결 원숙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주류의 맥을 이어온 작가 윤흥길(1942년생)의 소설집 『낙원? 천사?』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작년에 환갑을 맞이한 작가가 “유난스러운 환갑연 대신 준비한 것”이 이 작품집 출간이었다. 작가로서는 \’꿈꾸는 자의 나성\'(1987) 이후 16년 만에 내는 다섯 번째 창작집이자 장편 \’빛 가운데로 들어가면\'(1997) 이후 6년 만의 신작이다. 윤흥길은 1968년《한국일보》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래, \’장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에미\’, \’완장\’ 등 주옥같은 명작들을 독자들에 선보였었다. 90년대에도 장편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1997), 장편\’낫\'(1995)을 쓰는 등 여전히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한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는 중이다. 이 작품집에는, 지방 대학 캠퍼스 안에서 얼어 죽은 한 부랑 청년의 죽음을 취재하면서 죽음 너머에 자리 잡은 인간성의 황폐함을 그려 보이려 한 \’낙원? 천사?\’와 함께, 억압의 시대가 남긴 정신적 상처의 치유를 ‘산불’을 매개로 모색하였던 작품 \’산불\’, 그리고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쌀에 대한 일화와 관념을 묘사한 \’쌀\’ 등 중편 3편이 실려 있다. 윤흥길은 “철저한 리얼리즘적 기율에 의해 시대의 모순과 근대사에 대한 심원한 통찰력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상에 대한 작고 따뜻한 시선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2\’) 대표적으로 \’장마\'(1973)에서는 한국전쟁을 다루면서도, 단순한 비극에 그치지 않고 감동적인 화해의 모습을 형상화하였고,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에서는 평범한 한 소시민의 독특한 성격과 삶을 통해 도시 철거민의 삶의 애환을 담고 있다. \’완장\'(1983)에서는 권력의 속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풍자와 해학을 통해 표현하였으며, \’에미\'(1982)에서도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 온 여인의 고단한 수난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 윤흥길은 “한국 사실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도 지적인 작가, 관조적 묘사력을 발휘하면서 실험가의 면모를 가”(김병익, 문학평론가)졌다고 한다. 이 점은 이번 소설집에 그대로 이어진다. 『낙원? 천사?』에서는 대학 캠퍼스 안에서 얼어 죽은 한 부랑 소년의 죽음을 다루면서, 그것이 사회의 책임이라는 일반적인 문제의식으로 억지로 끌어올리기보다는 인간성의 황폐함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 내고 있다. \’산불\’에서는 고아 출신의 한 대학생이 반체제 운동에 가담하다가 제일 먼저 붙들려 벌을 가볍게 받는다는 조건으로 동지들의 은신처를 대고 나서 배신자로 몰려 세상을 숨어 살면서 방화와 불구경으로 과거 참회와 새로운 현실 적응을 꾀하다가 끝내는 좌절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쌀\’은 한국인의 쌀에 대한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큰 물난리를 겪고 난 후, 이북에서 송출되어 온 구호 쌀을 이북 실향민인 장인 장모에게 나눠 보내려 하는데 도중에 쌀을 여러 사람들에게 빼앗기다시피 한다. 집에 있던 쌀을 퍼담아 가짜 이북 쌀을 만들어 장인 장모에게 드리면서 쌀의 정체, 용도, 내력, 신통력에 대해 묘사한, 체험 섞인 통찰의 이야기이다. 작가 윤흥길은 자신의 소설의 질료를 일단 치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 작가다. 그러면서도 작중의 현실이 은유나 상징의 세계로 고양될 수 있도록 꾸준한 노력을 아울러 계속한다. 이 점은, 『낙원? 천사?』에서 부랑아를 단순히 낙오자나 지체아로 그리지 않고 “천사”의 위치로 고양하려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산불\’에서는 이춘영(1563~1606)의 \’體素集\’ 가운데 ‘소산행(燒山行)’, 방화범의 의식 상태를 쓴 방화 조사관의 칼럼, 진술 조서를 소설 원고처럼 꾸미는 등 단순 방화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지닌 방화로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나 기법 등이 사용된다. \’쌀\’에서도 마찬가지다. \’쌀\’에 얽힌 작중 인물의 일화에서 한국인이 쌀에 관해 갖고 있는 관념을 이끌어 는 주제 식이 그것이다. 작중인물과 서술자(arrator) 의 거리를 두는 것도 윤흥길 소설의 특징 중 하나다. 작중 중심인물이 되는 이는, 서술자이면서 동시에 또다른 작중인물인 ‘나’의 눈과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객관화된다. 이러한 방식의 소설 쓰기는 이미 \’장마\’ 등에서도 채택한 바다. 다시 말해, 『낙원? 천사?』에서는 주인공인 ‘오군’을 학보사 기자의 기억과 회상으로 그려 낸다든지, \’산불\’에서는 방화하고 불구경하기 일삼는 ‘김건식’이라는 청년을 대신해 한 지방 대학 교수인 ‘나’가 이른바 작가의 말을 대신하고 있다. 이렇듯, 서술자가 중심인물의 행동과 말을 대신한다든지 특정한 프리즘을 통해 굴절한다든지 하는 방식은 일정한 효과를 낳는다. 한국어의 고유 어휘를 갈고 다듬는 것도, 또한 우리 시대의 문장가답다. 고유 어휘란 사전에만 등장하는 사어(死語)나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 사어(私語)가 될 수 없다. 윤흥길의 소설에서는 유독 고유 어휘가 많이 등장한다. 또한 윤흥길 소설의 문장은 감칠맛 나고 리드미컬한 것이 매력이다.
낙원? 천사?산불쌀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