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살았고 시인으로 죽었다.”―마리나 츠베타예바
“나는 말의 위력을 안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마야콥스키의 ‘한계 체험’은 삶과 미학을 구별하지 않고 정치적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 모종의 끝까지 가려는 자를, 정말로 고독의 끝까지 밀고 가 버린다.” ― 이장욱(시인)
시라는 예술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혁명의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대표 시선집
● 시라는 예술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혁명의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대표 시선집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시의 정수를 담은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이 민음사 세계시인선 59번으로 출간되었다. 마야콥스키는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미래주의를 이끌었던 혁신적 시를 선보여 러시아 현대 문예사에 위대한 이름을 남겼으며, 명실상부한 ‘혁명 시인’이자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하나로 국가적 존경을 받고 있다.
이번 시선집은 마야콥스키의 창작 세계를 변화 시기에 따라 4부로 나누어 구성하여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정수를 뽑아 고루 담았다. 마야콥스키의 창작 세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역자 조규연 단국대학교 교수가 그 시 세계를 보다 전체적인 조망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시기별 대표 시를 엄선하였으며, 국내 초역인 시도 다수 있어 마야콥스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1, 2부에서는 그를 세계적인 시인으로 자리하게 한, 마야콥스키의 초창기 미래주의 대표작을 소개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이후의 마야콥스키 후기작을 수록한 3, 4부는 시편 중 절반 이상이 국내 초역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혁명 시인’이라는 이름에 가려 자칫 놓치기 쉬운 시인의 고뇌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 시선집을 통해 국내 독자들은 정치와 예술의 통합이라는 어려운 길을 추구하면서도 또한 예술가로서의 영혼을 잃지 않고자 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한 인간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고군분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의 생각,
기름때 묻은 소파에 누운 배불뚝이 머슴처럼
물렁한 뇌로 공상에 잠긴 그 생각을
피투성이 내 심장 조각으로 자극하리.
파렴치하고 신랄한 나, 마음껏 조롱하리.
내 영혼에는 한 올의 흰머리도,
늙은이의 연약함도 없네!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힘으로 세상을 흔들며
스물두 살
잘생긴 내가 가노라.
―「바지 입은 구름」,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나의 영혼은
산산이 찢긴 먹구름처럼
불타 버린 하늘
종루의 녹슨 십자가에 매달려 있나이다!
시간이여!
절름발이 성상화가 그대만이라도
내 얼굴을
시대의 불구자 제단에 그려 주오!
장님이 되어 가는 자의
하나 남은 마지막 눈처럼 나는 고독하오!
―「나」,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나는 말〔言〕의 위력을 말이 울리는 경종을 안다
극장 특별석이 박수갈채로 화답하는 그런 말이 아닌
관(棺)이 불쑥 튀어나와
참나무 네 다리로 걷게 하는 그런 말
간혹 인쇄도 출판도 되지 않고 버려지지만
말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질주해
수 세기를 쟁쟁하게 울리고 시의
굳은살 박인 손을 핥으려 열차처럼 기어든다
말의 위력을 나는 안다
댄서의 굽에 밟힌 꽃잎처럼 하찮아 보일지라도
인간은 영혼으로 입술로 뼈로 이루어진 존재.
―「미완성의 시」,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그의 삶과 시에는 그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모순과 갈등이 내재해 있었다. 그는 혁명의 기관차이길 원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의 상처와 대립과 내적 균열의 표상이 될 운명이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그의 시를 ‘리얼리즘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과 세계의 치명적 이면과 균열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손쉬운 결론으로 봉합하려 들지 않는 미학적 자세를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면 말이다. (……) 이것으로 끝인 것일까? 그럴 리가. 미래의 누군가는 문화사의 ‘박물관’에서 청년 마야콥스키를 꺼내 새로운 힘의 질료로 삼지 않을까? 마야콥스키의 전복적 에너지를 변주하고 변용하여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균열을 전시하지 않을까? 시든 음악이든 영화든 장르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도래할 문화사적 폭풍의 한가운데인 듯, “장님이 되어가는 자의/ 하나 남은 마지막 눈처럼”, 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채로, 고요하고 격렬하다.”
―이장욱(시인), 추천의 글에서
●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미래주의의 기수,
언어를 혁신하고 세계를 바꾸다!
시와 회화의 경계를 섞고 삶과 예술을 통합하다!
혁명의 시대(1905~1917년)는 아방가르드라는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혁신적인 예술을 러시아에 선사했다.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 ‘혁명’과 상응하는 급진적인 예술 실험이 문학뿐 아니라 회화, 음악, 연극, 영화 등 러시아 예술 전 분야에 걸쳐 다채롭게 이루어졌다. 마야콥스키는 이러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특히 미래주의 경향을 이끌었던 상징적 인물이다. 1911년 전업 화가가 되고자 미술 학교에 입학한 마야콥스키는 다비드 부를류크를 비롯하여 이후 문예사를 바꿀, 미래주의를 함께 이끌 동료들을 만난다. 완전히 새로운 언어, 완전히 새로운 예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젊은 예술가들은 “대중적 취향에 따귀를 때리라” 외치며 모든 전통과의 단절을 표방했다.
마야콥스키는 이러한 러시아 미래주의의 기수로서 파괴적인 영향력의 문예 운동을 주도했지만, 또한 동료들과 차별화된 지점을 보여준다. 급진적인 언어 실험의 결과물인 러시아 미래주의 시는 대부분 난해하고 심지어 내용 파악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야콥스키에게 시란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밀폐된 언어 실험이 아니라, 현실 시공간과의 내면적 소통을 통한 ‘삶의 예술’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시 언어는 특정 부류의 자족적인 예술 실험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되고 소통하며 그로써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로 빛난다.
신경이 곤두선 바이올린,
졸라 대다가 이내 아이처럼
울어 댔다.
참다 못해 북이 하는 말.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다 지쳐
바이올린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분주한 쿠즈네츠키 거리로
황급히 떠났다.
가사도 없이,
박자도 없이
울고 있는 바이올린.
(……)
“머저리,
울보,
눈물이나 닦아!”
나는 일어나
비틀비틀 악보를 지나,
두려움에 몸을 굽힌 악보대를 지나 기어갔고,
무슨 까닭인지 외쳤다.
“맙소사!”
나무 목에 매달리며 말했다.
“바이올린아, 알고 있니?
우리는 지독히도 닮았어.
나 역시
외쳐 본들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어!”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내가 좋아했거나 좋아하는 당신들,
성화(聖畫)처럼 동굴 속 영혼에 보존된
당신들 모두를 위해
나는 시가 가득한 해골을
축배의 와인 잔처럼 들어 올리리.
자꾸만 드는 생각.
내 삶의 끝에 총알의 마침표를
찍는 게 낫지 않을까.
만일을 대비해
나 오늘
고별 연주회를 열리라.
―「척추 플루트」,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마야콥스키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그가 시인이기 이전에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였으며, 그의 삶과 창작에서 시와 회화는 별개의 장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빛과 색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회화적 인식은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그에게 회화는 창작의 주된 주제이자 형식이었다. 미술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만들어 낸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는 지면에 국한되지 않는 방향의 예술로 뻗어나간다. 그의 창작 세계에서는 광선주의, 입체파, 구축주의 등 회화의 영역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나는 컵으로 물감을 뿌려
일상의 지도를 단숨에 지워 버렸다.
나는 아스픽 접시에서
대양의 비뚤어진 광대뼈를 보여 주었고,
양철 물고기 비늘에서
새로운 입술의 부름을 읽었다.
그런데 당신은
빗물 홈통을 플루트 삼아
녹턴을
연주할 수 있는가?
―「그런데 당신은 할 수 있는가?」,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 혁명 시인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예술가의 고뇌를 만나다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은 시인에게 세계의 혁신을 의미했다. 혁명 이후 창작을 포기하거나 도피를 선택했던 이들과는 달리, 마야콥스키는 정치와 예술을 통합한 혁신을 실천하고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선전 선동 시와 국영 기업의 광고 포스터 작업을 하는 등 큰 변화를 감내한다. 게다가 그는 명석함과 자유분방함을 타고난 궁핍한 십 대 소년으로서 일찍이 자연스레 마르크스주의 혁명에 끌렸으며 사회주의 사상 선전 활동으로 인해 성년이 되기 전 이미 세 차례의 수감 생활을 겪은 바 있다. 이러한 마야콥스키의 이력은 사후 그를 ‘혁명 시인’으로 만드는 매력적인 재료가 되었다. 소비에트 비평의 틀에 박힌 서사 속에서 시인은 영웅이 되었으나, 이는 동료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말처럼 ‘제2의 죽음’, 즉 시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당했을 뿐이다.
그러나 1917년 이전의 소위 미래주의 시기와 비교하여 지금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해, 예술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그저 폄훼하고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 것 또한 온당한 평가는 아니다. 정치와 예술의 딜레마는 마야콥스키의 생애 전반에 반복되고 있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억압이 강할수록 자유로운 영혼의 펄떡임은 더욱 드러나기 마련이다. 소비에트 체제 아래 격변의 현실을 살아내며 예술가로서의 창조의 고갱이를 지키고자 했던 고군분투는 이 시기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인들이란
노련한 족속.
시?
좋지.
압운만 있으면 그만인 것을.
5월에 관한 시보다
더
저속한 건 없었어.
―「5월 1일」,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믿고자 했던 정치 혁명에 의해 예술 혁명이 폐기되고, 더 이상 ‘목청을 다하여’ 노래할 수 없는 시대의 암흑을 마주한 마야콥스키는 자신의 ‘창작 2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이러한 비극적 인식을 담은 유언시를 대중 앞에서 낭송한다. 이 마지막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1930년 4월 14일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그의 창작은 내용과 형식, 인간과 시인, 삶과 예술, 나아가 정치와 예술 간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발전했다. 그의 죽음은 혁명 이후 ‘12년간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고 지적했던 동시대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또한 그가 “시인으로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후반기 창작 세계는 실존의 마야콥스키와 시인 마야콥스키가 치열하게 분투한 현장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닌 시의 종말, 그리고 20세기 초 위대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종언이자 예술 혁명으로서의 미래주의의 끝이었다.
나 역시
선전 선동 시는
신물 날 지경.
나 역시
당신들에게 로맨스를
지어 줄 수 있었건만.
그것이 돈벌이도 되고
매력적인 일이니.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누르고
내 노래가 흘러나오는
목구멍에
올라섰다.
―「목청을 다하여」,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1부 미래주의: 시인의 도시 풍경화
밤 13
아침 14
항구 16
거리의 시 17
거리에서 거리로 18
그런데 당신은 할 수 있는가? 20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비극: 프롤로그 21
간판에게 24
극장 25
페테르부르크에 관한 몇 마디 26
여인의 뒤에서 27
나 29
포괄적인 봄 풍경 35
피로 때문에 36
사랑 37
우리는 38
갖은 소음들 39
도시 대지옥 40
자, 받으시오! 41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네 42
자동차 안에서 43
멋쟁이의 재킷 44
들어 보라! 45
그래도 어쨌든 47
또다시 페테르부르크 49
2부 전쟁의 노래
전쟁이 선포됐다 53
엄마, 그리고 독일인들이 살해한 저녁 55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 58
나와 나폴레옹 61
바지 입은 구름 67
척추 플루트 69
당신들에게! 70
판관에게 바치는 찬가 72
과학자에게 바치는 찬가 75
건강에 대한 찬가 77
그렇게 나는 개가 되었다 78
근사한 난센스 81
이보시오! 84
모든 것에 부쳐 87
릴리치카! — 편지를 대신한 시 95
싫증 99
암흑 103
이튿날 107
작가가 사랑하는 자신에게 바치는 글 110
마지막 페테르부르크 동화 114
러시아에게 117
작가 동지들 119
책임을 묻자! 123
3부 혁명의 시, 시의 혁명
우리의 행진 127
먹구름 조각 129
말에 대한 올바른 태도 130
혁명의 송가 133
예술 군령 136
기뻐하긴 이르다 138
노동자 시인 141
상대편에게 144
전우의 안부를 전하며, 마야콥스키 149
우리가 간다 151
여인을 대하는 태도 154
하이네처럼 155
내전의 마지막 페이지 156
쓰레기에 대하여 158
예술 군령 2호 162
4부 소비에트 자화상
회의 중독자들 169
개자식들! 173
나는 사랑한다 183
5월 1일 201
농촌 통신원 206
노동 통신원 209
5월 212
집으로! 216
세르게이 예세닌에게 222
진보의 최전선 234
의제로 상정하라 240
인조인간들 244
종이 혐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가 느낀 점) 248
최고의 시 253
레나 258
취향 차이에 관한 시 265
타티야나 야코블레바에게 쓰는 편지 266
레닌 동지와의 대화 272
나는 행복하오! 277
목청을 다하여 — 서사시에 대한 첫 번째 서문 283
미완성의 시 295
작가 연보 307
작품에 대하여: 나는 시인이다, 그것만으로 흥미롭다 (조규연) 311
추천의 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청년 전위의 초상 (이장욱)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