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4년 9월 13일
ISBN: 978-89-374-1648-4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4x194 · 384쪽
가격: 22,000원
분야 한국 문학
故김미현 평론가 1주기 추모 비평 선집
동시대 문학과 뜨겁게 호흡해 온
문학평론가 김미현의
다시 읽고 싶은 열 편의 글
서문 강지희 5
이브, 잔치는 끝났다 -젠더 혹은 음모 19
다시 쓰는 소설, 덧칠하는 언어 -패러디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의식 56
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 -1990년대 소설 속의 성 83
불한당들의 문학사 -1990년대의 악마주의 소설 114
이브의 몸, 부재의 변증법 145
수상한 소설들 -한국 소설의 이기적 유전자 174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에게 207
주체의 궁핍과 ‘손’의 윤리 235
정의에서 돌봄으로, 돌봄에서 자기 돌봄으로 271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과 테크노페미니즘 -윤이형과 김초엽 소설을 중심으로 306
에필로그 341
더 빛나는 그림자 343
나‘들’의 문학‘들’ 346
암리타가 있는 키친의 풍경 358
김미현은 작품의 생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작가들의 평론가’이자 드물게 독자가 있는 평론가였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그의 글은 뜨거운 열정, 논리적인 전개, 박력 있고 문학적인 표현 등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균형 속에서 김미현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낳았다. 지난해 9월, 아직 이른 나이인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미현 평론가를 향한 그리움이 여전히 짙은 이유다.
故김미현의 1주기를 추모하는 비평 선집 『더 나은 실패』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서 시작되어 2020년대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그의 비평적 여정은 여성의 언어와 몸과 정체성에 뒤엉킨 환상들을 찢어내며 새로운 길을 터왔다. 그러면서도 그 비평적 여정은 유난히 경쾌하다. 이 특유의 경쾌함은 삶과 문학 모두에서 긍정과 부정을 단순히 나누지 않고 ‘부정 자체의 긍정’을 응시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강지희 평론가가 선별한 10편의 글은 김미현식의 ‘살게 하는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표 글이다. 더불어 그의 마지막 에세이 2편 및 인터뷰 등의 글을 함께 수록한 이 책은 김미현 문학의 생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것이다.
■ 한국여성문학사의 축약본
「이브, 잔치는 끝났다」는 한국여성문학사의 축약본이다. 식민지 시기 김명순, 김일엽, 나혜석에서 시작된 제1기의 여성문학, 1960~1970년대 활발하게 활동했던 박경리, 손소희, 강신재, 한무숙, 한말숙 등이 끌어갔던 제2기의 여성문학, 1980년대 중반 이후 불거져 나온 여성 문제와 함께 호흡했던 제3기의 여성문학 전체를 점검한다. 집약적인 정보로 이루어진 이 글의 매력은 마지막 결말부에 놓인 1990년대 여성문학에 대한 냉혹한 반성과 통찰에 있다. 주목과 잔치에 현혹되는 대신, ‘여성 문학은 얼마나 변하지 았았는가’ 경계하며 다시 묻는 데서 김미현 평론 세계는 시작된다. 「다시 쓰는 소설, 덧칠하는 언어」는 여성 패러디 소설을 통해 여성적인 언어의 존재 가능성을 탐색한다. 여성만을 위한 언어가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아이러니의 언어와 해체적 언어를 횡단하며 여성 정체성은 새롭게 탈구축될 가능성을 갖는다. ‘거울’이 아닌 ‘반사경의 언어’가 완성된다.
■ 1990년대 문학에 대한 매력적인 진단
「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와 「불한당들의 문학사」는 1990년대 문학에 대한 매력적인 진단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적인 평론이다. 「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는 1990년대 소설 속의 성(性)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에 주목하며, 신세대 문학을 편견으로부터 구출하는 구제 비평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를 주조한 진정성의 기원이 뜨겁고 불온한 정열의 정신성이 아닌, 무감정한 차갑고 가벼운 섹스의 육체성에 있다는 주장은 지금 보아도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이 글과 나란히 「불한당들의 문학사」가 읽힌다. 김영하, 백민석, 배수아의 서사에서 다채로운 성적 실천과 섹슈얼리티는 사회 전반의 권력에 대한 일종의 반란이자, 교감이나 정념이 표백된 채 심미적 주체성을 도모하는 방안이 된다. 두 글에서 주목하는 비정상적인 성과 악은 ‘미학적 부정성’의 형태를 띤 1990년대 문화정치적 저항을 정확히 짚어낸다.
■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에게
「이브의 몸, 부재의 변증법」에서는 오염되고 박탈되고 변이가 일어나기에 괴물로 취급되어 온 여성의 몸의 재현 양상에 대해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부터 에코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며 이론을 응용해 설명한다.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에게」는 가변적인 구성물로서의 젠더 정체성을 대표하기에 김미현의 평론에서 중요하게 위치했던 안티고네의 형상을 가장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며 기존의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으로 형질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날카롭게 포착한 글이기도 하다.
■ 한국소설의 이기적인 유전자
「수상한 소설들-한국소설의 이기적 유전자」는 기존의 한국문학 비평이 잘 들여다보지 않은, 보수적인 대중성을 지닌 작품들의 세부를 분석함으로써 관성이나 추상화된 악을 문제 삼는다. 한국 소설의 ‘이기적 유전자’로 꼽힌 대상 텍스트들은 바로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김훈의 『남한산성』, 박민규의 『핑퐁』이다. 제각기 다른 세대를 대변하는 남성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한국문학에서 언제나 살아남는 이기적 유전자는 바로 강력한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라는 통찰에 이르는 과정을 보는 것은 짜릿한 경험이 되어 준다.
■ 포스트맨(Post-Man) 시대의 윤리
「주체의 궁핍과 ‘손’의 윤리」는 ‘견고한 주체성과 당위적 윤리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이 글은 소설에서 ‘연대’ ‘용서’ ‘치유’와 같은 이상적인 윤리로 향하는 당위적 결론을 손쉽게 확인하는 대신, 이상적인 윤리의 수행이 현실에서 얼마나 불가능할 수 있는지 그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포스트맨(Post-Man) 시대의 윤리’를 말하는 이 평론은 2000년대 이웃에 대한 절대적 환대의 윤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기도 하다. 「정의에서 돌봄으로, 돌봄에서 자기돌봄으로」는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며 다각도로 펼쳐진 돌봄 담론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다. 이 글은 돌봄에 헌신과 희생 등의 이상적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돌봄 윤리 내부에서도 긴장과 균열이 있음을 먼저 포착한다. 두 편의 글을 이어 읽으면, 외부의 규준에 따르던 이상적 윤리에서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는 긍정적 윤리로 거듭나는 과정이 읽힌다.
■ 테크노페미니즘으로의 탐색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과 테크노페미니즘」은 한국 SF가 중흥기를 맞이한 2020년대에 더 널리 읽히고 인용될 선구적인 평론이다. 이 글은 윤이형과 김초엽 소설을 중심으로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이 ‘지구-되기’, ‘모성-되기’, ‘기계-되기’의 층위에서 어떻게 젠더 정체성을 찾아가는지 살펴본다. 이를 통해 완벽하고 절대적인 이상향으로서의 지구에 대한 향수나 복귀 자체가 환상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모성 또한 자연적이고 본질화될 수 없는 상황적이고 물질적인 문제임을 강조하며, 진정성의 아포리아를 보여준다. 여성과 과학 기술이 비관/낙관, 긍정/부정, 지배/억압 등의 이분법적이고 고정된 관계를 유지하기보다 흔들리며 새로운 정치적 미래를 탐색해나가는 ‘테크노페미니즘’은 기존 페미니즘을 산뜻하게 깨뜨린다.
■ 작가의 말에서
문학에서 성공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실패만을 반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뮈엘 베케트의 “다시 시도하기, 다시 실패하기, 다시 더 잘 실패하기”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더 나은 실패’는 문학에서 엄청나게 위로가 되는 명제입니다. (…)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가 필경사가 되기 전에 했던 일은 우체국에서 ‘배달 불능 편지dead letter’를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배달 불능 편지란 수취인이 불명(不明)이어서 배달할 수 없는 편지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때 일어나는 문학적 반전은 배달이 가능한 편지가 오히려 해석이 완료된 ‘죽은dead’ 문학이고, 배달이 불가능한 편지는 아직 읽히지 않았기에 ‘죽지 않은un-deae’ 문학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배달 불능 편지는 전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른 누구에게 전달될 수도 있는 것, 그래서 새롭게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더 나은 실패’에 해당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오늘보다 더 낫게 실패하겠습니다. ‘오늘’의 그림자까지 담아내는 ‘내일’의 그림자 문학을 지향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둠이 보인다는 의미에서의 ‘그림자의 빛’을 놓치지 않겠습니다.■서문에서
이렇게 김미현의 평론은 삶에 대한 하나의 철학이자 지침으로 스승이 되어 왔지만, 동시대 문학과 긴밀하게 호흡할 때면 허심탄회하면서도 통찰력이 매력적인 친구이기도 했다. 여러 담론을 정교하게 엮어 작품이 놓일 자리를 정확히 위치 짓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러니 여전히 다시 즐겁게 읽을 글들이 많다. 좋은 신화소가 시대를 뛰어넘어 여러 서사로 변주되며 살아남듯, 커다란 잠재성을 품고 있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이들의 눈과 손이 닿으리라 생각되는 글 열 편을 추렸다.
-강지희(문학평론가)
■ 본문에서
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여성 문학은 ‘차이’가 아닌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진정한 여성 문학은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와 같다는 것, 그동안 여성 문학에서 이룬 것은 엄청난 승리를 유예시키는 하찮은 승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 여전히 여성은 아버지 제우스의 머릿속에서 갑옷을 입고 태어난 아테나이거나 아폴론에게 순종하지 않은 죄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벌을 받은 카산드라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여성의 운명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낮에 짠 옷을 밤에 다시 풀어야 하는 페넬로페와 닮아 있다는 것, 이처럼 여성들은 아직도 해피엔딩의 영화가 아니라 비극적인 신화 속에 더 많이 산다는 것 등. 이런 사실을 확인해 가는 작업은 20세기의 한국 여성 문학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좌절과 절망을 곡비처럼 대신 울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22쪽)
정신은 복화술사처럼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육체를 조종하고 있다. 때문에 신세대들의 육체는 햇빛이 비치면 양지로 바뀌는 정신의 “그늘”이 아니라 밤이 되어야만 나타나면서 영원히 빛은 될 수 없는 정신의 “그림자”에 가깝다. 그래서 정신은 이제 육체를 통해서도 강화된다. 신세대들은 정신을 보여 주기 위해 육체를 노출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대와 성은 “밀월” 관계가 아니라 “냉전” 관계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확인 과정을 통해서 옷은 벗었지만 그래도 육체가 드러나지 않는 성 담론의 딜레마나 신세대 문학이 그려 내는 성의 성감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86쪽)
1990년대는 너무나 진부하다. 1990년대 문학에 대한 논의는 더 진부하다. 1990년대 초부터 일찌감치, 그리고 활발하게 진행된 1990년대에 대한 논의가 ‘이미, 벌써’ 1990년대를 정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0년대 초 이후는 1990년대의 덤이고, 부록이며, 잉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 속에서 조로할 수밖에 없었던 1990년대는, 그래서 ‘아직, 결코’ 그 실체가 온전히 드러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조로는 노쇠보다 더 나쁘다. 엄살과 과장으로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되찾아 주어야 할 것은 이처럼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 버린 1990년대라는 “청춘의 꽃”이다. (114쪽)이런 맥락에서 ‘불가능한 주체’가 아니라 ‘새로운 주체’에 대한 논의로 초점을 이동시킨다면 주체의 ‘권력’이 아닌 주체의 ‘궁핍’이 주체에 관한 재논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주체의 궁핍이란 주체 스스로도 자신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절대적 권력을 소유한 주체와는 다르게 “머무름, 참고 견딤, 기다림, 침잠, 은인자중” 등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주체’가 바로 궁핍한 주체에 해당한다. 때문에 이런 불완전성‧불투명성‧불균형성으로 대변되는 주체의 궁핍은 주체의 권력을 강조하면 할수록 더 궁핍해지는 모순을 지닌다. 주체에 대한 거부가 아닌 비판을 통해 오히려 ‘주체적인, 너무나 주체적인’ 상태를 대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36쪽)
이런 돌봄의 윤리의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이 바로 ‘자기 돌봄’의 윤리다. 돌봄 윤리 자체가 일방적이고 이타적인 ‘상실’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자기 보존적인 ‘선택’에 토대를 둔다는 측면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돌봄 윤리에 관한 논의들이 돌봄 제공자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돌봄 제공자 또한 돌봄을 받아야 할 돌봄 의존자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반성이 반영된 개념이기도 하다. 돌봄 행위에서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기에 ‘돌봄 제공자-돌봄 의존자’의 상호작용 아래에서 돌봄의 취약성과 의존성을 인정할 때만이, 그리고 그런 돌봄의 한계를 자기 돌봄의 행위로 극복할 때만이 진정한 돌봄 윤리가 성립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돌봄 윤리에서조차 제외되었던 ‘타자의 타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2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