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경철이 지난 5년 동안 발표한 10편의 단편들을 묶어 내놓았다. 이 소설집에는 단편소설의 묘미와 작가 특유의 따뜻한 감성이 느껴진다. 현대라는 시대의 변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파편과도 같은 삶을 경쾌하게 담아냈다. 표제작인 ‘유년의 자리’에서는 어린 시절 묵시하천 주변의 시장통에서 좌판을 벌였던 노파와 유년 시절의 기억이 하천의 복개 공사를 전후로 대비되는 구조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다시 찾은 묵시하천에서 주인공은 노파를 다시 만난다.
1994년 《세계의 문학》에 단편소설 「매향」을 발표하며 등단한 박경철의 신작 소설집 『유년의 자리』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지난 5년 동안 발표한 10편의 단편들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서는 단편 소설의 묘미와 작가 특유의 따뜻한 감성을 물씬 느낄 수 있다. 박경철은 그동안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행동이나 의식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존재 상황을 명쾌하게 형상화하면서도, 집요한 묘사력을 인정받았던 작가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현대라는 시대의 변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파편과도 같은 삶을 단편소설의 짧은 구조 안에 경쾌하게 담아내고 있다. 표제작인 『유년의 자리』에서는 어린 시절 묵시하천 주변의 시장통에서 좌판을 벌였던 노파와 유년 시절의 기억이 하천의 복개 공사를 전후로 대비되는 구조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다시 찾은 묵시하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노파는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마녀’라고 생각했던 노파의 이미지와 겹치고, 묵시하천 주변에서 만난 이정표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통하는 ‘이정표’가 된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박경철의 개성적인 묘사와 비유가 여전히 돋보이는데 이런 장치들은 박경철의 독특한 문체적인 특징과 맥을 같이 한다. 이정표를 기점으로 자리 했던 다리가 이제 막 내 유년의 기억의 통로로 되살아나, 그 다리 건너편 제방을 따라 늘어선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과 그 뒷벽으로 자라던 무성한 담쟁이덩굴, 그리고 저 먼 하늘의 별들 사이를 떠돌았을 한 소년의 삶에 대한 비의와 그 도구들로 이어졌다. 오늘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흐리듯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붓던 그날, 그 모든 일들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돌이킬 수 없는 지표인 양 그곳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이정표는 하천 복개 공사와 재개발 속에서도 불쑥 고개를 내밀고 서 있었다. ―『유년의 자리』 중에서 박경철 소설의 문체는 ‘은폐함으로써 돋보이게 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은폐-기억들이 혼잡한 포개기와 겹치기를 통해, 박경철은 현실과 환상을 가장 좁은 공간 속에 가두어 놓는 데 성공했다. 박경철의 텍스트 내에서는 현실의 이름으로 환상을 매도할 수도 없고, 꿈의 이름으로 현실을 비난할 수도 없다. 현실과 환상이 이렇게 뒤엉켜 있으니, 제대로 살려면, 환상적 현실을 살거나 현실적 환상을 겪어야 한다. 그것이 이 헛된 기억들이 주는 깨달음이자, 작품들이다. ―정과리(문학 평론가) 박경철의 이번 작품집에서는 또 가족과 그 구성원들에 얽힌 이야기가 주된 테마로 다루고 있다. 소통이 단절된, 혹은 ‘경계’에 머물러 있는 가족이 빚어내는 불협화음과 그 속에서 서로에게 가하는 상처를 통해 현대적인 가족의 편린을 형상화하는 작품으로는 먼저 「핸드폰 가족」을 꼽을 수 있다. 상모 아버지는 본가의 처자식을 놔두고 핸드폰으로만 연락이 되는 딴살림을 차린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온 상모 아버지의 죽음으로 핸드폰 속의 가족도 사라져 버렸다. 핸드폰으로 상징되는 세계는 현실이 아닌 허구지만, 실제로 상모 아버지는 현실보다는 허구의 세계로 기운 듯하다. 평생 아버지 역할을 등한시하다가 병든 몸으로 가족들에게 돌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상모 형제들에게 아버지는 저버릴 수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짐과 같은 존재다. 「경계」에서는 역으로 아버지의 입장에 서 있는 노인이 주인공이다. 배를 타고 멀리 떠돌던 평생을 지낸 노인은 나이 들어, 늙은 아내가 있는 집으로 찾아든다. 그러나 따뜻한 아버지의 품에서 보호받지 못한 자식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다음이다. 그나마 아들 둘을 앞세운 아내마저 죽기를 소원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등진다. 이제 고향 마을의 개발 공사로 몇 푼 안 되는 보상금만 쥐고 시내로 떠나야 하는 노인은 염소만도 못한 남편이었다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가족인 염소를 목매달아 죽인다. 벗어나거나 단속하는 일로, 넘나드는 일로 서로 상처를 입히던 시절에는 거기 있는지조차 몰랐던 경계였다. 그러나 무너지고 흩어져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지경에 이미 가족들 모두가 제 갈 길로 흩어져 새로 이룬 가정을 꾸려가기에 정신없었다. ―「경계」 중에서 작가 박경철의 직접적인 언술인 듯한 위의 구절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젊은 시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혹은 외유하던 가족 성원들이 머뭇거리던 어디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언제나 그렇게 ‘경계’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현대적인 가족의 불협화음 속에서 자라난 젊은이들은 성장을 거부하면서 서른 살이라는 나이를 피해 날아가 버리고 싶고(「피터팬의 비행」), 공범이었던 친구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따뜻한 곳에서 편안하게 사시라는 뜻으로 그 친구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왜곡된 가족애를 보인다(「시간의 안내자」). 박경철의 이번 소설집에서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묘사와 비유의 무게가 훨씬 덜어진 반면에, 단편 소설다운, 단선적이지만 유기적으로 짜인 서사 구조와 플롯을 바탕으로 각각의 작품들이 제 나름의 재미와 감동을 전해 준다.
유년의 자리 겨울 채집 핸드폰 가족 피터팬의 비행 시간의 안내자 거짓말 권태 겨울 광장 경계 향연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