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 소설. “하지만 내가 잠에서 깼을 때에는 옆에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내가 꿈을 꾼 것일 뿐인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바지가 벗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조금 전의 일이 사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그날 잠에서 깬 곳은 전날 내가 잠들었던 서장의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돼지우리였다.”
작중 현실과 허구의 환유적인 구조 – 꿈속에 꿈속에 꿈속에…… 표제작인 「꿈」에서뿐 아니라, 이번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에는 등장인물들이 꾼 ‘꿈’ 이야기가 등장한다. 영화나 소설에서 ‘꿈’ 혹은 ‘거울’은 현실의 반영인 동시에, 현실과 허구에 경계를 짓는 구조로 이용되곤 한다. 작가 정영문은 작중 현실에서 파편화된 의식을 ‘꿈’에까지 연장시키는 효과를 꾀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현실에 더 많은 현실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현실의 연장선에서 등장인물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장치로 꿈을 이용한다. 바닷가에서 잠시나마 편안한 시간을 가지려는 주인공의 꿈속에서는 휴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침대를 차지해 버리고(「파괴적인 충동」), 정체 모를 남자의 방문과 모호한 부탁에 혼란스러워하는 ‘나’의 심리를 반영하듯 좁쌀만 한 알에서 부화한 벌레들이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꿈을 꾸기도 하고(「아늑한 궁지」), 입체감 없는 그림자처럼 살던 부인이 빨래를 널어놓기만 하면 날아가 버리곤 하는(「습기」) 꿈을 꾼다. 자칫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로 흘려 버릴 수도 있을 꿈 이야기는 작중 인물들의 심리를, 의식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한편 표제작 「꿈」에 이르러서는 꿈의 구조가 전체 작품 구조에 반영되는 환유적인 기능으로 사용된다. 꿈속에 또 다른 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종자를 찾아서 어느 섬에 들어간 주인공은 묘한 섬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혼란스러워하다가, 자신이 돼지가 되는 꿈을 꾼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가 섬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꾼 꿈이었음이 결국 밝혀진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아직 섬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고 앞으로 그 섬에 들어갈 것이다. 거기서 소설은 끝난다. 꿈속에서와 같은 일을 경험할지는 모를 일이다. 독자들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작중 현실이고, 소설이고, 허구인지 혼돈스러울 따름이다. 여기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작중 현실이 어디까지고, 꿈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런 자의식적 질문은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허구에 관한 질문이다. 틀 안의 틀, 이야기 속의 이야기, 꿈속의 꿈, 허구와 현실이라는 각각의 세계가 갖고 있는 경계에 대한 독자의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이는 미장아빔(mise en abyme)이라는 미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장아빔은 작품 안에서 그 작품을 통한 방식이나 구조를 통해 전체를 가리키는 요소가 반향되는 것, 특히 그 반향이 무한정으로 되풀이되거나 작품 그 자체에 가공적, 상상적으로 포함되는 경우를 말한다. 실종자를 찾아 떠난 섬에서 자신의 존재가 실종되는 꿈을 꾸고, 꿈속에서 자신이 다른 실종자처럼 돼지가 되고, 그 모든 이야기가 꿈이라는 것은 하나의 구조가 전체 구조를 반향하는 혹은 반복하는 방식인 것이다. 독자들은 이런 구조에서 어디까지가 작중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혼란스럽고, 결국 허구일 수밖에 없는 소설 속에서 또 다른 허구의 구조를 발견하게 되면서 일종의 환유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부분이 전체를 반영하는 환유는 인접하는 말들이 만드는 수사적 장치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환상과 관념의 수사 정영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은 지배적인 사회 질서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혹은 그런 것들에 전혀 무관심한 뒤틀린 사람들로 세상을 냉소와 절망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은 자신들이 부딪히는 현실에 대해 좌절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으면서 사뭇 사소해 보이는 일상을 살아간다. 작가는 그런 일상에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들의 조각난 의식의 파편을, 행동을 무감한 시선으로 그려 나간다. 각각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죽은 사람의 의복」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사 갈 집에서 만난 여자의 죽은 남자 친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상상계의 욕망에 사로잡혀 여자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에 빠진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그런 욕망은 원초적인 욕망을 발현하는 실재계는 벗어났지만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한 상상계의 욕망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무의식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들은 작품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파괴적인 충동」에서는 그런 욕망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테니스 코트에서 죽어 가는 쥐를 내려치기도 하고, 돈을 빼앗은 아이를 돌로 내려쳐 정신을 잃게 만들기도 하고, 인공호흡 장치를 제거해서 뇌사 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급기야 스스로 감전을 느껴 보겠다며 전등에 손을 넣기도 한다. 실종, 죽음, 자살 등 일견 절망적이고 암울한 사건들을 소재로 작가는 감정적인 동요 없이 담담하게 서술한다. 정영문의 문체는 간결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은 것으로 이름 나 있다. 작가는 이런 문체에 대한 의도적인 사용을 “냉소와 절망을 드러내지만, 실제로는 한편에서는 유머와 능청으로 지탱되기도 하는 나의 소설과 문체는 철학적이거나 지적이어서라기보다는, 주로 긴 호흡을 요구하는, 비비 꼬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종결 부호를 한없이 밀어내는 듯한 문장들을 사용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이유로 정영문의 소설은 지루하다거나, 장황하다거나, 난해하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의 변(辯)대로 그의 문체는 뒤틀린 인물들이 처한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우며 소소한 일상을, 파편화된 의식을 서술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어떤 것들은 서사가 전혀 없이 짧은 생각만으로 되어 있어, 소설도 이야기도 아닌 듯이 보이지만 소설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정영문이 구사하는 언어는, 전통적인 소설에서는 만나기 힘든 인상적인 환상과 관념을 보여준다.”고 평한 바 있다. 한국의 문학적인 토양에서는 다소 낯설고 어색하게 받아들일 소지가 있는 정영문의 소설들은 문학의 전통성과 토착성만을 강조하던 기존의 문학관에 도전하는 실험적인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실험성은 일관된 작가 의식의 표백으로 이제 자리를 잡은 듯하다. 정영문의 소설은 새로움 혹은 색다름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서 그의 문학적 실험과 사유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평가를 받을 만한 경지에 이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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