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성문학사연구모임, 김양선, 김은하, 이선옥, 이명호, 이희원, 이경수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4년 7월 5일
ISBN: 978-89-374-5687-9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5x215 · 712쪽
가격: 24,000원
시리즈: 한국 여성문학 선집 7
분야 한국 문학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최초의 기준!
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
■ 7권 성차화된 개인과 여성적 글쓰기 1990년대
문학사의 주변에서 중심부로 진입한 여성문학
1990년대 여성문학은 한국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주변적 위치를 넘어 문학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여성 글쓰기의 실험은 시, 소설, 희곡을 망라하는 다양한 장르에서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980년대 운동권 문학에 나타났던 광장의 민주주의를 방의 민주주의와 접속시키고 젠더화된 개인으로서 여성의 자유를 실험한 것은 이 시기 여성문학의 지향점이자 성취였다. 그러나 젠더화된 개인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로막는 사회적 힘들과의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1990년대 한국 여성문학은 협소한 계급적·민족적 이데올로기에 갇혔던 정치성 범주를 젠더적 시각에서 확장했으며, 이를 통해 여성적 글쓰기를 실험하고 일정 정도 소수자적 문제의식을 포용해 들였다. 어느 때보다 다채롭고 풍성한 여성문학의 결실은 이런 시각의 확장에서 비롯되었다.
■ 차례
책머리에 4
시대 개관
성적 주체로서 개인의 발견과 여성적 글쓰기의 실험 16
천양희 38
바람 부는 날 40
최승자 42
하안발 5 44
김언희 45
얼음여자 47
김정란 49
내가 아무렇게나 죽인 여자 51
이연주 53
매음녀 1 55
최윤 57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59
하나코는 없다 145
김혜순 178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180
여자들 183
엄인희 186
그 여자의 소설 188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240
최정례 255
햇빛 속에 호랑이 257
노혜경 259
레이스마을 이야기 — 할머니의 앞치마 261
이남희 263
플라스틱 섹스 265
은희경 308
새의 선물 310
그녀의 세 번째 남자 334
박서원 402
엄마, 애비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404
마리아가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주는 메시지 407
최영미 410
서른, 잔치는 끝났다 412
전경린 414
염소를 모는 여자 416
공선옥 480
목마른 계절 482
공지영 515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17
무엇을 할 것인가 527
김인숙 552
칼날과 사랑 554
신경숙 556
배드민턴 치는 여자 558
외딴방 587
허수경 597
혼자 가는 먼 집 599
불우한 악기 600
배수아 602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 604
이수명 649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651
나희덕 653
어린것 655
하성란 657
치약 659
한강 683
내 여자의 열매 685
송경아 686
바리—길 위에서 688
엮은이 소개 708
집필에 참여한 연구자들 710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최초의 기준!
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을 엮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여성주의와 여성문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사 서술을 목표로 2012년 결성한 모임으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성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한 가지 명확한 의문과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문학사 서술은 여성주의 운동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탈구축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문학사 탈구축 작업은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적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문학사에 깃든 국민·국가, 남성·엘리트, 문학중심주의 등을 걷어내고 여성과 소수자 문학을 문학사에 반영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 한국에도 문학사 탈구축 작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여성문학사 서술은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굳건하게 형성되어 오는 동안, 여성문학사는 서술을 시작할 텍스트 선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문학은 그 전통을 이어 왔음에도 역사적 계보와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오랜 역사 동안 여성 작가의 ‘저자성’과 여성문학의 ‘문학성’은 의심받았으며,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어 왔다. 오늘 등장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한국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에 없던 여성의 기준과 관점으로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의 계보를 집대성하고, 제도 문학 중심의 구분에서 벗어나 장르 제한 없이 여성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다.
‘최초’는 ‘다음’을 약속한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 이후 본격문학과 국민문학을 넘어 대중문학과 퀴어문학, 디아스포라문학을 포괄하고 해외 학회와 협업한 다양한 선집을 후속 과제로 남겨 두었음을 밝히며, 시대마다 문학 공동체마다 다시, 그리고 새롭게 쓰일 새로운 문학사의 탄생을 예고한다.
■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문학사는 가장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문학의 영역이다.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고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문학 교육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문학사 교육’이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그 이유로 과거 국가 권력은 문학사를 ‘민족’과 ‘시민’을 양성하는 첫 번째 도구로 삼았으며, 또한 같은 이유로 문학사는 민주화 이후 가장 먼저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1980년대 서구로부터 시작해 2000년대 한국 사회에도 민족과 이념 중심의 ‘남성 중심의 문학사’를 해체하고 새로 쓰는 ‘문학사 탈구축’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성과는 미약했다. 새로운 문학사 서술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문학사는 문학 연구와 교육 모두에서 ‘죽은 지식’으로 외면당해 왔다. 그 역사 끝에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등장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를 떠받친 문학, 역사, 학문을 둘러싼 오랜 기준들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의심하고 새로이 들여다보며 완성한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시작이다.
■ 시대가 만들고, 시대를 만든 작품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최초’라는 단어가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원칙’으로 작용한 책이다. ‘여성문학의 진일보를 이룬 작품을 집대성한다.’는 목적과 학술적·역사적 근거와 의미를 가진 작품을 장르 구분 없이 발굴하고 소개한다는 대원칙 아래, 책에 대한 다른 원칙들이 세워졌다. 작품뿐 아니라 ‘학술’과 ‘역사’까지도 여성적 관점으로 다시 보고, 작품과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의 공기까지도 충실히 담을 것이라는 규칙들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근대 개화기 조선부터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한국까지의 시대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구분하고, 시대마다 독자적인 개성과 전환을 이룬 여성문학 작가와 작품을 선별해 담았다. 시, 소설, 산문, 희곡뿐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노동 수기 등 제도화된 문학 형식 밖에 있다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다양하고 자유로운 ‘여성 글쓰기’를 총망라했다.
■ 한국 여성해방 100년의 기록
기존 문학사에서는 나혜석의 「경희」가 《여자계》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았다면,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보다 20년 앞선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본다. 이 글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여성이 신문에 투고해 발표한 글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이 글을 “근대 매체인 신문을 통해 공적 담론인 ‘선언문’의 형식으로 페미니스트 집합 의식을 발표한 최초의 글”(1권, 시대 개관)이라 평가하며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짚는다. 「여학교설시통문」을 발표한 이듬해 이 글의 저자들이 한국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하고, 그로부터 20년 후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 여성문학이 만들어 온 여성해방의 방향성과 방식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여성의 글쓰기와 삶은 앞선 여성의 글을 읽고 다음 여성의 삶을 상상하는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공명하고 움직이며 이루어졌다. 시대마다 형태를 달리하며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그에 따라 순응하고 저항하며 만들어간 여성의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고민하고 열망한 ‘자유’, 여성해방의 과정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통해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학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문학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백과사전식 구성과 글로 만들어졌다. ‘시대 개관’은 각 권을 여는 글로, 다루는 작품과 시대 전반을 설명하며 사회·정치·문화적 맥락에서 작품과 작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글이다. ‘작가 소개’ 글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 문학사적 성취와 의미를 보여 주는 글로, 해당 작가를 연구해 온 연구자를 통해 방대한 자료와 엄정한 사실 검증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모든 작품은 초간본 원문을 우선해 수록했다. 이 선집이 지닌 ‘최초’의 의미와 자료적·교육적 가치를 고려해 세운 기준이다. 장편소설은 작품 소개와 주요 장면을 발췌해 수록했다.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1990년대 소설과 시를 포함해, 쉽게 구할 수 없었던 1950~1970년대 작품까지 여성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 본문에서
현세는 너무 비좁은 감옥이라고,
꿈꿀 수 있는 가장 큰 지도를 그리겠다고,
흐린 구름들이 엎어질 듯
코를 박고 있는 낮은 창 곁에서
키 작은 여자는 하루하루를 삭제시킨다.
― 최승자, 시 「하안발 5」에서
엄마는 오래전부터,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그날처럼 매 새벽, 무언가를 향해서 집을 떠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그렇지만 어떻게 그걸 내가 알 수 있었겠어. 내 작은 머리가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그날, 나는 벼락이 머리 위에 떨어지듯이 순식간에 모든 일을 알아 버렸어. 말로 되어 나오지 않는 일.
― 최윤,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서
하나코. 그것은 그들만의 암호였다. 한 여자를 지칭하기 위한 그들 사이의 암호.
한 여자가 있었다. 물론 그 여자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그들의 도시적 감성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암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코 앞에서 그녀를 별명으로 부른 적도 없다. 그들끼리만 모였을 때, 지루하고 전망 없는 하루 저녁 술자리에서 그녀를 지칭하느라 우연히 튀어나온 농담조의 이 별명이 암호가 되었다.
― 최윤, 소설 「하나코는 없다」에서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슬픔으로 견디겠다고 나는
썼던가 내가 사랑하는……이라고
청승을 떨었던가 아니면 참혹한 여름이라고
엄살을 떨었던가 너 떠나고 나면 이 세상에 남은
네 생일날은 무슨 날이 되는 거냐고 물었던가
치마폭에 감추면 안 되겠냐고 영화 속에서처럼 그러면
안 되겠냐고
― 김혜순, 시 「여자들」에서
나는 지금 두 손 들고 서 있는 거라
뜨거운 폭탄을 안고 있는 거라
부동자세로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거라 빠빳한 수염털
사이로 노랑 이그르한 빨강 아니 불타는 초록의 호랑이 눈깔을
햇빛은 광광 내리퍼붓고
아스팔트 너무나 고요한 비명 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거라, 증조할머니 비탈밭에서 호랑이를 만나, 결국 집안을 일으킨 건 여자들인 거라,
― 최정례, 시 「햇빛 속에 호랑이」에서
나는 어른들이 나를 귀여워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자기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밀을 저당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귀여워할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런 비굴함이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
내가 어른들의 비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어린애로 보이기’ 때문이다.
― 은희경, 소설 「새의 선물」에서
이빨을 갈며 불온한 서적을 태우고 바로 당신이었던 육체에 세계를 심겠어 아이를 낳겠어 술을 마시면 더욱 맑아지는 정신으로 나만의 몫이었던 죄와 폭발만 살찌는 불바다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애비없는 아이 하나 낳겠어
― 박서원, 시 「엄마, 애비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에서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 최영미,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놀라운 것은 나 자신까지도 남편과 공모해 나를 방치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손가락들, 나의 무릎, 나의 등, 나의 귀, 나의 가슴, 나의 겨드랑이…… 그것이 왜 남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나의 것이 아니던가.
― 전경린,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 넌 결국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고 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에 불과했던 거야.
선우가 말했었다.
그랬다. 영선은 그 말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했었다. (…)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녀 자신의 말대로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다.
― 공지영,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파란 풀에 휩싸여 하얗게 엎드려 있던 그 애의 작은 몸. 내 기억 속에선 그 애의 몸만 있다. 그 애에겐 어쩌면 내 몸만 있을 것이다. (…) 아름다운 쪽은 그 애다. 나는 그 앨 사랑했으니까. 훗날엔 어땠을지라도 그 순간엔 그 애도 나를 사랑했기를.
― 신경숙, 소설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서
언니가 뭐라구 해도 나는 언니를 쓰려고 해. (…) 그러려면 언니의 진실을, 언니에 대한 나의 진실을, 제대로 따라가야 할 텐데. 내가 진실해질 수 있는 때는 내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는 때도 남은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아니었어. 그런 것들은 공허했어. 이렇게 엎드려 뭐라고 뭐라고 적어 보고 있을 때만 나는 나를 알겠었어. 나는 글쓰기로 언니에게 도달해 보려고 해.
― 신경숙, 소설 「외딴방」에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 허수경, 시 「혼자 가는 먼 집」에서
어렵고 고독한 인생을 겪고 난 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살아간다는 것은 어차피 견디고 또 견디는 것. 모든 고통과 경험은 보편성과 일반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정서는 한줄기 강물처럼 도도하게 삶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따라 흐른다. 아무도 반역하지 못하고, 아무도 반란의 음모를 꿈꾸지 못하고 아무도 저항하지 못한다. 내 마음의 치열한 혁명도, 고통스러운 자아도 강물의 거센 흐름에 사라지고 아무도 개별의 생을 살 수는 없는 것. 그리하여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너는 내 꿈속의 낯선 사람의 뒷모습이었을 뿐이라고.
― 배수아, 소설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