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문학 선집 5 : 개발 레짐과 여성주의적 각성 ― 1970년대
시리즈 한국 여성문학 선집 5 | 분야 한국 문학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최초의 기준!
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
■ 5권 개발 레짐과 여성주의적 각성 1970년대
개발독재 정치로 시작한 중산층의 시대,
속물적 욕망의 고발과 억압받는 몸의 글쓰기
1970년대 여성문학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여성문학이라는 범주와 육체가 구성된 시기이다. 일종의 지도 그리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직 성격적 특성이나 정체성이 확립되기 이전이지만 여성 전업 작가가 등장하고,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한 여성 경험의 문학화가 가능해졌으며, 여성적 장르와 매체가 형성되었다. 또한 새로운 글쓰기 주체로 등장한 여성 노동자와 민중적 글쓰기의 도전도 앞으로 여성문학의 범주가 어떻게 구성될지를 보여 주는 현상이다.
국가주의적 개발독재 시기는 노동의 도구로 국민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계몽의 시대였다. 히스테리적 글쓰기, 육체의 언어로 쓰인 시, 일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경험을 다룬 여성 노동자의 글쓰기로 여성문학이 정립된 것은 국가주의적 가부장제의 급속한 강화에 저항하는 인간성의 호소와 관련이 있다. 취약한 신체와 인간적 경험을 배제하는 체제에 저항하고 이를 문학화하는 글쓰기 전략이 여성문학의 특성이 된 것이다.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최초의 기준!
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을 엮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여성주의와 여성문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사 서술을 목표로 2012년 결성한 모임으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성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한 가지 명확한 의문과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문학사 서술은 여성주의 운동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탈구축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문학사 탈구축 작업은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적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문학사에 깃든 국민·국가, 남성·엘리트, 문학중심주의 등을 걷어내고 여성과 소수자 문학을 문학사에 반영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 한국에도 문학사 탈구축 작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여성문학사 서술은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굳건하게 형성되어 오는 동안, 여성문학사는 서술을 시작할 텍스트 선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문학은 그 전통을 이어 왔음에도 역사적 계보와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오랜 역사 동안 여성 작가의 ‘저자성’과 여성문학의 ‘문학성’은 의심받았으며,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어 왔다. 오늘 등장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한국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에 없던 여성의 기준과 관점으로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의 계보를 집대성하고, 제도 문학 중심의 구분에서 벗어나 장르 제한 없이 여성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다.
‘최초’는 ‘다음’을 약속한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 이후 본격문학과 국민문학을 넘어 대중문학과 퀴어문학, 디아스포라문학을 포괄하고 해외 학회와 협업한 다양한 선집을 후속 과제로 남겨 두었음을 밝히며, 시대마다 문학 공동체마다 다시, 그리고 새롭게 쓰일 새로운 문학사의 탄생을 예고한다.
■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문학사는 가장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문학의 영역이다.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고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문학 교육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문학사 교육’이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그 이유로 과거 국가 권력은 문학사를 ‘민족’과 ‘시민’을 양성하는 첫 번째 도구로 삼았으며, 또한 같은 이유로 문학사는 민주화 이후 가장 먼저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1980년대 서구로부터 시작해 2000년대 한국 사회에도 민족과 이념 중심의 ‘남성 중심의 문학사’를 해체하고 새로 쓰는 ‘문학사 탈구축’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성과는 미약했다. 새로운 문학사 서술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문학사는 문학 연구와 교육 모두에서 ‘죽은 지식’으로 외면당해 왔다. 그 역사 끝에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등장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를 떠받친 문학, 역사, 학문을 둘러싼 오랜 기준들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의심하고 새로이 들여다보며 완성한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시작이다.
■ 시대가 만들고, 시대를 만든 작품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최초’라는 단어가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원칙’으로 작용한 책이다. ‘여성문학의 진일보를 이룬 작품을 집대성한다.’는 목적과 학술적·역사적 근거와 의미를 가진 작품을 장르 구분 없이 발굴하고 소개한다는 대원칙 아래, 책에 대한 다른 원칙들이 세워졌다. 작품뿐 아니라 ‘학술’과 ‘역사’까지도 여성적 관점으로 다시 보고, 작품과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의 공기까지도 충실히 담을 것이라는 규칙들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근대 개화기 조선부터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한국까지의 시대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구분하고, 시대마다 독자적인 개성과 전환을 이룬 여성문학 작가와 작품을 선별해 담았다. 시, 소설, 산문, 희곡뿐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노동 수기 등 제도화된 문학 형식 밖에 있다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다양하고 자유로운 ‘여성 글쓰기’를 총망라했다.
■ 한국 여성해방 100년의 기록
기존 문학사에서는 나혜석의 「경희」가 《여자계》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았다면,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보다 20년 앞선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본다. 이 글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여성이 신문에 투고해 발표한 글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이 글을 “근대 매체인 신문을 통해 공적 담론인 ‘선언문’의 형식으로 페미니스트 집합 의식을 발표한 최초의 글”(1권, 시대 개관)이라 평가하며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짚는다. 「여학교설시통문」을 발표한 이듬해 이 글의 저자들이 한국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하고, 그로부터 20년 후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 여성문학이 만들어 온 여성해방의 방향성과 방식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여성의 글쓰기와 삶은 앞선 여성의 글을 읽고 다음 여성의 삶을 상상하는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공명하고 움직이며 이루어졌다. 시대마다 형태를 달리하며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그에 따라 순응하고 저항하며 만들어간 여성의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고민하고 열망한 ‘자유’, 여성해방의 과정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통해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학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문학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백과사전식 구성과 글로 만들어졌다. ‘시대 개관’은 각 권을 여는 글로, 다루는 작품과 시대 전반을 설명하며 사회·정치·문화적 맥락에서 작품과 작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글이다. ‘작가 소개’ 글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 문학사적 성취와 의미를 보여 주는 글로, 해당 작가를 연구해 온 연구자를 통해 방대한 자료와 엄정한 사실 검증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모든 작품은 초간본 원문을 우선해 수록했다. 이 선집이 지닌 ‘최초’의 의미와 자료적·교육적 가치를 고려해 세운 기준이다. 장편소설은 작품 소개와 주요 장면을 발췌해 수록했다.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1990년대 소설과 시를 포함해, 쉽게 구할 수 없었던 1950~1970년대 작품까지 여성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 본문에서
이 세상의 질서와 투쟁하고 개혁하고 새롭게 살고픈 욕망에 불타게 해 주는 남자들. 난 그런 한 남성을 알게 됐지. 사랑은 윤리나 도덕이나 수치심 같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우. (…) 아이, 언니두 화는 왜 내우? 갑옷 속에 가둬 둔 성이 그래 마냥 향기롭단 말이유?
― 김자림, 희곡 「화돈」에서
나나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18평짜리 아파아트를 위해 7년의 세월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상실했듯이.
― 박완서, 소설 「닮은 방들」에서
그날 저녁 그의 넥타이를 받아 옷걸이에 걸다가 문자는 그것에 꽂혀 있는 진주 넥타이핀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은 이전처럼 미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맘속으로부터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무관해졌던 것이다. 그가 누리는 모든 것이 그녀와 무관해졌다.
문자는 오로지 곁에서 담담한 맘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끝없는 욕망이 그의 집 문전에 줄을 잇는 업자들의 선물 상자와 돈 봉투를 딛고 자꾸자꾸 높아지는 것을.
― 서영은, 소설 「먼 그대」에서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 강은교, 시 「자전 1」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정말 내가 의붓자식이었기를, 그래서 맘대로 나가 버릴 수 있기를 바랐는지 몰랐다.
어머니는 일곱 번째 아이를 배고 있었다. 가난한 중국인 거리에 사는 우리들 중 아기는 한밤중 천사가 안고 오는 것이라든지 배꼽으로 방긋 웃으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 오정희, 소설 「중국인 거리」에서
해방이 되고 외지에 나가 있던 그 여자가 북쪽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이미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늙은이거나 어린애거나 여자라면 얼굴에 검댕이를 칠하고, 문밖 출입을 삼가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바깥에 인기척만 나면 그 여자의 어머니는 딸을 다락 속에 밀어 넣었다. 로스케가 온다.
지켜야 할 것은 목숨보다 정조였다.
― 오정희, 소설 「어둠의 집」에서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태양이 어둠을 살해하듯,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꿈이 현실을 살해하기를.
― 김승희, 시 「태양미사」에서
재운아, 모두들 고등학교에 들어간다고 좋아할 때 너는 슬프겠구나. 우리 형편이 어려우니 말이야. 재운아 실망하지 말아라. 서울에 올라오면 누나가 야간 고등학교라도 넣어 줄께. (…) 누나는 이곳에서 교회에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단다. 너무나 공장 일이 바쁘기 때문에, 매일 밤늦게 집에 오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단다. 그러니 동생들은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공부에도 열중했으면 하는 것이 누나의 마음이란다.
― 송효순, 노동 수기 「서울 가는 길」에서
■ 차례
책머리에 4
시대 개관
개발독재기의 젠더 통치와 대안적 여성 주체의 등장 14
김자림 32
화돈 34
박완서 48
닮은 방들 51
손장순 75
우울한 빠리 77
노향림 108
어떤 죽음 109
서영은 110
먼 그대 112
신달자 140
그리움 142
강은교 144
자전 1 146
비리데기의 여행노래 148
빈자일기— 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158
문정희 160
새떼 162
오정희 163
중국인 거리 165
어둠의 집 199
김승희 221
그림 속의 물 223
태양미사 227
석정남 230
인간답게 살고 싶다 232
불타는 눈물 238
송효순 242
서울로 가는 길 244
장남수 266
빼앗긴 일터 268
엮은이 소개 286
집필에 참여한 연구자들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