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姬君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3년 2월 15일
ISBN: 978-89-374-8010-2
패키지: 소프트커버 · 변형판 127x187 · 254쪽
가격: 8,000원
분야 외국문학 단행본
야마다 에이미 소설 작품집. ‘연애 소설의 여왕’ 야마다 에이미는 이 작품집에서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모델을 보여 주고 있다. 풋풋한 설렘과 기대로 시작되는 첫사랑, 뜨거운 욕망의 숨결로 저 혼자 무르익는 짝사랑, 몸으로 먼저 배워 가는 대담한 사랑, 서로가 처한 고통과 한계를 침묵으로 극복하는 성숙한 사랑 등을 그린 다섯 편의 소설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성을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매만지면서 인간 내면의 복합성과 욕망의 순수성을 직시하고 있는 작품집니다.
1. 메뉴 2. 체온 재기 3. 피에스타 4. 공주님 5. 샴푸 옮긴이의 말 / 김옥희 사랑과 죽음에 대한 다섯 가지 시뮬레이션
“120% COOL”한 작가 야마다 에이미 일본 신세대 문학의 중추신경이라 불리는 야마다 에이미의 신작 소설집 『공주님』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에이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고루한 일본 평단에 지진을 일으키며 새로움과 신선함을 갈구하는 독자들에게 “120% COOOL”한 감각을 선사해 왔다. 한마디로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는 작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에이미는 그 이력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등단하기 전 메이지 대학 문학부에서 작가 수업을 쌓다가 돌연 학교를 그만두고 술집 호스티스로 직업을 바꾸었고 모델, 스트립걸 등 화제성이 풍부한 직업을 전전하였다. 한편 보란 듯 흑인 병사와 사랑을 나누었으며 자신이 사랑한 흑인과 당당히 결혼까지 했다. 이 같은 이력이 세인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겠지만 정작 작가에게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매순간이 절실한 문학적 체험의 현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녀는 학교라는 틀을 벗어나 고도의 리얼리티를 갖춘 학원 소설 \”풍장의 교실\”을 썼으며 자신이 직접 체험한 흑인 병사와의 사랑을 소재로 『베드 타임 아이스』로 문예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던 것이다.그러나 야마다 에이미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단순히 소재의 대담성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문단이 놀란 것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의 새로움이었다. 관념적인 것을 배제한 일상적인 단어의 나열만으로, 즉 지극히 단순한 일상적인 언어로 이전까지 느껴는 왔으나 표현된 적 없는, 표현될 수도 없었던 미묘한 감정들을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적확하게 표현해 냈던 것이다. 문학이 스스로 만들어 낸 관념에 빠져 스스로를 제도로 무장하고 있을 때 야마다 에이미는 과감하게 그곳을 박차고 나가 삶의 현장, 그것도 변두리의 삶으로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막 건져 올린 싱싱한 표현과 주제의식으로 제도화된 문학을 무장 해제시켰다.
모놀로그에서 다이얼로그로 관계 맺기“연애 소설의 여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공주님』에 수록되어 있는 다섯 편의 작품에서 사랑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풋풋한 설렘과 기대로 시작되는 첫사랑(\”샴푸\”), 뜨거운 욕망의 숨결로 저 혼자 무르익는 짝사랑(\”피에스타\”), 몸으로 먼저 배워가는 대담한 사랑(\”메뉴\”),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사랑(\”공주님\”), 서로가 처한 고통과 한계를 침묵으로 극복하는 성숙한 사랑(\”체온 재기\”) 등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단순히 사랑만을 지상목표로 두고 서로 각축을 벌이는 연애 소설은 아니다. 여기에는 삶과 죽음, 이성과 욕망, 욕망과 자존심, 남성과 여성 등과 같은 대립적인 항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런 관계에 처한 ‘나’와 ‘너’, 그리고 ‘그’와 ‘그녀’가 서로 이끌리고 밀어내고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독특한 점은 작가는 이러한 관계 변화를 외부의 틀에서가 아니라 육체와 육체로 만나는, 맨살과 맨살이 맞닿는 감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즉 사랑이 있기 전에 육체적 접촉이 욕정을 불러일으키고 내면의 변화를 수반하여 사랑이 싹튼다는 에이미식의 사랑 공식이 성립되는데 이러한 공식은 정조 관념과 더불어 근대 이후 서유럽에서 관념화된 사랑의 도식(내면(마음)→욕정→육체관계(성))을 역전한 것이다. 본능에 솔직하게 귀 기울일 것, 사랑은 충격도 아니고 가슴의 두근거림도 아니고 사건도 아니고 “일상 자체”임을 강조할 때 일상이 변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있는 무수한 관계들이 변화한다. 육체로부터 시작된 사랑은 딱딱하게 응고된 인간의 내면에 물처럼 스며들어 도시인들의 마음에 쳐진 두꺼운 막을 거둬내고 모놀로그 식의 일상을 다이얼로그 식으로 바꿔놓는다.
★『공주님』, 사랑과 죽음의 다섯 가지 시뮬레이션사랑과 더불어 작품의 곳곳에 드리워져 있는 죽음의 그림자도 『공주님』의 특징적인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죽음은 사랑의 종결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메뉴\”의 주인공 도키노리는 다섯 살에 어머니의 자살을 본다. 거기서 상처를 받기보다는 어떤 존재에도 얽매임 없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어머니의 자유로움에 감탄한 주인공은 이후 살아가면서 어떤 인간관계도 맺지 않으려고 한다. 죽을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러다 동네 불량배들로부터 폭행당하고 죽어가면서 비로소 도키노리는 사촌여동생 세이코에 대한 사랑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자유를 안타깝게 희구한다. 야마다 에이미는 죽을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는 도키노리의 비뚤어진 삶이 사랑을 예감하면서 치유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체온 재기\”에서도 죽음은 그와 같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항상 죽음을 몰래 숨겨둔 채 지내왔다는 요시즈미 부인. 언뜻 본 죽음의 그림자 덕분에 삶의 가치와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자, 식어가던 사랑이 또다시 뜨겁게 달아올라, 멀게만 느껴져 가던 그의 품을 향해 돌진하는 ‘나’. 한 사람은 사랑을 위해 죽음을 이용하고, 또 한 사람은 죽음을 이용해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셈이다. \”공주님\”에서도 사랑과 죽음은 매우 근접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세상을 향해 공주님이라는 기명(妓名)을 쓰며 근거 없는 자존심과 허무맹랑한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히메코. 먹을 것과 잠자리를 위해 몸을 팔지만 세상을 향해 굽실거리지 않는 히메코는 우연히 만난 생명의 은인인 마슈를 하인 부리듯 대하며 그의 몸을 탐닉한다. 그러나 마슈를 향해 사랑을 느낀 순간 둘 사이의 관계가 역전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몰래 마슈를 떠난다. 그러나 마슈에 대한 사랑은 점점 더 깊어가고 거부해 오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슈의 품으로 돌아가려다 히메코는 죽음을 맞이한다. 서로를 향한 욕정과 그리움이 한 지점에서 만나지 못하고 교차하던 것이 히메코의 죽음에 의해 완성이 된다. \”샴푸\”에서는 더욱 직설적으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항상 죽음과 이웃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마는 어머니.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가 비켜갔음을 확인했을 때 안도감을 느끼면서 찾아든 첫사랑의 감정에 행복해하는 소라. 여기서도 어김없이 죽음은 삶과 사랑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요컨대 『공주님』은 사랑과 죽음을 모델로 한 시뮬레이션들을 묶어 놓은 작품집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