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인간 의식의 심연을 탐구한
모더니즘 소설의 위대한 선구자, 헨리 제임스
진실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존재의 여정을 그려 낸 네 편의 이야기
세월의 굽이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를 덮치기 위해 밀림의 야수처럼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다. 그 웅크린 야수가 그를 죽일지, 아니면 그가 야수를 죽일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언젠가 그 야수가 자신을 덮치리라는 점이었다. -「밀림의 야수」에서
헨리 제임스는 망설임과 모르는 척의 천재다. 말하려다 말기, 텅 빈 것 같기도, 의미심장한 것 같기도 한 말 늘어놓기 역시 그의 특기다. 헨리 제임스의 인물들은 뭔가를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할 때 절대 털어놓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들어야 하는 순간에 그것을 미루고 피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진실이 놓여 있는데 어느 누구도 진실을 향해 직선거리로 냅다 걸어가지 않는다. 진실과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는 자주 그런 시간이 고인다. -김화진(소설가)
절묘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선뵈며 모더니즘과 국제주의 문학을 선도한 작가이자 현대 영미 문학에서 매우 독보적 위치를 점하는 헨리 제임스의 빼어난 단편을 엮은 『밀림의 야수』가 민음사 쏜살 문고로 출간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두 가지 정체성을 품은 채 성장한 헨리 제임스는 하나의 국적에 얽매이지 않는 국제적 작가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문학 전통을 넘어서는 실험적이고 대담한 기법을 체득한 선구적 예술가였다. 제임스는 자신의 고유한 경험과 독특한 시각, 예술적 이상을 22편의 장편 소설과 113편의 중·단편 그리고 여러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구현해 냈고, 내적 성찰과 계시의 순간을 세련된 문체로 포착했다. 그의 문학적 주제인 소설과 현실의 애매한 관계, 자의식에 대한 집요한 탐구, 모호한 정체성 문제는 후대의 모더니스트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고, 이후 국제적 감각을 발휘한 ‘로스트 제너레이션’,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의식을 다루는 거의 모든 작가들에게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헨리 제임스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세 차례 지명될 정도로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음에도 그의 작품은 여전히 실험적이고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컨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조차 “나는 카프카, 멜빌, 블루아의 작품을 번역해 봤지만 헨리 제임스만큼 낯설게 다가온 작가는 처음이었다.”라고 고백했을 뿐 아니라, 제임스와 오래도록 교우한 이디스 워튼도 “그의 글을 종종 이해할 수 없다.”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문학 평론가 에드먼드 윌슨의 평가대로 헨리 제임스는 “심리학적 사고 실험을 통해 삶의 조건을 탐구한 작가이므로 (과거나 동시대의 소설가들보다) 오히려 셰익스피어에 가깝다.” 따라서 제임스의 애매모호함, 선뜻 파악하기 어려운 줄거리, 그 모든 것을 에워싼 어렴풋한 문장이야말로 특수한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 인간의 보편적 무의식을 자극하는 촉매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그 심연을 들여다봄으로써 이제껏 미처 몰랐던 스스로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쏜살 문고 『밀림의 야수』에는 네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시대순으로 나열하자면 비교적 후기 작품에 해당하는 「진짜」(1892), 「짝퉁」(1899), 「밀림의 야수」(1903), 「밝은 모퉁이 집」(1909)이 수록돼 있는데, 먼저 「진짜」와 「짝퉁」은 제목 그대로 ‘진짜’와 ‘가짜’의 의미를 되묻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진짜」의 주인공은 비록 돈벌이를 위해 책에 삽화를 그리지만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자 고뇌하는 화가로,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모델들, 즉 고상함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진정한 우아함을 지닌 모나크 부부를 만나면서 혼란에 사로잡힌다. 화가는 소설 속 귀족들을 그리는 데에 완벽히 아름다운 모나크 부부, 이를테면 ‘진짜’인 이들이 도움을 주리라 예단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주인공은 급기야 예술 자체를 회의하기에 이른다. 「짝퉁」은 모파상의 「목걸이」를 거꾸로 뒤집은 작품으로,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진주 목걸이를 둘러싸고 묘한 긴장감과 기막힌 반전이 거듭 이어진다. 표제작 「밀림의 야수」는 헨리 제임스의 문학적 주제와 인생관, 고유한 문제의식이 집약된 소설로, 그의 문학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주제 중 하나인 뒤늦은 깨달음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딱히 목적하는 바 없이, 오직 소일하며 살아온 주인공 마처는 어느 날, 아주 우연한 기회로, 과거에 한번 만난 적 있는 메이 바트럼과 재회한다. 메이는 예전에 마처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고, 그 비밀을 여태 홀로 간직해 왔다고 털어놓는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은 마처는 적잖이 당황하지만 곧 둘만의 비밀을 가교 삼아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이어 간다. 그러나 마처는 “밀림의 야수”가 언제 돌연 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탓에 제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같은 곳을 맴도는 두 사람의 관계는 한없이 공회전을 하며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밝은 모퉁이 집」은 헨리 제임스가 그동안 다뤄 온 정체성의 충돌과 때늦은 각성, 국제 주제를 원숙하게 통찰해 낸 대표작이다. 주인공 브라이든은 삼십삼 년을 유럽에서 보낸 뒤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국의 팽창적 에너지를 끔찍해하면서도 동시에 이끌린다. 특히 경제적 활기에 매료된 그는 자신이 만약 유럽에 가지 않았더라면, 미국에서 자기 재능을 발휘했더라면 과연 어떤 존재가 되었을지 강박적으로 질문한다. 브라이든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던 유년 시절의 장소, 이른바 ‘밝은 모퉁이 집’에서 이제 가닿을 수 없는 가능성의 영역과 불가역적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한다. 헨리 제임스의 개성과 재능을 뚜렷이 엿볼 수 있는 이 책, 『밀림의 야수』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는 그의 그윽한 문학 세계를 탐험하는 데에 환한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 줄 것이다.
진짜
밀림의 야수
밝은 모퉁이 집
짝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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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