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밀란 쿤데라의 펜끝에서 거대하게 울려오는 메시지“당신은 왜 소설을 읽는가? 소설은 당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주는가?”▶ 글쓰기에 관한 한 소설가의 통찰력 깊고 권위 있는 고찰. ―《뉴욕 타임스 북 리뷰》
부제: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원제 Le rideau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2년 10월 10일
ISBN: 978-89-374-8413-1
패키지: 양장 · 신국변형 132x217 · 248쪽
가격: 16,000원
분야 밀란 쿤데라 전집 13
『커튼』은 오늘날 현대 소설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의의를 쿤데라만의 날카로운 시각과 풍부한 지식, 문학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풀어 낸 에세이이자 현대 소설론이다. 쿤데라는 소설이라는 예술의 역사가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했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커튼』 또한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쿤데라는 그 대답을 인간의 지식과 인류의 역사,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위대한 소설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커튼-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차례
1부 연속성의 의식
연속성의 의식
역사와 가치
소설의 이론
가련한 알론소 키하다
\’스토리\’의 독재
현재의 시간을 찾아서
\’역사\’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들
삶의 갑작스러운 밀도의 아름다움
사소한 것의 힘
죽음의 아름다움
반복된다는 것의 부끄러움
2부 세계 문학
최소한의 공간에 최대한의 다양성을
돌이킬 수 없는 불평등
세계 문학
작은 국가들의 지방주의
커다란 국가들의 지방주의
동유럽 사람
중부 유럽
모더니스트적 반항의 상반된 길들
내 위대한 플레이아드
키치와 저속성
반현대적인 모더니즘
3부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
뿌리 뽑히지 않는 오류
상황들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
생각하는 소설
비개연성의 국경은 이제 지켜지지 않는다
아인슈타인과 카를 로스만
농담 예찬
곰브로비치의 작업실에서 바라본 소설의 역사
다른 대륙
은빛 다리
4부 소설가란 무엇인가?
이해하려면 비교해야 한다
시인과 소설가
개종에 관한 이야기
희극의 희미한 빛줄기
찢어진 커튼
영광
사람들이 내 알베르틴을 죽였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판결
핵심의 윤리
독서는 길고, 인생은 짧다
어린 소년과 그의 할머니
세르반테스의 판결
5부 미학과 삶
미학과 삶
행위
아젤라스트
유머
그리고 우리에게 비극이 사라졌다면
탈영병
비극의 연쇄
지옥
6부 찢어진 커튼
가련한 알론소 키하다
찢어진 커튼
비극의 찢어진 커튼
요정
농담의 검은 밑바닥까지 내려가기
슈티프터의 관점에서 본 관료주의
성과 마을의 침범당한 세계
관료화된 세상의 실존적 의미
커튼 뒤에 숨겨진 삶의 나이
아침의 자유, 저녁의 자유
7부 소설, 기억, 망각
아멜리
지우는 망각, 변형시키는 기억
망각을 모르는 세계의 유토피아로서의 소설
구성
망각된 탄생
잊을 수 없는 망각
잊힌 유럽
세기와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으로서의 소설
기억의 무대
연속성에 대한 의식
영원
■ 돈키호테, 세상에 드리운 커튼을 찢어 버리다!
표제인 ‘커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쿤데라는 우리 세상 앞에, 우리가 보고 읽고 느끼는 모든 존재 앞에 마법 커튼이 걸려 있다고 한다. 이 커튼은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을 가리고 숨기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커튼 너머를 보지 못하고, 커튼에 적힌 대로 삶을 판단하는 데 길들어 있다. 하지만 커튼에 수놓인 진실들을 그대로 베끼면 안 된다. 이 커튼을 찢어 버리고 그 뒤에 숨은 우리 삶의 진실한 모습과 마주보아야 한다.
훌륭한 소설 작품은 세상 앞에 드리운 커튼을 찢어 버리는 역할을 한다. 쿤데라는 그 대표적인 예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꼽았다.(“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떠나보내면서 그 커튼을 찢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기사 앞에 세상이 활짝 열렸다. 세르반테스가 새로운 소설 기법을 개척했던 것은 바로 선해석의 커튼을 찢어 버렸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세르반테스)의 이 파괴적 행위는 그 어느 소설에서나 반영되고 이어진다. 왜냐하면 커튼을 찢는 것,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들 즉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쿤데라는 또한 이 역할이야말로 소설이 “예술임을 증명하는 표시”라고 하였다.
밀란 쿤데라의 신작 에세이 『커튼』은 이처럼 우리가 미처 들어가 보지 못했던 ‘소설’이라는 장르의 세계로 독자들을 보다 깊숙이 안내하는 작품이다.
■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 쿤데라
―소설을 읽고, 쓰고, 이해하는 행위에 대해 고찰케 하다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작가의 생각을 상징이나 은유 없이 짚어 낼 수 있는 에세이 『커튼』은 그동안 쿤데라의 소설만 읽어 온 독자들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갈 것이다. 쿤데라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카프카, 곰브로비치, 플로베르, 세르반테스 등 당대 최고의 문학가와 그들의 작품을 대하는 면밀함과 세심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깨닫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커튼』은 소설가들에게 역시 ‘소설 쓰기’라는 행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준다. 세기가 바뀌고 시대가 거듭되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고 재생산되어 온 ‘소설’이라는 장르에 어떻게 ‘새로운 미학’을 안겨 줄 것인가? 책을 덮은 후 줄거리나 묘사는 점차 퇴색되어 버리고 결국 잊혀 버리는 현상을 극복하고, 자신의 소설을 어떻게 하면 영원히 잊히지 않는 작품으로 남길 것인가? 언어, 국경, 사회 체제와 관료주의의 억압을 벗어나 전 인류가 공감할 작품은 어떻게 해서 탄생하는가?
쿤데라의 『커튼』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을 읽고, 쓰고, 가슴 깊이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불멸의 것으로 간직하는 행위에 대해 고찰케 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 불멸을 갈망하는 소설가, 초월을 꿈꾸는 소설
“평범한 배관공은 유익한 존재이지만, 일부러 진부하고 판에 박힌 책을 만들어 내는 평범한 소설가는 경멸당해 마땅한 존재다.”
운명적으로 불가피하게 영광을 누리는 직업들이 있다. 정치가, 모델, 운동선수, 예술가. 그중에서도 예술가의 영광이 가장 끔찍하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자신의 영광이 불멸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의 마음속에 이 불멸을 바라는 야심이 없다면 훌륭한 작품도 탄생할 수 없다.
쿤데라는 이러한 야망 없이 글을 쓰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라고 말한다. 일부러 덧없고,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들을 만들어 내는 평범한 소설가들은 경멸당해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영구적인 미학적 가치를, 즉 작가의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소설가는 언제나 불멸을 갈망한다. 그리고 소설은 언제나 초월을 꿈꾼다. 소설 고유의 독자성을 보지 못한다면, 소설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소설은 자신만의 기원과 역사를 갖고 있다. 소설의 세계에는 국가의 경계가 없다.
■ 예술의 역사는 덧없다. 하지만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
소설은 역사적 설명이나 그 시대의 사회 묘사, 이데올로기의 옹호 수단으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전적으로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 쿤데라는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 소설 「인간의 양」(1958)을 그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일본인이 잔뜩 탄 버스에 외국 군대의 병사 한 무리가 올라타 일본 대학생에게 모욕을 준다. 하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이 외국 병사들이 누구인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물론 전쟁 후 일본을 점령한 부대는 미국군이다. 그런데 작가는 ‘일본인’ 승객이라고 꼬집어 말하면서 병사의 국적은 밝히지 않는다. 이들이 ‘미국’ 병사라고 명시되는 순간, 소설은 결국 정치적인 텍스트로, 점령자에 대한 고발로 귀결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 단어 하나를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측면은 어슴푸레한 빛에 싸이고, 소설가의 주요 문제의식인 ‘실존’에만 집중하게 된다.
쿤데라는 사회 운동, 전쟁, 혁명과 반혁명, 국가의 굴욕 등 역사 그 자체는 소설가가 그려야 할 대상, 고발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오직 “인간 실존에 빛을 비추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일 뿐이다.
역사로서의 예술, 혹은 예술의 역사는 덧없다. 하지만 쿤데라는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할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