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프루스트라는 고원에 올라앉아 읽기와 쓰기를 사유하다
부제: 나의 프루스트 읽기 연습
글 이수은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4년 4월 8일
ISBN: 978-89-374-5644-2
패키지: 반양장 · 46판 128x188mm · 428쪽
가격: 18,000원
분야 한국문학 단행본
“누구보다도 많은 책을 평생 읽었던 독자 프루스트는 말한다.
책은 질문을 던지고, 독자의 응답을 기다릴 뿐이라고.
독자인 당신이 책의 물음에 답할 때,
비로소 그 책은 당신에게 존재하는 책이 된다.”
▶ 이수은은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이야기의 뿌리를 파고든다. 그 어느 독자가 이런 지적 노력을 들이며 소설을 읽을까? 한 조각의 글이 끝날 때마다 마지막에 붙어 있는 날씨와 시간은 그가 겪었던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화창한 날씨는 드물고, 대부분 바람 불고,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어두컴컴한 밤이요 새벽이다. “태풍이 몰려오는 오전 6시”라는 한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 밤새 이 친구는 이렇게 프루스트와 씨름했구나! 그래도 마지막은 ‘꽃피는 계절’로 끝나니 참으로 다행이다. —송기정(이화여대 불문학과 명예교수)
▶ 『느낌과 알아차림』은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영감 가득한 안내서다. 동네를 둘러보는 데는 지도가 필요 없지만, 은하수를 여행하려면 안내서가 필요하다. 이수은은 여러 면에서 프로페셔널인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탄복하는 부분은 프로페셔널 독자로서의 면모다. 그는 엄살을 부리거나 징징대지 않고, 거대한 용이 기다리고 있는 성의 문을 열고 말한다. 니가 그 용이냐? 그리고 돌진한다. 충분히 프로페셔널한 독자는 용사와 구분할 수 없기 마련이다. —문지혁(소설가)
■ 차례
차례
1
스몰토크 9
유년의 침대 19
나, 마르셀, 프루스트 34
상투적 독자(상) 45
상투적 독자(하) 57
2
산사꽃 73
뾰족하고 높은 곳 87
이름의 빛깔 103
미성년: 질베르트의 경우 117
미성년: 알베르틴의 경우 127
3
별들의 운행 궤도 속으로 145
르무안 사건 158
피와 영토 177
딜레탕트를 위한 수요 모임 211
4
디오게네스의 사람 찾기 225
상스럽게 아름다운 244
플라토닉 259
권총을 두고 와서 아쉽게 됐군 273
5
파라노이아: 셋—페드르—불가항력—서스펜스 285
셋—페드르—불가항력—서스펜스 291
셋—페드르—불가항력—서스펜스 305
셋—페드르—불가항력—서스펜스 312
여름의 해안도로 320
프랑수아즈 331
( ) 342
6
입구에 놓인 의자 371
느낌과 알아차림 384
이 위대한 예술의 시간에 391
죽음과 삶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 399
맺음말
나의 프루스트 읽기 연습 415
프루스트라는 고원에 올라앉아 읽기와 쓰기를 사유하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오직 한 작품을 3년 4개월 동안 읽고 또 읽어간, 한 특이한 독자의 유례없는 독서 후기다. 읽어간 작품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어간 독자는 고전 탐독가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평균의 마음』의 작가 이수은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하 『시간』)는 ‘언젠가는 완독해야 할 고전’으로 빠짐없이 꼽히지만, ‘아무도 다 읽지는 않는 걸작’의 대명사가 된 대작이다. 갈리마르 출판사의 1927년 초판본 기준 3031쪽, 126만 7069단어, 2022년 완간된 민음사 번역본 기준 총 13권, 약 5600쪽, 300만 자가 넘는다. 『시간』은 끝날 듯 끝이 나지 않는 지독한 만연체의 문장들(예컨대 931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한 문장)과 유난한 길이에 비해 유난히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로도 악명 높다. “200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약 97퍼센트”가 모두 대화로만 언급될 정도로 한담과 사색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니! 독해의 난이도에 따른 매우 낮은 완독률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이 문화의 다양한 층위에서 여전히 열렬히 소비되는 현상들은 놀랍다. ‘홍차와 마들렌’으로 대변되는 프루스트 효과, 센티멘탈한 기억을 소환하는 상품 마케팅, 소설 속에서 언급된 그림, 음악, 작품, 장소 들을 찾아보는 다양한 강의와 문학 기행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와 같은 열광은 대부분 프루스트라는 작가의 생애와 이미지만을 소환하고 소비하는 데에 그친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안 읽었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는 내키지 않지만, 읽었다고 섣불리 말했다간 봉변을 당할 것” 같은 이 문제작을 한번은 자기만의 눈으로 읽어내리라는, 저자의 작은 의협심(!)에서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는 데도 필생의 지구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시간』을 읽고, 또다시 읽으며 품게 된 일련의 ‘의아함’들은 프루스트와 이 작품에 관한 또 다른 책들을 찾게 했고, “프루스트라는 거인의 장력”에 사로잡혀 쉽게 해독되지는 않지만, 매혹적인 기호들로 가득한 『시간』을 놓지 못하는 날들은 점점 길어졌다. 1년에서, 2년으로, 2년에서 3년으로 ‘읽기’의 나날이 늘어나는 동안 맞닥뜨린 당혹감들, 프루스트의 전기적 일화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감상, 글이 쓰인 맥락에 대한 몰이해로 점철된 공허한 찬사, 그저 “무수한 단상들로 이루어진 잠언집으로, 심오한 심리 철학 예술의 아포리즘으로 받아들이며 작가의 자전적 일기나 일화의 편린으로, 맥락 없이 발췌된 문장들로” 『시간』을 단정하는 상투적 소비에 대한 불만은 더 치밀한 독해로 이어졌고, 『시간』의 핵심에 가닿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물음들, 『시간』이 열어 보여준 사유의 계기들을 자신처럼 이 작품을 읽어갈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의욕이 어느새 26편의 독특한 ‘연작 독후감’을 낳았다.
프루스트의 『시간』에 대한 친절한 요약이나 깨알 같은 주석을 제공하는 글들은 아니다. 비할 데 없이 독특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분석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시간』과 긴 시간 씨름하며 던졌던 물음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의 빈틈 없는 기록이다. 『시간』이 언제나 파편적으로만 읽힌다면, 이 소설은 왜 그렇게 쓰여야 했는가?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통독했을 때 『시간』은 대체 어떤 소설인가? “아무런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진술되어 있는” 서사로 프루스트가 읽히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이 작품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느낌과 알아차림』은 프루스트와 『시간』에 관한 기존의 탐구들에서 핵심적으로 거론되어온 주제와 논점들도 꼼꼼히 짚어간다. 프루스트의 문학과 글쓰기를 향한 욕망의 기원, 자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 유년의 흔적을 둘러싼 사실과 사실적인 거짓과 거짓, 프루스트의 성적지향과 그것이 ‘스완’과 ‘마르셀’에게서 나타나는 집착적 사랑의 기괴한 단면에 드리운 그림자, 메제글리즈, 콩브레, 발베크, 게르망트 등 프루스트가 이름을 쓰며 의미의 회로망을 짓는 방식, 교묘하게 모호한 전지적 일인칭 시점 ‘나’의 역할 등….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인 샤를뤼스에게 할애한 「디오게네스의 사람 찾기」 챕터는 프루스트와 『시간』에 대한 저자의 감응이 빛을 발하는 글이다. 오독에 대한 압박과 두려움을 안고 들어섰던 『시간』 안에서 프루스트만의 “황금빛 그로테스크”를 발견하고, 나약한 한 인간이 불가사의한 집념으로 문학에 헌신할 때 이룩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숭고한 형상화를 제시한다. 이수은 작가의 전작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평균의 마음』을 통해, 하나의 작품 분석을 위해 저자가 종횡무진 시대를 넘나들며 펼쳐 보여주는 책들과 사유의 지도를 신뢰하는 독자라면,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과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이 소환되는 「뾰족하고 높은 곳」과 「이름의 빛깔」에서 프루스트를 읽어야 할 신선한 동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 그리고 『시간』이라는 웅장한 호수에 긴 시간, 깊게 잠겼던 저자가 파헤친 주제들은–‘산사나무’에서 ‘딜레탕트’ ‘플라토닉’ ‘세 종탑’과 ‘파이드라 비극’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간』이라는 전무후무한 작품의 놀라움과 그 안에 아직 읽히지 않은 공간의 광활함을 짐작게 한다. “『시간』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마주치는 심상, 상징, 비유, 오감과 공감각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의 파도, (…) 언어를 다루는 천부적 재능을 느낄 수 있는 프루스트의 정밀 묘사로 재생되는 기억, 추억, 지나간 시간, 마들렌 과자, 마르탱빌 종탑,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포석 등, 무한히 확산하는 이미지들로부터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프루스트는 『시간』의 7편 「되찾은 시간」에 마치 이 물음에 대한 준비된 대답 같은 말을 남겨두었다. “모든 독자는, 읽는 동안에, 그 자신의 독자다. 작가의 글이란 다만, 아마도 독자 스스로는 알아보지 못할 무언가를 책을 통해 식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광학기구 같은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어느 쪽이 더 잘 보이는지, 이것인지 저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안경인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써볼 수 있도록, 커다란 자유 속에 그들을 내버려두어야 한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그 커다란 자유 속에서 “프루스트를 읽어간 하나의 진지한 예시”이다.
■ 본문 중에서
* 『시간』에는 논의되지 않는 커다란 공백이, 하계의 입구 같은 거대한 싱크홀이 한복판에 자리한다. 독자는 이 부분을 사실상 읽지 않는다. 신중히 피해 가거나 얼핏 엿보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덮어버린다. 그렇지만 대체로는 정말로 못 보고 지나친다. 그렇게 되도록 장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심령술사들에게만 보이는 혼백처럼, 문장들 틈에 은신하고 있다. 그 위로 말의 향연이 펼쳐진다. 호사스럽고 진귀한 언어의 태피스트리 밑에서 귀신들은 안전하다. (15쪽)
* 작가는 왜 이렇게 은밀하고 복잡한 서사전략을 채택한 걸까. 이 소설이 무엇을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켜지기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진술되어 있는 소설을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거짓을 알아차리는 역할을 온전히 독자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독하게 열렬히, 꼭 붙잡고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책이다. 이것은 총력을 기울여 사랑해 주기를 요청하는 소설이다. (17쪽)
* 서른여덟의 프루스트가 『시간』을 끝내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더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는, “지옥으로의 하강을 완수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가 죽었다. 자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못된 연인이 사고로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지병이었던 천식이 급격히 악화되어 30시간, 50시간씩 기침이 멎지 않았다. 직업도 없고 이룩한 성취도 없었다. 호흡곤란은 늘 그랬듯 죽음을 환기시켰고, 그다음엔 생에 대한 각성을 불러왔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연연할 것도 그리울 것도 없어졌으므로, 이제 그는 무슨 말이든 해도 좋았다. (33쪽)
* 독자는 『시간』의 고백적 문체 때문에, 이 서술자 또한 소설 내의 한 인물로서 다른 모든 인물들과 동일한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프루스트적 서술자는 정서적 환기와 사유의 안내자로서 독자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사건의 경과를 인식하는 독자의 집중을 방해한다는 점에서는 비효율적인 서사 전달자다. 그리하여 시점에 관한 의문들은 하나의 물음으로 수렴한다. ‘나’는 누구인가? (39쪽)
* 모든 글쓰기는 글쓴이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암투, 자아도취와 자기비하가 격돌하는 대결의 산물이다. 『시간』은 다른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만큼 집요하게 이 내면투쟁을 기록했고, 그로써 문학적 성취를 이룩했다. 프루스트의 글쓰기는 자기만의 황홀과 심연을 끌고서, 인간이라는 신비를 파헤쳐 들어갔던 한 미친 탐험가의 찬란하고 외로운 궤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시간』에 줄곧 따라붙는 ‘자전적 글쓰기’라는 규정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55~56쪽)
* 프루스트는 중세적 인간을 재현하는 데 탁월할 뿐만 아니라, 중세적 상상력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 신기한 재능을 보여준다. 미성년의 ‘마르셀’이 게르망트 가문에 바치는 숭배는 왕족에 대한 중세 서민의 존경을 그대로 빼닮았다. 귀족은 자신의 우월함이 민중의 열등함에 비해 너무도 뛰어나기에 백성들에게 아량을 베풀 수 있었고, 민중은 어린아이처럼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왕과 귀족에 대해 위축되거나 선망했다는 하위징아의 설명은 게르망트 가문과 ‘마르셀’의 관계에도 짜맞춘 듯 들어맞는다. 그것은 우아하고 고상한 삶, 즉 높고 뾰족한 것을 사랑하는 고딕 시대의 마음이고, 이로부터 생활세계를 상상으로 채우는 꿈꾸는 존재가 태어난다. (97~98쪽)
* 누군가에게 『시간』은 연애소설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철학소설이나 성장소설 혹은 심리소설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주류와 비주류, 기득권과 소수자, 중심과 주변의 치열한 각축이 벌어지는 사건 현장을 다각도로 투시한, 엄연한 사회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작품을 멜랑콜리한 퀴어 서사로 고쳐 읽고 즐기는 행태는, 마치 『시간』에 소수자성이라고는 흔적도 없다는 듯이, 곧이곧대로 이성애 서사로만 읽는 독자의 무심함 못지않게 속물적이다. 겹겹이 쌓아올린 크레이프케이크 같은 이 소설을 우리는 아직 본격적으로 음미하지도 못했다. 프루스트가 인간 내을 응시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는 문학의 상투적 공식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다름에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140~141쪽)
* 유대인의 피가 섞인 동성애자 프루스트가 한 시대, 특정 사회의 일원으로서 쓸 수 있는 소설은 순혈의 프랑스인 이성애자의 그것과 같을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상층 부르주아인 것과 무관하게, 그는 철저히 소수자였다.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작가가 되려면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극복되어야 했다. 프루스트는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소설가의 특권을 발휘해, 모른 척 침묵하거나 아닌 척 거짓말할 마음이 없었다. 아니, 그는 어떻게든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사회적 이슈를 가져와 정치화하는 것은 소수자 당사자에게 선뜻 주어지는 선택지가 아니다. 그래서 교묘하지만 더 과감한 수법을 찾아냈다. 프루스트는 고백과 거짓말을 동시에 했다. (207~208쪽)
* 『시간』은 문학에 대하여 고집스럽게 순정했던 프루스트가 완곡어법으로 엮어낸 사랑 이야기고, ‘마르셀’은 눈부시게 찰랑이는 언어의 그물 위에서 사랑에 관한 어휘들을 고요히 사색하는 플라토닉한 거미다. (272쪽)
* 『시간』을 읽으면서, 지금껏 내게 큰 감명을 주었던 수많은 현대소설의 구절들이 이미 100년 전에 프루스트에 의해 쓰였던 것임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언어도단의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창의적 표현’의 정의를 다시 질문하게 만들었고, 문학이 결국은 문체적 개성에 의해서만 변별된다면, 우리가 읽고 있는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라는 비관적 물음에 부닥치게 했다. (279~280쪽)
* 모호함에 대한 거부는 진화적 본능이라고 설명된다. 확실한 것은 안전하고, 조심성은 생존확률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본능의 시대를 지나왔고, 이제는 더 많은 모호함들이 몰려오고 있는 세상이다. 우리에게는 본능을 넘어설 보다 능동적인 대처법이 필요하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지대한 관심으로 사랑과 성애를 탐구하고 실천하고 노래하고 꿈꿔 왔으면서도, 여전히 욕망의 속성을 오인하고 있으며, 여자들의 성애에는 아직 이름조차 없다. (364쪽)
* 인습에 짓눌린 여성의 좌절을 묘사하는 비통한 서사들과 달리, 『시간』의 여자들은 되바라졌고, 반성할 줄 모르고, 욕망 추구에 집요하며, 그로써 성공한다. 남자들이 하나둘씩 죽어갈 때에도, 상처 입지 않는 그녀들은 태연히 살아남아,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이렇게나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는 희귀하다. (365쪽)
* 책을 잡으면 가능한 한 단번에 죽 읽는다. 결말을 보기까지 하룻밤도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이유는 빨리 읽느라 잘못 읽은 부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런 나의 독서 습관을 적용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책이다. 1회독에만 꼬박 1년이 걸렸는데 여전히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또, 다시 읽어야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것은 삶에 대한 나의 불량한 태도의 한 단면이 아닌가. 이러든 저러든 삶의 결말은 죽음인데, 인생을 산책자처럼 거닐지 못하고 매번 최대 속도로 질주하려 한다면, 나에게 삶은 죽음을 기다리는 상태일 뿐 아닌가. 이렇게 죽음의 문전에서 대기한 채로, 문학의 꿈을 미뤄온 것이 다름 아닌 ‘마르셀’의 인생 아니던가. (372쪽)
* 알아차림은 평범한 때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불현듯 이루어진다. 하지만 날것 그대로의 광선으로는 문학이 되지 못한다. 빛은 시간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분해되고 연장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기억은 인식의 빛을 형형한 색채로 분광하는 프리즘이다.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드넓은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진정한 책들이 태어난다. (389~390쪽)
* 인생은 늘 미지의 혼란 가운데 나아가므로, 우리는 아주 먼 시선, 시간성을 벗은 아득한 눈으로만 우리 삶을 관조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간』 읽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이 되어보는 것이다. 죽음과 영원 사이에 갇혀 사는 인간이 기억을 통해 윤회하는 것이다. 『시간』의 서술자가 죽음에 대해 나타내는 것은 냉담이 아니라, 그 너머에서 도래한 초월적 시이다. (392쪽)
* 『시간』의 서사는 프루스트라는 한 작가가 고안해 낸 기발하고 참신한 이야기가 아니다. 프루스트의 목표는 그보다 원대했다. 「되찾은 시간」에서 프루스트가 문학에 대해 드러내는 무한한 애정은 그가 승부를 겨루고자 한 상대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한다. 그것은 동시대의 이름난 작가들이 아니고, 한 세기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는 협소한 자기 자신도 아니었다. 문학사의 대가들과 동류의식을 느꼈던 프루스트는 선대의 문학 유산을 끌어들여 체화하려는 모방의 열정으로써 일개인의 스타일을 뛰어넘는다. 그는 가장 진부한 서사 모형들의 조합으로써 새로운 세기의 양식(mode)을 이룩하려 한 대담한 도전자였다. (397~398쪽)
* 언제든지 기꺼이 욕망에 굴복한 프루스트의 가벼움에는 웅장하거나 고매한 덕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이 허약한 존재가 어떤 비인간적인 집념으로 자신의 문학을 끝까지 밀고나갈 때, 그 헌신은 전율스럽다. 프루스트의 힘은 지각 아래서 도도히 흐르는 마그마와 같다. 그것은 화산으로 폭발하지 않고, 대류하면서 대륙을 옮기고, 지구의 온도를 유지한다. (408~409쪽)
* 인생은 멀리서 보면 수많은 길들이 숨겨져 있는 아득히 너른 벌판 같지만, 매 순간만을 살 수 있는 우리의 시야에는 지척의 외길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삶이 정말로 선(線)형일지라도, 인간에게는 다면체를 상상하는 능력이 있고, 인간의 의식은 물질계를 벗어나 여러 시간대를 넘나들 수 있다. 『시간』 속 시간은 단선율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 주제 악구)를 다성부의 화음이 겹겹이 감싸며 전개되는 푸가 변주곡처럼 흐른다. 그것은 하나의 시공간에 여러 우주들을 펼쳐 보인다. 이 독창적인 프루스트식 시간여행이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해도, 우리 의식은 꿈으로 추억으로 상상으로 그러한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기를 무수히 되풀이하며 산다. (410~411쪽)
* 다독가들 사이에서 『시간』은 신포도 같은 책이다. 안 읽었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는 내키지 않지만, 읽었다고 섣불리 말했다간 봉변을 당할 것만 같다. 그것은 삼키기도 뱉기도 곤란하므로 애꿎게 비난당한다. 그래서 다짐하게 됐다. 언젠가는 내 눈으로 『시간』을 완독해 보리라. 그러고도 별로면 생전 펼쳐본 적도 없는 척해야지. 그러다 몇 해 전, 『시간』을 읽기에 알맞은 환경이 갖춰졌다. 고정된 일자리가 없어졌으니 실직한 거나 마찬가지고, 요양으로 말하자면, 없던 병이 읽다가 생기기도 한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들었다. 『시간』을 읽는 것은, 거대 자석 주위에 흩뿌려진 철가루들 중 한낱 부스러기인 내가, 프루스트라는 거인의 힘의 장력 안에서 발버둥친 시간이었다. 타는 갈증으로 물을 찾아 내 작은 곡괭이로 힘겹게 두드리고 파내기를 거듭한 끝에 도달한 지하 수원지는, 은빛 호수를 품은, 울림 깊은 동굴이었다. 어둡고 아늑하고 구슬픈, 황금빛 그로테스크에 눈이 휘둥그레져, 너무 오래 그 속에 잠겨 있었다. 이 보배로운 동굴에 현혹된 어리석은 독자를 위해 프루스트는 일찍이 훌륭한 일침을 예비해 두었다. (417~418쪽)
* 누구보다도 많은 책을 평생 읽었던 독자 프루스트는 말한다. 책은 질문을 던지고, 독자의 응답을 기다릴 뿐이라고. 독자인 당신이 책의 물음에 답할 때, 비로소 그 책은 당신에게 존재하는 책이 된다. 고전이 좋은 친구일 수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이해타산과 무관한, 죽은 사람들의 글이기 때문이다. 책과 당신은 서로 대화해야 하지만, 당신의 지성과 감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다른 누가 아닌 당신 자신이다. 당신이 바로 책의 친구고, 책의 거울이고, 책의 메아리다. 책과 당신은 그런 관계다. (420쪽)
* 지금껏 수많은 연구자 비평가 작가가 『시간』의 독자가 되어, 각자 저마다의 답을 내놓았다. 그들의 통찰은 일면의 진실을 밝혀 주지만, 내가 읽은 『시간』과는 항상 어딘가 조금씩 어긋났다. 아마 그것이 나의 대답이자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이런 내 말이 일면의 진실에 불과할 것이다. (420쪽)
*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했지만, 지금의 독서는 연습일 뿐이었다고 느낀다. 다음에 『시간』을 더 잘 읽기 위해서, 그다음에는 조금 더 깊이 또 새롭게 읽기 위해서, 나는 아직 프루스트 읽기를 연습 중이다. (4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