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2000년 중국 문명의 최초 설계자 한 무제과감한 개혁 정신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인재 등용으로진정한 통일 제국을 이루다
부제: 진취적 개척 정신으로 세계 제국을 일궈 낸 개혁가
원제 漢武帝傳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2년 2월 8일
ISBN: 978-89-374-8319-6
패키지: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840쪽
가격: 35,000원
분야 논픽션
2000년 중국 문명의 최초 설계자 한 무제
과감한 개혁 정신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인재 등용으로
진정한 통일 제국을 이루다
강한 개척 정신과 뛰어난 인재 관리로 세계 제국을 이룩한 한 무제의 삶과 치세를 담은 『한 무제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한나라 제7대 황제인 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면서 활력 넘치는 개혁과 발전의 시대를 일구어 냈다. 한 무제는 집권 후 무장을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군대를 출병하여 건국 이래 끊임없이 변경을 위협하던 흉노 세력을 약화시키고, 남월과 민월 서남이 등의 이민족을 평정하여 안정적 국가 운영의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여 중국에서 중아시아와 서방 세계로 통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동서 교역과 문화 교류의 기초를 마련했다. 국내 정치 면에서도 한 무제는 과감한 정책을 통해 무제 이후 2000년간 이어진 통치 체제의 기틀을 확립한다. 이 책은 『사기』, 『한서』 등 정사를 비롯해 최근의 연구 자료까지 아우르며 중국을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무제의 치세를 세세히 재구성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황제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 무제의 천하 경영을 통해 현대 사회에 필요한 지도자상을 되새겨 본다.
서언
1장 태양을 품고 태어난 아이
2장 유술을 존중하고 법치를 중시하며 백가의 학문을 두루 끌어들이다
3장 덕치를 시행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다
4장 재정 위기와 경제 개혁
5장 정치를 개혁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다
6장 이민족을 평정하여 안정된 통일 제국을 완성하다
7장 문화를 후원하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다
8장 제사를 거행하고 방사를 가까이하다
9장 말년에 과오를 뉘우치고 후사를 위해 인재를 배치하다
10장 친족과 어진 이를 함께 임용하여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다
11장 후궁 제도와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
12장 한 무제의 역사적 위상
후기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2000년 중국의 시스템 설계자
중국 최초로 통일 제국을 탄생시킨 이는 진시황이었다. 그러나 현대까지 이어져 온 통일 중국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한 무제였다. 『사기』의 영향 때문인지 한 무제는 전쟁을 일삼고, 장생불사를 추구해 신선 찾기에 몰두한 형편없는 왕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인식되어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는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침입자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 무제는 과감한 개혁과 새로운 정책 시행을 통해 이후 2000년간 중국이 이어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한 무제는 중국 최초로 연호를 시행했고, 태초력을 반포하여 처음으로 정월을 세수로 삼기 시작했다. 또한 그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던 도가의 일종인 황로 사상 대신,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 사상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고 태학을 세워 유가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오경(五經)은 역대 통치자들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의 주요 과목으로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으로는 추은령(推恩令)을 내려 제후들이 장자 외의 다른 자손들에게도 작위와 영토를 상속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그들의 바람을 만족시켜 주면서도 자연스럽게 제후국이 나누어져 중앙 집권이 강화되는 효과를 얻었다. 여기에 관리 임용을 다변화하고 인재 등용에 있어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 가의, 위청, 곽거병, 공손홍, 주매신, 김일제 등 자신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뛰어난 신하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한 무제는 이러한 다양한 조치와 개혁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오랜 세월 이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진취적 개척 정신으로 세계적 제국을 만들다
전국 시대에 북방의 연(燕)나라와 조(趙)나라, 진(秦)나라는 북쪽에 장성을 구축했고, 이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중원이 북방의 유목 민족인 흉노에게 계속 침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 멸망 후 초한(楚漢) 전쟁이 한창일 무렵 흉노의 묵돌(冒頓) 선우는 북쪽으로 바이칼 호 일대를 통일하고 서쪽으로 서역을 굴복시켰으며, 동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장성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장악했다. 그는 수시로 한나라 영토로 들어와 약탈했으며 대군을 몰고 와 왕조에 위협을 주기도 했다. 한 무제는 기존의 왕들처럼 방어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집권 후 무장을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군대를 출병하기 시작했다. 대담하게 흉노의 심장부에 대군을 파견해 결전을 벌였고, 수차례에 걸친 강공 끝에 흉노에게 치명타를 입히기도 했다. 이로써 흉노는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무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흉노의 오른쪽 어깨를 끊어 버리기 위해 서역 경영에 나서고 왼쪽 어깨를 끊어 버리기 위해 요동에 진출하여 고조선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러한 활동은 안정적인 통일 국가를 영위하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오늘날 중국의 영토를 확정 짓는 데도 기여했다. 동아시아 북부의 드넓은 영역을 점령한 군사 강국이었던 흉노를 격파함에 따라 중국은 세계적인 제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또한 흉노 정벌 과정에서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해 실크로드를 개척했으며 이를 통해 동서 교역과 문화 교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과오를 반성할 줄 아는 결단의 지도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한 무제 또한 인재를 중시한 제왕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통솔력 그리고 경력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바탕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유연한 태도는 한 무제의 치세가 오래도록 이어지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리하여 무제 시대에는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동중서, 정치가이자 교육가 공손홍, 대작 『사기』를 남긴 역사가 사마천, 문학가 사마상여, 군사가 위청과 곽거병, 외교가 장건, 음악가 이연년 등 정치, 군사, 학문, 문화의 각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된다. 한 무제가 지닌 또 한 가지 미덕은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 시작함에 주저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집권 후기, 한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졌음을 깨달았다. 흉노와의 전쟁에서는 번번이 패배했고 농민들의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는 ‘윤대조(輪臺詔)’를 내려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을 다짐했다. 이미 너무 많은 출병으로 피폐해진 국가 재정과 민생을 위해 더는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고 부민 정책을 실시해 농업 발전을 도모했다. 또한 한 고조 사후 여 태후를 등에 업은 여씨들의 횡포가 있었던 전례를 떠올려, 태자가 확정되자 모후인 구익부인에게 사약을 내려 외척의 횡포를 미리 방지한다. 이러한 정책 전환에 힘입어 한나라는 무제 이후 소제와 선제 때 발전을 거듭해 나갈 수 있었다. 한 무제의 열린 인재 경영과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새로이 시작하는 결단성, 창업뿐 아니라 수성까지 생각한 그의 안목은 현대인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지도자의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