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에보르크 바흐만,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뒤를 잇는독일 문단의 신성 유디트 헤르만의 최신작
하나둘 찾아오는 소중했던 이들의 죽음그리움과 고독 속에서도 삶을 이어 가는 법을 배우며상실의 아픔을 치유해 가는 알리스의 아름다운 여정
▶ 유디트 헤르만의 산문은 오늘날 독일 문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 마르켈 라이히 라니츠키
▶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인상파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유디트 헤르만의 문장은 종종 투박하고, 은유는 가난하며, 때로 단어가 부적절한데, 그녀는 이 점을 이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으로부터 살짝 거리를 두게 한다. 그러나 절대 도망은 갈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유디트 헤르만의 힘이다. —《슈피겔》
▶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그녀의 침착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는 빛을 발한다. —《차이트》
잉에보르크 바흐만과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뒤를 잇는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최신작 『알리스』가 민음사에서 모던 클래식(46번)으로 출간되었다. 헤르만은 1998년 『여름 별장, 그 후』로 “독일 문학이 고대했던 문학 신동”이라는 평가와 함께 휴고 발 상, 브레머 문학상,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2003년 두 번째 작품집 『단지 유령일 뿐』을 출간한 이후 6년간 침묵하던 그녀는 마침내 세 번째 작품집 『알리스』를 발표했다. 주인공 알리스가 각별한 사이였던 이들의 죽음을 겪고 그 상실감을 회복해 가는 심리적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 낸 『알리스』는 소중했던 사람들의 죽음 이후 남은 이들의 삶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정확히 관찰하되 그 아픔과 고독의 감정을 담담하고 간결한 문체로 표현해 더 깊은 애잔함을 전한다. 더욱 성숙해진 통찰력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삶과 희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어두웠던 이전 작품들과 차별점을 보인다. 작품은 다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매 편마다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난다.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된 단편으로도 완결성을 보이지만 그들의 죽음을 극복해 나가는 알리스의 여정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도 읽힌다. 『알리스』는 2009년 출간 당시 프리드리히 횔덜린 상을 받았으며 《슈피겔》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 간결하고 유려한 문체, 절제와 암시가 만들어 내는 ‘여백’이 아름다운 감성 소설
그의 셔츠. 그의 바지. 팬티, 티셔츠, 모자와 신발, 흰색과 빨강 체크무늬 셔츠. 아무런 기억도 없는 옷들. 푸른 셔츠. 엄청나게 많은 기억이 들어 있는 옷. (중략) 그 수많은 여름 중 어느 한 여름, 7월 어느 날 라이몬트가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너무나 바빠서 금방 다시 안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러면서도 알리스가 집에 온 것을 기뻐했다. 알리스를 보고 기뻐할 때면 라이몬트가 항상 보여 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략) 그때 라이몬트는 이 푸른 셔츠를 입고 있었다. (중략) 오래 망설이지 말아야지, 그렇게 바보같이 오래 망설이지 말아야지. 알리스는 몸을 떨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치워 버렸다. 다 함께. 그리고 적십자 상자에 넣었다. — 139~140쪽, 「라이몬트」
이전 작품들에서 한없이 간결한 아름다운 문체를 보여 주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이룬 헤르만은 『알리스』에서 한층 더 절제되고 섬세한 문체를 선보인다. 감상주의가 배제된, 헤르만의 짧고 건조한 문체는 작품 전반에 내재되어 있는 아련한 슬픔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고통의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사람보다 오히려 차분하고 담담히 드러내는 사람에게서 더 큰 슬픔이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효과다. 알리스가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순간에도 단지 헤르만은 “그의 셔츠. 그의 바지.”처럼 별다른 수식어 없이 주변 풍경이나 사물을 나열하는데, 상황에 걸맞지 않은 듯한 건조한 목소리는 독자가 그 이면에 숨겨진 감정의 크기를 상상하게 하여 더욱 깊은 애잔함을 전한다.
헤르만은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암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데, 이 같은 화법은 간결한 문체와 함께 텍스트에 독특한 ‘여백’을 만들어 낸다. 작가는 직접 발화한 것보다 이 여백에 더 많은 것을 담아낸다. 이를테면 슬픔을 직접 언급하기보다는, 죽어 가는 리하르트를 만나고 온 알리스가 연인 라이몬트에게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장면이나 라이몬트가 죽은 뒤 자동차를 파는 장면 등을 통해 남자의 죽음이 알리스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아픔, 그리움 등의 심상으로 읽어 내는 건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절제와 암시를 통해 은유적으로 전달하는 이러한 심상은 독자들의 마음속에 더욱 긴 여운을 남긴다.
■ 상실을 겪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사려 깊은 위안
이 작품은 이전 작품들의 주된 테마였던 ‘이별’보다 더욱 무겁고 음울할 수밖에 없는 ‘죽음’에 관해 다루고 있음에도 오히려 좀 더 희망적이다. 물론 헤르만은 이전 작품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여전히 소통이 단절된 인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며 현대인의 고독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죽어 가는 옛 연인 미햐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는 수녀의 질문에 알리스가 “그 수녀는 그저 죽어 가는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녀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대목이나, 출근하는 연인 라이몬트를 바라보는 알리스를 두고 “알리스는 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서술하는 대목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전 작품과 달라진 점은 단절된 인간들이 이어지는 순간을 좀 더 희망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이다. 작가는 잠시나마 서로를 이해하는 찰나의 순간, 그들이 희미한 끈으로 엮이는 연결의 순간들을 포착해 냄으로써 이전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통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내비친다.
거미 한 마리가 맥주병 사이에 그물을 쳤어요. (중략) 딱하더군요. 거미의 작품을 망가뜨려야 하는 것이 미안했어요. 알리스가 말했다. 그럼 미햐가 그걸 망가뜨렸군요. 마야가 말했다. 그래요, 제대로 맞혔어요. 알리스가 말했다. 알리스와 마야는 낮은 소리로 각자 혼자 웃었다. — 37쪽, 「미햐」
일제 차를 호텔 앞 주차 금지 구역에 세우고 무릎에 핸드백을 올려놓은 채 맥박이 뛰는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는 알리스와, 호텔 방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프리드리히, 그리고 최후의 순간 자신을 위해 어둠 속의 빛이 되어 줄 이가 아무도 없었던 말테 삼촌, 이 세 사람 사이에 섬세한 끈이 있었다.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연결된 끈. 이 일에 대해 뭔가를 생각해 보려고 알리스가 애쓰는 그 순간에도 세 사람을 묶어 주는 끈이었다. — 119쪽, 「말테」
헤르만은 이 작품이 다루는 ‘영원한 단절’, 즉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희망’이 비쳐 나오는 순간을 잡아낸다. 상실의 아픔은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알리스는 기차역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죽은 연인 라이몬트를 보고 미친 듯 뒤쫓아 갔다가 다른 사람인 걸 알고 실망하지만, 나중에는 계단에서 인도인 요리사를 라이몬트로 잘못 보고도 실망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똑같은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는 알리스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마음속에 절망과 슬픔이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것 같아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감정들 또한 흘러가며, 그렇게 고통은 치유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고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가는 알리스의 여정이, 소중한 이와의 단절이나 이별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잔잔한 위안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전한다.
도서 | 제목 | 댓글 | 작성자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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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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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