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BEYAZ KALE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1년 4월 29일
ISBN: 978-89-374-6271-9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240쪽
가격: 11,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271
분야 세계문학전집 271
‘나는 왜 나인가?’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집요한 탐구정체성, 동서양 문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등 오르한 파묵의 모든 주제가 집약된 대표작 “오르한 파묵,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 ―《뉴욕 타임스》 ▶ 오르한 파묵은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작가이며, 마치 셰에라자드처럼 진취적이고 풍부한 내러티브를 가진 이야기꾼이다. ―《뉴욕 타임스》▶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최고의 작가이다. ―《타임 리터러리 서플먼트》▶ 동양과 서양에 관하여 노련하고 섬세하게 묘사한 우아하고 철학적이며 역사적인 작품. ―《인디펜던트》
하얀 성
『하얀 성』에 관하여작품 해설작가 연보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세 번째 소설 『하얀 성(Beyaz Kale)』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번으로 출간되었다. 오르한 파묵은 이 작품으로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라는 평을 받으며 전 세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또한 카프카, 프루스트, 보르헤스,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 움베르토 에코 등 최고의 작가들과 비견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하얀 성』은 이후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동서양 문제와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왜 나인가?’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을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마주보는 도시 이스탄불을 통해 진지하게 접근한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이다.
끝까지 함락되지 않는 ‘하얀 성’처럼 절대 다다를 수 없는 타인, 알 수 없는 존재를 향한 끝없는 도전
17세기, 베네치아에 살던 젊은 학자인 ‘나’는 나폴리로 향하던 중 타고 있던 배가 오스만 제국 함대에 사로잡히면서 이스탄불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나’를 노예로 삼은 사람은 ‘호자’라는 젊은 남자로, 각종 학문 특히 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놀랍게도 그의 외모는 ‘나’와 아주 닮았지만, 그는 그것에는 무심하고, 오직 노예가 가진 학문적 지식과 그가 살던 나라 이탈리아에만 관심을 보인다. 호자는 서양의 발달된 기술과 그곳에서의 삶을 동경하며,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동양을 바꿔 보려는 꿈을 지니고 있다. 그는 ‘노예’에게서 그곳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고 한다. 한편 ‘나’는 끝까지 무슬림이 되기를 거부한 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갈 날만 꿈꾼다. 하지만 호자의 끊임없는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쌍둥이처럼 닮은 이 두 사람, 터키인 호자와 이탈리아인 노예는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서로의 어린 시절과 가슴 아픈 과거까지 함께 나누게 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이스탄불에 흑사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그리고 호자의 몸에도 의심스러운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에 호자는 두려워하는 ‘나’를 비웃지만 점차 겁에 질리고, 어느 날 밤 둘은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서로의 닮은 점을 찾게 된다. “그는 내가 되고, 나는 그가 되기를 원했다. 서로 옷을 바꾸어 입고, 그가 수염을 깎고, 내가 그 수염을 턱에 붙이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호자의 집에서 도망치지만, 흑사병을 퇴치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은 호자는 ‘나’를 찾아와 도움을 구한다. 결국 둘은 이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주인과 노예였던 둘 사이에 점점 동지애가 싹트고, 나아가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 시작한다.
내 마음속에는 아주 다른 감정이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내가 호자 그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주 꾸던 악몽처럼,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어 밖에서 보고 있었다. 나 자신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나의 정체를 뒤집어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앞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나 자신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가능한 빨리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본문 중에서)
흑사병이 물러가고 이 공로로 호자는 황실 점성술사의 지위에 오른다. 이를 계기로 그는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전쟁 무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나’ 역시 그를 돕지만, 이 무기는 불행히도 전시에 전혀 효과가 없었고, 오스만 군대는 패배한다. 사람들은 베네치아 노예인 ‘나’가 불운을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를 죽일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호자와 노예는 서로의 신분을 바꾸어, 터키인 호자는 이탈리아에 가고 이탈리아인 노예는 호자의 신분으로 터키에 정착한다. 그리고 터키에 남은 노예는 호자를 그리워하며 자신과 그의 이야기를 『하얀 성』이라는 책으로 쓰게 된다.
우리는 성을 바라보았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빛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존재는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어두운 숲 속의 구불거리는 길로, 언덕에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서 황급히 뛰어가면 그곳에 참가하고 싶은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았다.(본문 중에서)
‘나는 왜 나인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 『내 이름은 빨강』, 『검은 책』으로 이어지는 정체성 탐구의 시작
호자(동양)와 노예(서양)는 서로를 바라보며 처음에는 다른 점만을 발견한다. 호자는 자신이 살아온 동양을 부정하며 서양을 닮기를 원하고, 노예인 ‘나’는 그곳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갈 날을 꿈꾼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서로의 공통점을 인식하게 되며, 마침내 서로의 삶을 바꾸게 된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의 심장부에 쌍둥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정체성의 고뇌를 어떤 게임의 형식으로 이 테마에 접목시켰습니다. 주인공들이 서로 닮거나 닮지 않는 것 즉 서로의 정체를 상호간의 거울로 사용한 것은 영원한 정체성 문제를 게임화하고자 했던 것입니다.”라고 이 소설의 주제를 요약한 바 있다.
오르한 파묵은 주인공들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모든 삶은 서로 닮은 것”이라는 소설 속 말처럼, 어떤 세계나 어떤 삶, 어떤 사람이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삶 속에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끝까지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동양과 서양 역시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고 볼 수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고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후 작품들인 『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등을 통해서도 꾸준히 고민해 왔고, 정체성과 동서양 문제를 주제로 한 3부작을 완성했다.
『하얀 성』은 서로 다른 세계의 두 주인공을 통해 동서양의 정체를 모색하는 동시에 이해하고자 하는 작품이며,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느냐에 관한 자기 성찰적인 소설이다. 동서양 문제에 관해 파묵의 말을 다시 한 번 부연하자면 ‘동양은 동양이 되지 말며, 서양은 서양이 되지 말라.’라는 바람이 이 소설의 궁극적인 모티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파묵은 노예의 입을 통해 “어쩌면 몰락이란 우월한 사람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작품 해설」 중에서)
‘작가의 상상 속에서 모험을 계속하는 책’ 헌사와 서문에서부터 작가 후기까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오르한 파묵
오르한 파묵은 이 책에서 “좋은 이야기란 처음 부분은 동화처럼 천진난만해야 하며, 중간 부분은 악몽처럼 무서워야 하고, 마지막 부분은 이별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처럼 슬퍼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소설 『하얀 성』은 그의 이 말처럼 전개되는데, 파묵은 「『하얀 성』에 관하여」라는 작가 후기를 통해 어떤 책들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형식이나 기법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자기 삶의 어떤 부분을 이 책에 반영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소설의 서문과 뚜렷이 대별된다. 서문은 현대를 살고 있는 ‘파룩 다르븐오울르’라는 인물이 옛 문서 사이에서 필사본 하나를 발견했고, 그것을 현대 언어로 옮겨 이 책 『하얀 성』으로 출간한다고 쓰고 있다. 독자들에게 이 책에 쓰인 일들과 등장하는 인물들이 17세기에 실재했다고 느끼게 하는 글이다. 그러나 서문을 쓴 ‘파룩 다르븐오울르’는 오르한 파묵의 두 번째 소설 『고요한 집』에 등장하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을 헌정한 ‘닐귄 다르븐오울르’ 역시 『고요한 집』의 등장인물로 파룩의 여동생이다. 오르한 파묵은 이런 장치를 통해 역사소설 『하얀 성』이 사실(史實)에 바탕한 작품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동시에, 허구의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소설 속 이야기가 허구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얀 성』의 필사본을 이탈리아인 노예가 쓴 것인지, 오스만인 호자가 쓴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와 같이, 작품 뒤에 실린 후기 「『하얀 성』에 관하여」에서는 이러한 독자들의 생각을 완전히 깨뜨리는 언급을 하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과 사건 들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완벽하게 맞물려 있는 듯 보이지만, 파묵은 자신이 조사한 내용과 소설의 내용이 어떻게 같은지 그리고 다른지를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파룩처럼 기록 보관소에서 연구를 하고, 도서관의 먼지 앉은 책장과 필사본 속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파룩이 한 일을 내가 떠맡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단지 파룩이 찾은 몇몇 세부 사항을 유용하게 사용한 셈일 뿐이다. 이 세부 사항을 내가 처음으로 역사소설을 쓸 때 즐겁게 읽었던 스탕달의 『이탈리아 이야기』에서 배웠던 오래된 그 방법, 그러니까 ‘발견된 필사본 방법’을 통해 파룩을 시켜 서문 부분에 쓰게 했다.(「『하얀 성』에 관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