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 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오늘의 시인 총서 앤솔로지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민음사의 전통을 보여 주는 시리즈인 ‘오늘의 시인총서’ 출간 50주년을 앞두고, 시를 통해 지난 반세기의 감수성을 되새겨봄과 동시에 추억 속에 잠겨 있던 시집을 꺼내 다시 읽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기획된 책입니다. 오늘의 시인 총서로 시집을 출간한 6명의 시인과 내년 출간을 앞두고 있는 시인 등 모두 7명의 시 5편씩, 총 35편의 시를 수록한 시 선집입니다. 제목은 이성부 시 「우리들의 양식」의 한 구절에서 가져왔습니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민음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시 선집 시리즈입니다. 1974년에 출간된 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가 1번이었죠. 어느새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김춘수, 김종삼, 천상병, 오규원 등 한국 현대 시사에 굳건히 자리잡은 시인들의 시를 선별한 선집인 만큼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더 낯설고 더 새로운 감각들의 출현을 기다리는 사이, 오래된 시를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 또한 포기할 수 없는 정신임임을 상기하며 ‘오늘의 시인 총서’ 앤솔로지를 선보입니다.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 이성부, 강은교, 장정일을 비롯해 내년 출간을 앞둔 허연의 시에 이르기까지, 일곱 명의 시인이 보여 주는 일곱 개의 언어 속에서 시에 대한 질문을 완성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시의 일곱 가지 색깔
시는 파격입니다. 김수영 시의 파격성은 모더니즘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파격과 결을 같이 합니다.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거대한 뿌리」)이라고 일갈하는 김수영의 시는 무엇이 시어이고 무엇은 시어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을 해체하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모더니즘의 생생한 현장으로서 김수영의 시가 한국 현대시의 뿌리라고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시는 자유롭습니다. 이때의 자유는 언어로부터의 자유이자 언어로 규정된 사물로부터의 자유를 모두 지칭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꽃」) 시인 김춘수를 모르는 사람도 이 유명한 구절만은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김춘수는 언어가 갖는 의미보다 언어의 존재에 깊이 천착함으로써 시가 할 수 있는 사유의 진폭을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시는 침묵합니다. 김종삼의 시를 ‘보고’ 있으면 여백으로 가득한 동양화 앞에 선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그리고 이내 침묵 속에 깃든 적막한 아름다움에 온몸이 전율합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고, 이런 것이 또한 시가 아닐까요. 전부 다 알 것 같은 침묵을 여백으로 안고 있는 시. 내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바로 시라는 미학이 아닐까요.
시는 모두의 것입니다. 개인을 발견하는 것이 시라고는 하나, 개인을 초과하는 공적 존재가 필요할 때 시는 개인을 결합시킵니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벼」)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이성부의 시를 관통하는 것은 가장 공적인 개인입니다. 그러므로 이성부 시의 화자들은 밤이 되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우리들의 양식”을 습득합니다. 시로 만나는 공동체의 정동을 이성부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는 먼지입니다. 강은교의 시는 존재의 바닥을 흐르는 허무의 심연을 통찰하는 허무의 주체를 발견합니다. 시인은 우리의 적이 “전쟁”이나 “부자유”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적은 “끊어지지 않는 희망”이거나 “매일밤 고쳐 꾸는 꿈”, 무엇보다 “아직 살아 있음”이라는 것입니다. 왜 시인은 그 좋은 것들을 오히려 적이라고 할까요. 인간의 실존은 언제나 허무, 공허, 의미의 세계와 싸워지 않으면 금새 추락하고 말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는 뒷면을 비춥니다. 장정일의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소비시대로 변모해 가는 세상의 풍속을 재치 있게 풍자합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은 샴푸 요정이다.”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저녁 티비 속 광고에 15초간 등장하는 모델 “샴푸의 요정”을 사랑합니다. 매끈하고 효율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어쩐지 군색하고 왜인지 처량한 초상들에서 소비자본주의시대의 이면을 읽습니다.
시는 비명입니다. 그것도 외마디 비명. 허연의 시를 이루는 배경에는 도시와 도시인의 우울이 있습니다. 그의 시가 포착하는 도시인의 내면은 일상과 비일상이 가까스로 공존하는 불안의 전초기지로, 그들은 언제나 자기와의 전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자신을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복잡한 인간 내면의 심리적 상흔으로서 그의 시가 스스로에게 불행을 명령하는 존재론적 공황에 다다를 때, 그들이 내는 외마디 비명은 현대인의 출구 없음에 대한 쓸쓸하고도 정확한 발화를 의미합니다.
소설을 읽으며 세상에 질문하는 법을 배운다면 시를 읽으며 우리는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법을 배웁니다. 시가 내 마음에 일으키는 무늬가 무엇인지, 패턴의 질서와 그러한 질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누구도 나 대신 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낡은 책장 속에 넣어 두었던 시집을 다시 꺼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을 시작해 보는 겁니다. 시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면서 말입니다.
편집자의 말 5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19
푸른 하늘을 22
거대한 뿌리 24
현대식 교량 27
사랑의 변주곡 29
김춘수
꽃 35
꽃을 위한 서시 37
눈에 대하여 39
시1 41
시2 43
김종삼
북 치는 소년 47
묵화 48
문장 수업 49
산 50
서시 52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55
밤 58
이 볼펜으로 60
되풀이 63
믿을 수 없는 바다 65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69
자전3 71
봄 무사(無事) 73
저물 무렵 74
우리의 적은 76
장정일
샴푸의 요정 81
축구 선수 85
험프리 보가트에게 빠진 사나이 87
하숙 90
햄버거에 대한 명상-가정 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 92
허연
칠월 99
내 사랑은 101
슬픈 빙하시대2 103
서걱거리다 105
나쁜 소년이 서 있다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