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꾼,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다
고등학교는 두세 달 만에 때려치웠고, 검정고시를 치른 후 신학대학에 입학했지만 그 역시 얼마 안 돼 그만두었다. 입대 후에는 자원하여 월남전에 참전했고 제대하고 나서는 공사판을 전전했다. 영원한 청춘이자 진정한 자유인이었던 이윤기, 그렇게 온몸으로 시대를 살았던 이야기꾼 이윤기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나 영면에 임했다. 동인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지난 30여 년간 150여 권에 이르는 번역서를 내놓은 가장 신뢰 받는 번역가로서, 그리고 한국에 그리스 로마 신화 붐을 일으키다시피 한 최고의 신화 연구가로서 말이다.『위대한 침묵』은 자신의 체험을 시종 명징한 언어와 유쾌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펼쳐 놓곤 했던 이야기꾼 이윤기가 마지막으로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다. 1부 「날마다 지혜를 만나다」에서는 자연에 얽힌 단상을, 2부「내가 뿌린 씨앗, 내가 거둔 열매」에서는 저자의 일상과 지인들과의 추억을, 3부 「위대한 침묵」에서는 신화와 고전,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을, 4부 「부끄러움에 대하여」에서는 세태 비평과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리고 5부 「어머니는 한 번도 날 무시하지 않았다」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모습까지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진솔한 음성으로 들려준다.
■ 이윤기식 유머와 빼어난 글맛에 빠지다
유고집 『위대한 침묵』은 자신의 인문학적 관심을 ‘인간현상학’이라 명명하기도 했던 이윤기의 풍부한 인문 교양과 인간, 그리고 우리네 삶에 대한 깊은 사색과, 성찰, 혜안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정규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중학교를 졸업한 후부터는 거의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우고 익혀 왔던 이윤기. 그는 말한다. 신춘문예도 ‘당선’이 아니라 ‘가작 입선’을 했으며, 대학도 ‘졸업’이 아니라 ‘중퇴’를 한 것이라고. 소설가와 번역가 등으로 명성을 얻은 후에도, 미국 대학의 급료를 받는 ‘연구원’이 아니라 아무런 보수도 없는 ‘초빙’ 연구원이었으며, ‘교수’가 아닌 ‘객원’ 교수, ‘박사’가 아닌 ‘명예’ 박사였다고. 이윤기는 “한 번도 ‘꽃’으로 피어 보지 못한 채 나는 ‘잎’으로만 살았다.”고 고백하며 “그래도 잘 살고 있”으니 “젊은이들이여, 힘들 내시라.”고 힘껏 응원한다.주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하여 늘 고단하고 지친 삶으로 인해 절망하고 낙심한 이들을 위로하는 이 희망의 목소리에 빠져들게 되면, 독자들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 채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들려주는 우리네 삶의 속내를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삶의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 추천의 글
선생은 쓰셨다. “나무는 나의 재산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실존에 속할 것이다.” 말이 정확하고, 견결해야 하고, 또한 웅숭깊어야 한다고 하셨다. 한 분의 대가를 저세상으로 보내 드렸으나 그분이 남기신 것으로 인해 우리의 나무 그늘은 더욱 넓어지겠다. 이미 너무 넓어졌겠다. 그 그늘에서 쉬기만 할 것인가. 그러나 그분은 쉬는 것도 ‘참’이라 하실 듯하다. 쉬며 바라보고 또 건너야 할 곳을 알 터이니.— 김인숙(소설가)
선생은 처음 만난 이 앞에서도 전에 한 번 만난 적 있었던 것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 놓는다. 가끔 자신의 성공담 등으로 목소리가 커질 만한데도 선생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나직나직하다. 그러다 바지 주머니에서 잘 접힌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는다. “이 손수건요. 소매로 쓱쓱 입이나 코를 훔치는 게 아니라 손수건을 써야 한다는 걸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제 아냅니다.” 손수건 한 장에도 사연이 있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가 바로 선생이었다. 선생은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선생의 돌연한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선생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선생의 웃음소리와 잔잔한 목소리,겸양과 그 위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이 모든 것이 선생의 독특한 화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정적이 다음 말을 잇기 전의 잠깐 동안의 뜸 들임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나는 귀 기울인다. 선생이 다음 말씀을 꺼내 놓을 때까지.— 하성란(소설가)
■ 이 책의 차례
1 날마다 지혜를 만나다나무만이 희망이었다날마다 지혜를 만나다빈 땅에는 나무를 심어야지요잔인한 4월, 고라니 한 마리오, 소리재앙은 홀로 오지 않는 법이거니
2 내가 뿌린 씨앗, 내가 거둔 열매떠난 자리내가 뿌린 씨앗, 내가 거둔 열매속 깊은 친구 이야기52년 저쪽에서 날아온 이메일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네
3 위대한 침묵여자 때문에 망했다고?좋은 말 몇 마디, 감옥이 되는 수도 있다정말 그 이름들이 내게 스며들어 있을까?나는 문화가 무섭다위대한 침묵터키의 ‘흐린 주점’에서아름다워라, 저 울분조르바, 지금 이 순간 뭐하는가?
4 부끄러움에 대하여아직도 나의 옷을 입지 못하고불편한 진실야만적인, 너무나 야만적인부끄러움에 대하여이름값의 허실‘선플’ 뭡니까, ‘선플’이?나도 저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한식 세계화? 좋지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니!
5 어머니는 한 번도 날 무시하지 않았다진짜 나이, 가짜 나이나만 짠했을까?고독은 나의 고향없는 호랑이 만들어 내기듣지 못하고도 살 수 있을까?어머니는 한 번도 날 무시하지 않았다가을 날씨가 참 좋군요나는 추천사를 더 이상 쓰지 않는다악우들이여, 안녕
아버지의 이름_ 이다희
이 시대의 진정한 교양인 이윤기가
마지막으로 남긴 희망의 목소리
『위대한 침묵』은 2010년 8월 27일, 63세로 타계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윤기”의 유고 산문집이다. 모두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37편의 산문과 함께, 말미에 번역가인 딸 이다희가 아버지 이윤기를 추모하며 쓴 글인 「아버지의 이름」을 실어 감동을 더하고 있다.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 신화 등을 넘나드는 풍부한 인문 교양이 이윤기 특유의 해학과 재치가 어우러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로 맛있게 버무려졌다. 그가 펼쳐 놓은 유려한 필치는 때로는 따뜻하고 소박한 웃음으로, 때로는 가슴 뭉클한 눈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삶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문하는 행동하는 철학자, 또한 진정한 자유인이기도 했던 이윤기의 혜안과 주옥같은 명문을 이 책에서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위대한 침묵』을 통해, 이제 이 땅의 독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