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긴 시간을 관통하는 우주적 기억을 읽어 내는 시적 인식과 감각적인 시적 방법에서장인적인 솜씨가 느껴진다. 단순한 현상을 투시하여 그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눈과 활달한 상상력,그것이 김성대 시의 매력이다. ㅡ김기택(시인)
귀 없는 토끼들이 하나둘 닻을 내리는 지구,
거세당한 정체성만이 무감각하게 절뚝거리다
극한으로 치닫는 존재의 실험 한가운데
몸짓으로 소통하는 스물아홉 번째 김수영
시인 김기택은 “장인적인 솜씨가 느껴진다.”고 말했고 문학평론가 서동욱은 “우리 시단은 이런 세계를 가져 본 적이 없다.”고 평했다.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으로 심사위원들의 극찬과 절대적인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며 2010년 제29회 <김수영 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시인 김성대. 2005년 《창작과비평》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성대는 “전통 서정시를 계승하는 빼어난 감수성의 소유자”(시인 김사인), “사물과 인간을 바라보는 천성적인 서정의 눈길이 발군”(시인 박형준)이라는 평을 받으며 단박에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김성대의 선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또 다른 방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랜 침묵과 방황의 긴 터널 끝에, 그는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김성대가 “섬세한 촉수의 언어”와 “알 수 없는 광기의 속력”(시인 김행숙)으로 “귀 없는 토끼”들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순간, 우리는 이 귀머거리들의 세계에 당혹스러움을 넘어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된다. 침묵과 무음이 팽배한 세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조차 확정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귀 없는 토끼”들을 위해 그가 조심스럽게 내미는 “소수 의견”에 귀 기울여 보자.
■ 자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귀 없는 토끼”들의 세계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모스 부호처럼 계속된 방랑과 정착, 그 길고 긴 방황을 거듭해 온 시인 김성대. 거의 절필하듯 오랜 칩거의 시간을 보낸 끝에 그는 어느 날 밤, 서울 하늘에 쏟아지던 유성을 바라본다. 바로 그때부터 그는 미친 듯이 맹렬히 시를 쓰기 시작한다. 시인은 그렇게 “이물스러운 서울의 끝방”에서 “한 컷 한 컷 망설이는 얼굴로” 시를 쓰고 들리지 않는 제 목소리를 들었다.
김성대는 “귀 없는 토끼”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존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경로를 무자비하게 차단한다. 헤겔의 말처럼 “청취한다는 것은 곧 존재가 자기가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을 듣지 못하는 세계, 곧 내가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지 않은 세계에서 정체성(동일성)의 수립은 불가능하고 ‘나’를 모르는 주체는 그 반응 없음에, 혹은 언어의 불완전한 연소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말하는 곳은 여기지만 닿는 곳은 여기가 아닐지도 모”르는 세계에서 ‘나’의 귓속에는 모래가 바삭거린다. 쓸모없는 귀는 말라 간다.
들리지 않는 꿈처럼
귀 안으로 사막을 옮기는
무음의 그림자
―「태내적 귀」에서
신의 목소리는 외려 침묵 그 자체이다. 공기라는 매질, 소리의 분절이라는 불순물을 경유하지 않는 순수한 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존재의 정체성을 간파한다. 그러나 김성대에게 존재하는 침묵은 내면의 소리가 통용되는 침묵이 아니라 목소리의 죽음을 선고하는 침묵이다. 귀머거리 토끼는 세상의 모든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이제 침묵이 찾아온다. 곧 우리는 신이 말해도 소용없는, 신이 버린 세계로 떨어진다. “귀를 자르는/ 내일의/ 신생의/ 레퀴엠” 소리 말고는 무엇도 용납지 않는 세계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 들리지 않는 언어 대신 몸짓으로 이 세상의 소수자들에게 다가서다
언뜻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이 귀머거리 세계에 김성대가 제시하는 것은 바로 마임이다. “마음은 됐고 몸은 함께”하는 사이에서 “우리의 공용어란 그짓뿐”이다. 소리에 빚지지 않는 마임을 통해 그는 순수성의 신화에 의존하는 온갖 위계적인 정체성을 배격하고 언어 대신 몸짓을, 문법 대신 화용론을 주장한다. 이렇게 파편화된, 개별적인 경험들이 “말을 할 때마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귀 없는 토끼들에게 생명을 건넨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형제들에게 생애라는 먹이를 주자
―「사자와 형제들」에서
예민한 감각과 “섬세한 촉수의 언어”가 빛나는 김성대의 시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작은 사물과 개인의 몸에 집중한다. 일상적인 사물, 단순한 현상에서 우주적인 거대한 이미지를 뻗어 나가게 하는 그의 시어들은 낯설고 모호하며 말라 가는 시상을 역설적으로 풍요롭게 한다. “귀가 마르는 말들”, “팔이 떨어지는 소리/ 손에 금이 가는 소리”처럼 김성대의 시는 흡사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한 묘사로 우리를 기괴한 세계에 몰아넣는다. 목소리도 귀도 소용없는 ‘마임의 방’에 갇힌 당혹스러움. 그러나 이면에는 소수성을 향한 끈질긴 집념, 소통을 희구하는 열망이 곳곳에 배어 있다. 시적 화자의 일상 속에 함께하는 소수자들(“동남아의 소년들은 왜 내게 형제라고 하는지”, “새벽 여인숙에서 흑인 사냥꾼들이 목욕을 하고”, “막내는 쌍둥이 노숙자가 기거하는 공원에서 콜라 한 잔을 얻어 마셨다”)은 “귀 없는 토끼”처럼 정체성의 혼란과 소통의 불가능으로 고통스러워하지만 김성대의 시에서 특별한 위안을 얻을 것이다. 정적인 몸부림으로 가득 찬 그의 시에서 말이다.
■ 작품 해설 중에서
등단 이후 김성대는 깊은 바위 그늘에서 혼자 무엇엔가 몰두하는 속을 모를 물고기처럼 우리에게 자주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잊힌 시간, 공백, 휴지기라는 듯 그가 이 첫 시집을 통해 갑자기 우리에게 펼쳐 보인 세계는 지구에 추락한 달의 한 조각처럼 매우 새롭고 당혹스러운 것이다. “지상에 닿은 적 없는 안개를 딛고 있는/ 발목들”처럼 느리고 무섭게 적막하며, 때로 비통함 없이 절망적이기도 하고, 소리 없이 맴도는 토끼 무리의 고집스러운 운동처럼 얼마간 공포스럽기도 한 이런 세계를 우리 시단은 가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서동욱(시인·문학평론가)
■ 심사평 중에서
깊이 있고 폭이 넓은 이미지를 자유롭게 활용하여 스케일이 큰 시를 빚어내는 능력이 돋보인다. 작고 구체적인 사물이나 몸에서 진화의 긴 시간을 관통하는 우주적인 기억을 읽어 내는 시적 인식과 그것을 감각적으로 간결하고 선명하게 구성하는 시적 방법에서 장인적인 솜씨가 느껴진다. 단순한 현상을 투시하여 그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눈과 활달한 상상력, 그것이 김성대 시의 매력이다. ―김기택(시인)
김성대의 시는 잔잔하게 천천히 전진하는 시적 어조 속에서, 단단하나 비밀의 껍질을 두르고 있는 삶의 내면으로 집요하게 침투해 들어간다. 자극적인 언어나 소란스러운 시적 정황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 매우 깊이 있고 세련된 언어 구사를 통해 삶의 다채로운 국면을 시 속에 녹여 내고 있다. 마치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악기 안에 들어 있는 음악을 서두르지 않고 한 가닥 한 가닥 인내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뽑아내듯 그는 견고한 시를 쓰고 있다. 김성대의 이 진지한 성취는, 진정 〈김수영 문학상〉의 거울에 담겨 사람들을 놀라게 할 우리 젊은 시의 한 모습이라 할 만하다. ―서동욱(시인․문학평론가)
그는 무엇보다도 ‘촉’이 좋다. 그의 세계와 문체는 섬세한 촉수의 언어에서 나온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 조금씩 변해 가는 것, 약간 틀어진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까지 그의 예민한 촉수는 감지한다. 그의 시는 새로운 과거와 오래된 미래의 시간을 보여 준다. 그의 시는 “끊임없이 자신을 듣는 귀 안쪽”과 같은 공간 속으로 우리를 문득 데려다 놓는다. 그 섬세한 촉수의 언어가 파열되면서 알 수 없는 광기의 속력이 문장을 사로잡을 때 의식 이전, 지각 이전의 세계가 솟아오른다. ―김행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