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의 새로운 경지를 향한 시와 사유의 교차 모험
―‘익명성’을 화두로 현대 시의 낯선 얼굴에 가까이 다가간다
시인이자 철학자로 현대 철학의 개념들을 이용해 한국 시의 최전선을 사유해 온 서동욱의 첫 번째 문학 비평집 『익명의 밤』이 민음사에서 나왔다. 벨기에 루뱅에서 들뢰즈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후, 필자는 2000년대 전반에 걸쳐 《세계의 문학》, 《문학과 사회》, 《창작과 비평》 등 유수의 문예지에 활발한 비평 활동을 개진하면서 이원, 김행숙, 조연호, 김경인, 김경주, 황병승, 이근화, 김지녀 등 젊은 시인들의 시와 그 배후에서 새롭게 떠오른 강력한 움직임에 주목해 왔다. 현직 철학 교수가 전문적인 철학적 견지에서 쓴 최초의 현장 비평서인 이 비평집은 ‘익명성’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어느 때보다 풍요로우면서도 난해한 것으로 이름 높은 최근의 한국 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익명성’이란 법과 질서에 의해 부여된 사물의 이름이 파괴되고 고유성을 지닌 ‘자아’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인간 내면에 기저해 있는 야생성이 부각되는 순간 발현되는 현상으로, 필자는 그 어느 때보다 급격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현대 시를 이러한 ‘익명성’이라는 주제를 통해서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2000년대 우리 시를 현장에서 다루며 최첨단의 철학적 사유와 우리 문학의 가장 새로운 현상을 접목시켜 바라보는 이 의미 있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생경하고 낯선 현대 시와 그 시인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함과 동시에 한국 시의 새로운 지평을 내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시는 익명성을 어떻게 사는가, 익명성은 시를 어떻게 탄생시키는가
『익명의 밤』을 여는 1부에서 필자는 ‘현대 시의 익명성’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부각시켜 “‘나’라는 이름의 거울 속에 붙잡히기 전에 거울을 깨뜨리는 시인들”과 그들의 “익명적인 시”를 다루면서 우리 현대 시의 근저 도처에서 발견되는 익명성을 찾아내고 있다.
또한 2부에서는 2000년대 한국 비평계의 가장 큰 논의였던 ‘시와 정치’에 대해, 여러 좌담과 비평을 통해 이 논의의 중심에 서 있던 필자 본인이 정리한 시의 정치성에 대한 집요한 추적이 돋보인다. 언제나 사람들이 지닌 정치적 열망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통치하지도, 가르치지도 않는 시. 시가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정치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결산적으로 제시한 장이 흥미롭다.
3부는 일견 양립할 수 없는 듯 보이는 두 개념, ‘익명성’과 ‘주체성’의 종합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익명적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 고전적인 주체 개념이 아닌, 익명적인 것에서 필연적으로 태어나는 주체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시단의 생산력을 활발하게 한 주목할 만한 시인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4부는 1980년대에 이어 시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산적인 시의 시대를 이끌어 온 젊은 시인과 그들의 시를 익명성이라는 제목 아래 정리한다. 이들 시의 진면목을 정체성과, 정체성을 마련해 주는 기존 법에 저항하는 익명성이라는 통일된 주제로 조명하는 이 작업은 한국 시의 경지를 더욱 넓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이 책의 5부는 시 비평의 영역 안에만 제한되지 않는 다양한 문화적 주제들을 다룬다. 지금껏 어떤 개념 틀 안에서도 제대로 철학적으로 사유되지 않았던 문화의 미세한 부분들, 즉 알코올 중독, 일기예보, 점쟁이, 아바타, 불륜, 건축 등을 시 분석과 연동하여 분석하고 있는 이 장은 비평의 영역 확장인 동시에 시적 사유의 매우 독특한 사례라 하겠다.
시가 익명성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익명성이 시를 어떻게 탄생시키는지에 대한 치열한 모색이 담긴 이 책은 필자가 벨기에 유학 당시인 2000년에 펴낸 철학서 『차이와 타자』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깊이를 더해 온 익명성에 대한 사유의 결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시의 생산력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삶이 시와 더불어 있다는 것은 표상들 사이에 마련된 허구적인 질서를 떠나는 일이 아닐까? 그것은 문명의 배후이자 문명이 출발한 기원을 엿보는 일이며, 저 배후에 있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바로 익명적인 것이 어느 날 전혀 다른 표상들을 선택하면서 이 문명을 한순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명의 종말을 엿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은 야생적인 것, 그리고 그와 동일한 자격에서의 ‘자유’로부터 삶을 최초의 생명처럼 다시 시작해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코기토도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며, 동일률도 배중률도 모순율도 가지지 않으며, 불변적인 초월적 시니피에를 가리켜 보이는 것도 아닌 말들, 그러니까 주체와 진리와 문명이 마치 자신이 전진하는 와중에 영문 없이 생겨난 예기치 못한 실수를 바라보듯 곤혹스럽게 대면하는 현대 시는, 모든 것의 밑바닥에서 으르렁거리는 저 익명적인 것이 우연히 찍혀 나온 귀신 사진, 노래 뒤에 녹음된 잡음, 대륙의 사막이 막 시작되는 알려지지 않은 바닷가와도 같다. 우리는 거기서 낯선 중력 때문에 바닥에 배를 끌며 최초의 한 걸음을 시도해 보고 있을 뿐이다.
―본문 중에서
■ 이 책의 차례
프롤로그 – 이름 너머에서, 아들한 곳에서 들려오는
1부 | 익명의 시
익명의 밤 – 최근 시 읽기
동물 변신 문학 – 분열증적 동물 시
현대 시와 함께하는 이동식 목축
2부 | 시와 정치
천수천족수의 시 – 김수영과 참여 문학에 대한 단상
시와 비진리 – 이미지의 논리
이미지와 시간 – 반복의 시간과 비진리
감정 교육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앙가주망에 대한 단상
시와 정치
3부 | 익명적 주체와 타자
피부 주체 – 김행숙의 「타인의 의미」 또는 피부 시의 비밀
보론 : 소리와 피부 – 김지녀의 「드럼 연주법」 또는 타자를 향하는 자
사도 바울, 메시아, 외국인 – 익명적 주체 또는 보편주의
보론 : 외국인과 악마 – 데빌스 네버 크라이
무엇이 외국 이론 수용의 문제인가
예외 상태와 환대에 대한 오해들 – 벤야민의 열매
보론 : 헤겔과 벤야민에서 바로크적 군주의 몰락
4부 | 시인들
한 사람의 욕조 – 김행숙의 시들
시차의 시 – 김경주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
안부를 묻고 사랑을 하고 슬픔을 어루만졌지 – 김지녀 시집 『시소의 감정』
렉터 박사, 외과 수술, 아니 식사 – 강기원 시집 『바다로 가득 찬 책』
묘지론 – 성윤석 시집 『공중 묘지』
연애의 흔적 – 권혁웅 시집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5부 | 익명성 또는 문화의 끝
|무질서의 질서| 점쟁이, 일기예보, 탐정 소설 – 어떻게 무질서에서 질서를 구하지?
|술| 알코올 중독
|건축| 건축이란 무엇인가? – 또는 ‘장소’에 대하여
|문자 보내기| 애인에게 문자를 날리다
|죽음과 사랑| 트리스탄의 도덕
|춤| 신체 연구
|아바타| 흔적 속에 부유하는 삶
에필로그 – 익명의 죽음
발표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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