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의 가장 낯설고도 거대한 이름 하일지
세상의 모든 언어와 서사를 생경하게 변화시키는 그가 2003년 출간한
프랑스어 시집 『Les Hirondelles dans mon tiroir』의 국내 출간
건조한 무국적의 어휘, 미로를 연상시키는 서사, 낯선 도시의 거리를 떠도는 듯한 상실의 감성으로 세대를 막론하여 가장 ‘현대적’인 문학의 대명사로 꼽혀 온 『경마장 가는 길』의 작가 하일지. 그가 2003년 프랑스에서 출간한 시집 『Les Hirondelles dans mon tiroir』가 민음사에서 국내판으로 출간되었다.
1990년 데뷔한 이래 오늘날까지, 실험적인 걸작 장편소설들을 발표하며 한국 현대 문학에 있어 ‘영원한 첨단의 기수’로 남아 온 하일지는 해외 체류 중 지금까지 각각 영어와 프랑스어로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다. 그중에서 이번에 출간된 『내 서랍 속 제비들』은 파리에 체류하던 작가가 프랑스어로 집필한 작품으로, 시어가 간결하고 단순한 만큼 거기에 담긴 하일지 특유의 감수성을 더욱 농후하게 느낄 수 있다. 세피아 잉크로 그린 펜화와 같이 담담한 우수, 섬세한 상징이 부여된 등장인물, 각 시편 사이의 크고 작은 관계와 이야기 등이 독자로 하여금 한 편의 아름답고 슬픈 동화를 읽은 것 같은 상념에 빠지게 하는 이 시집에서는 특히 프랑스어판에 없었던 사계절의 구분에 따라 시를 재편성, 시를 읽는 우리를 영원히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계절로 인도하고 있다.
하일지, 그의 비밀한 ‘서랍’ 속 깊숙이 숨겨진 망명자의 여권. 프랑스어 출간 이후 7년 만에 우리는 그 여권에 새겨진 기나긴 망명의 이력을 읽게 되었다. 먼 이국에 머물던 당시 시인의 방랑자적 애수가 배어 나오는 이 시집과의 만남은 올 가을, 가장 고독하면서 아름다운 문학적 체험이 될 것이다.
■ 길을 잃은 계절과 끝나지 않는 한 해
망가진 벽시계 속에 새겨진 시간들
하일지의 작품에는 책장을 펼친 순간, 펼치기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영원히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이 동화적인 시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랍 속’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만화경을 통해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가 알던 세상은 산산이 부서지고 낯설고도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그의 세계에서, 잠들기 전 벗어 둔 구두는 잠든 주인을 버려둔 채 거리로 나가 유혹하는 웃음을 웃고, 모두가 저마다 손에 든 가방은 밤마다 들어가 잠을 자는 방으로 화한다. 비밀의 정원에 핀 아리따운 양귀비들이 맨발의 율리아로 변하여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오리나무들이 생선 가게를 향해 외출하며, 언덕 위에서 나비의 표본과 아코디언, 색연필이 바람에 날아가는 ‘서랍 속’. 이 국적 없는 공간에서는 시간마저 다르게 흘러간다.
내 서랍 속의 가을에
벽시계는 종종
고장이 난다
밤새
쥐들이 태엽을 쏠아 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는 규칙적으로 뜨지 않는다
―「내 서랍 속 가을」에서
‘나’와 내 서랍 속에 담긴 추억의 조각들이 엮어 나가는 이 몽환적인 동화에서 “내 시체만을 어깨에 둘러멘 채” 마을을 지나는 “나를 향하여/ 혹은 나의 시체를 향하여” “검은 개들”(「내 서랍 속 언덕 위에서」)이 짖는 저녁, 익숙한 세계는 한순간 멀어지고 사랑과 죽음은 하나가 된다. 문학의 의의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신선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역할에 있다면 이 시집은 그러한 사명을 가장 직접적으로 실현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 오래된 서랍이 열리고 이름 없는 도시의 하늘로
이야기의 조각들이 날아오른다
제비, 뱀, 오리나무, 구두, 무당벌레, 물고기, 양귀비……. 정원사인 ‘나’의 서랍 속에 사는 이들은 ‘나’를 속이고, 유혹하고, 나에게 애원하고, 의지하면서 강렬하게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이 시집은 주인공과 등장인물과 무대를 명확하게 설정한 채 집필한 작품이다.
봄날 서랍 속에 오리나무를 심었던 정원사는 가을을 맞아 바람 부는 거리에서 낯선 얼굴을 한 오리나무와 조우하고, 여름날 정열에 사로잡혀 냇가에서 노래하던 양귀비는 겨울이 오자 결핵에 걸려 시들어 버린다.
양귀비의 결핵은 하얗다
율리아의 죽음처럼
지난해 마노 카비나에서
음독자살한
그래서 가엾은 내 양귀비는
창백한 미소를 짓는다
―「양귀비의 결핵」
단 한 편의 단편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장편소설 작가 하일지. 평생에 걸쳐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어 온 그는 시를 쓰면서도 어김없이 사랑과 배신과 증오와 추억이 혼재하는 하나의 기나긴, 신비한 서사를 엮어 내고 있다.
어린 시절 상상했던 자신만의 동화들, 누구나 하나쯤 기억하고 있을 그런 이야기들이 이 시집에 담긴 채, 우리가 오래전에 닫힌 서랍의 손잡이를 잡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