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사랑을 통해 인간관계의 욕망을 파헤친 작가 원재길의 새 장편소설. 석기 시대를 시작으로 조선 중기,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배경으로 한 시대상황 속에서 제도와 인습을 타파하고 오직 한 사람에 대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는 주인공들의 행동을 통해 ‘정절’로 풀이되는 변하지 않는 마음, 인간관계 속에서의 고집스런 기준치를 제시해, 효율만을 중시하는 가벼운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남녀관계를 통해 파헤친 욕망의 역사
원재길은 『적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프리즘으로 삼아서 역사라는 이름의 발광체에 들이대어,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간 관계에서의 온갖 욕망을 살펴보고자 한다.(작가의 말)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제도와 인습을 과감하게 타파하고 오직 한 사람에 대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발산한다. 작가는 불멸·번식에 대한 욕망, 지배·소유에 대한 욕망, 파괴·창조에 대한 욕망, 이런 것들이 부딪쳐서 한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고, 한 쌍의 연인을 통해 그들의 욕망을 파헤치며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네 사람인데 둘은 여자이고 나머지 둘은 남자이다. 다섯 이야기에서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등장한다. 각 이야기를 별개의 이야기로 읽어도 무방하고, 하나로 연결시켜서 읽어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얼개를 만들었다. 소설에 나오는 무수한 전쟁들은 이들의 사랑에서 파생된 갈등을 외부로 확장하여 드러낸 비유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석기 시대, 두 번째 이야기는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 세 번째 이야기는 삼국 시대에서 통일신라 시대, 네 번째 이야기는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 초기, 다섯 번째 이야기는 조선 중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기가 시대 배경이다. 처음에 작가는 소설 제목을 ‘서방질의 역사’ 또는 ‘간통의 역사’로도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의미를 제한하는 일을 염려하여 아이작 싱어의 「Enemies, A Love Story」에서 빌어 왔다.
1 추행시대
석기시대. 꿈을 가장 많이 꾸는 갈미는 더 이상 아기를 낳지 않기 위해 자신의 태몽을 이웃 씨족 여자에게 팔았다. 그리하여 태어난 바랄은 어느 날 머나먼 남쪽에서 물놀이를 즐기다가 돌개바람에 휘말려 온 옹낭을 만나 아내로 삼는다. 그러나 옹낭의 마음속에는 갈미의 아들 솔대가 있다. 옹낭은 남자들의 추행이 두려워 결혼했지만 남편에게 자신의 몸에서 단 한군데만은 주지 않는다. 한편 솔대는 옹낭 때문에 아내 추렴을 사랑하지 못하고 늘 그리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솔대와 옹낭은 뿌리칠 수 없는 인연으로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이들의 사랑이 시작된다.
2 화간시대
탈죽네 씨족과 닷뫼네 씨족도 일곱 개 씨족이 단일 부족을 만드는 데 합의한다. 그러나 탈죽은 아내 한알이 초승달이 뜨는 밤이면 닷뫼와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분개하여 부족 씨족 연합에서 탈퇴하고 닷뫼네 씨족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한편 닷뫼의 아들 투덜은 복수하기 위해 탈죽네 씨족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집단 강간한다. 이 일이 있은 후 닷뫼네 부족에서는 간통 및 부녀자들 유린이 자연스러운 풍속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 족장인 닷뫼가 죄값을 치르기 위해 귀향을 간다. 먼 길을 떠나 한알과 헤어지게 된 닷뫼는 그곳에서 보희를 만난다. 보희는 오랫동안 닷뫼만을 기다려 온 여인이다.
3 사통시대
아름다운 다비는 철기시대 고구려 연맹의 대모이다. 그녀는 남편 주몽에게서 무한한 성적 쾌락을 얻으며 만족해하지만 주몽은 늘 외롭다. 한편 처용은 아내 자분홍을 믿지 못하여 끊임없이 임신을 시키고 결국 처용의 의처증이 마을을 어지럽혀 먼 땅으로 쫓겨 나간다. 어느 날 자분홍은 주몽으로 변하여 다가온 여탐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는데 처용이 이들의 정사를 목격한다. 한편 긴 잠에서 깨어난 주몽의 어머니 몽화가 꿈속에서 주몽 앞으로 걸어나온다. 그리고 주몽과 자분홍 사이에 장구한 세원 동안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애처로와하지만, 처용은 다시 아내를 데리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자분홍을 겨우 찾아낸 주몽은 다시 애통해하면서 울부짖는다.
4 동거시대
남편 백공을 따라 중국에 온 양미는 다시는 달산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절망의 날을 보낸다. 나이가 든 양미는 며느리에게 자신과 같은 이름으로 바꾸어줄 것을 부탁한다. 이리하여 며느리 양미는 다시 자신의 며느리에게 양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어 12대 백공의 아내 양미에 이르는데 이 여자는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는 추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양미의 모습이 변해 가더니 점차 아리따운 백공1세의 양미 모습으이 나타난다. 조선 땅으로 돌아온 이들 부부는 거기서 달산을 만난다. 재회한 양미와 달산은 그들만의 시간을 위해 몰래 여행을 떠난다. 한편 여행 중인 백공은 문득 먼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는데 순간 현재 옆집에 살고 있는 달산이 몇백 년 전 바로 그 달산임을 깨닫는다.
5 별거시대
조선의 외교통상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황만은 베트남을 여행하던 중 아내 장희련이 옆집 남자 안몽환과 정을 나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다. 그리하여 황만은 복수를 위해 몽환을 찾아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몽환은 희련의 행적을 찾으면서 황만을 피해 도망을 간다. 세월이 흘러 현대. 몽환은 이제 대학 강사이다. 어느 날 장희련을 찾는 문구를 신문에 내본다. 그리고 움집터가 있는 유적지 앞에서 몽환 앞에 희련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장구한 세월 후 이들의 재회는 애로틱한 만남으로 이어진다. “몽환의 지난날을 엿본 희련은 그의 몸을 애무할 때 주로 흉터를 핥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곧 새살이 돋았고, 마른 물고기 비늘처럼 흉터가 떨어져 나왔다. 흉터는 모조리 자줏빛 금낭화 꽃잎으로 바뀌어 침실을 그윽한 향으로 채웠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은 몽환은 황만이 아직 살아서 자신을 찾고 있음을 알게 되고 결전의 순간이 다가온다.
변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속도 위주의 인간 관계를 고발
이 소설의 큰 테마는 ‘정절’이다. 정절이란, 작가의 사전엔 이렇게 나와 있다. 한번 사람을 믿고 사랑하기로 작정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오고 백년 천년의 세월이 흘러 몇 번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 고집스러운 자세이다.(작가의 말) 원재길이 『적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그려내고자 한 동기는 인간 관계마저 급속도로 변질시키는 ‘문명의 속도’에 대한 반항에서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 그 쓸쓸한 사랑을 우리가 반드시 부여잡아야만 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종종 잃어버리고 사는 믿음과 신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에서 정절은 자신과 맺은 약속의 다른 이름이다. 작가는 『적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이러한 고집스러운 자세를 통해 효율을 중시하는 세태를 꼬집고, 점차 소홀해져 가는 우리의 정신 세계, 또는 인문학의 세계에 대한 회복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역사에 바탕을 둔 상상력과 야심 찬 실험적 형식
원재길의 첫번째 창작집 『누이의 방』(1997)에서 작가는 이 세상과 저세상 사이의 경계를 부드러운 완충 지대로 전환시키면서 따뜻한 위안과 화해, 소통의 공간을 창조하고자 했다. 전작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2000)에서는 독특한 이야기꾼으로서 상상력의 물꼬를 터갔다. 이번 원재길의 신작 『적들의 사랑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특히 그 형식과 소재 면에서 작가의 야심을 드러낸 작품이다. 먼저 특이한 시대들을 염주처럼 꿰어놓은 연속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각각으로 끊겨져도 될 것이 거의 통시적으로 잇대어진다. 그래서 전체로서는 신화 혹은 허구까지를 하나의 사가로 아우르는 계도(系圖)를 읽을 수 있다.(시인 고은의 말)
원재길은 옛날 이야기, 즉 전설·민담·신화를 상상력의 무한한 소재로 본다. 그러나 우리에게 역사는 무겁게 다가온다. 『적들의 사랑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역사에 대해 흥미롭고 새로운 시각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즉 사실에 바탕을 두되 지나치게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환상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되 현실성을 고려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작가는 장기간 사료를 뒤지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였다. 그리고 시대마다 생활상과 복식과 음식 및 토종과 외래종의 유입 시기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3년에 걸쳐서 결실을 얻은 작품이 『적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원재길
1959년 서울 출생. 연세대 사학과 및 같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6년 시동인지 《세상읽기》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전작 장편소설 『겉옷과 속옷』을 발표하여 소설가의 길에 들어섰다. 소설집 『누이의 방』,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 장편소설 『그 여자를 찾아가는 여행』, 『오해』, 『모닥불을 밟아라』, 우화소설 『별똥별』 등이 있다.
1. 추행(醜行)시대2. 화간(和姦)시대3. 사통(私通)시대4. 동거(同居)시대5. 별거(別居)시대